[매묵]2024년 6월 6일 목요일[(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본기도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거룩한 제대에 제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원래는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진상(珍賞)입니다. '진상'의 유력한 어원 중 하나는 바로 '왕이나 고위층에게 진귀한 물건이나 지방의 토산품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새 쓰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진상'의 어원으로 꼽힌 이유는 진상이 가지는 폐단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라고 하지만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귀한 것을 마련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고, 구하기 힘든 것을 요구해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 많이 쓰이는 '진상'은 그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땅콩회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땅콩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기에 봉지를 드리고 먹겠다고 하면 접시에 담아 드리는 것이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상 손님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주지 않고, 봉지로 주었다고 화를 내면서 비행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후에 비행기를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믿고,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혔던 ‘진상’의 한 예입니다. 이런 진상의 이야기는 곧잘 언론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입니다. 바리사이의 원래 의미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사이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사이는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진상’ 행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하는 말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지고가야 할 짐을 남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조문을 외우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릇의 겉만 닦고 속은 닦지 않는 것처럼, 바리사이는 겉은 화려하게 꾸미지만 속마음은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모든 바리사이가 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상 신자, 진상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9주 목요일
복음: 마르 12,28-34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원리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바로 사랑의 계명이요 사랑의 법규입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와 균형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8-3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 참된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 사랑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사랑, 상호 성장하는 사랑,
통합되고 완성되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우리를 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고, 가장 먼저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흠숭과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게도 향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의 사랑은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그 외에도 하나가 추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존중, 배려와 호의적인 시선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충만한데, 자신을 향한 사랑은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여깁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업신여깁니다.
겸손의 덕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학대 역시 금물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도 않고, 내가 나에게 아주 박한 점수를 매기는데,
이 세상 누가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겠습니까? 좋은 점수를 주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허물 투성이요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부단히 되풀이 되는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럴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부당한 우리이지만,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 안에 머무시고, 우리 안에서 호흡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부족한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건네시는 거룩하고 품위 있는 의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 티모테오 2,12)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의 길인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르 12,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행위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명분과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차지, 소유로 삼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 계명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됩니다.
곧 당신이 ‘먼저 베푼 사랑’을 서로 베푸는 ‘하느님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먼저 앞세우고 있는가?” 물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재물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6.5.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673-754) 기념일
2티모1,1-3.6-12 마르12,18-27
영원한 구원의 삶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8,29)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도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계속 축제같은 아름다운 날씨의 연속입니다.
3월20일부터 시작된 수도원 개인피정집 2채와 수련소 건축이 어제 6월4일로써 끝나고,
그동안 2개월 보름쯤 수고해준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사'인 이승용 아오스팅, 이현옥 헤레나 부부는
왜관 고향집으로 떠났습니다.
참 아담하고 소박한 세채의 건물이 볼수록 사랑스러워 자꾸 눈길이 갑니다.
“순식간 지난 듯 합니다.
거의 3개월인데 마치 3일쯤 걸린 듯 합니다.
하루 평균 10여명씩 인부들이 머물렀고 이들의 음식 뒷바라지를 해줬으니
이보다 역동적인 공동체는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지만 기뻤습니다.
우리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해냈습니다.”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떠난다하니 서운한 감정이 들기는 처음입니다.
그동안 하루의 일이 끝나면 끝기도때마다, 또 날마다 미사때 마다 가지런히 앉아있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 때문에 가족처럼 느껴졌던가 봅니다.
정말 내일처럼 최선을 다함으로 감동을 선사한 참 진실하고 성실한 부부입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일을 끝낸 기쁨이 큰지 흡사 승리의 무용담을 나누는 듯 했습니다.
‘하루 묵었다 내일 갔으면 좋겠다.’ 말했지만 미련없이 오후 늦게 떠났고
저는 부부에게 강복을 주었습니다.
문득 떠남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홀가분한 죽음이겠는가,
비록 두 부부는 떠나서 보이지 않지만 왜관집으로 귀향(歸鄕)하여 살아 있듯이,
세상을 떠난 죽음도 그렇지 않겠나,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하여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강론을 나눌 때 나눈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맞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피정집을 짓는 아오스팅 형제님!
맛있는 밥을 짓는 헬레나 자매님!
또 좋은 강론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프란치스코 신부!
모두가 하느님 눈에는 사랑스런 당신의 일꾼일 것입니다.”
“ㅎㅎ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 각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이 영원한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나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쓴 책 서문 내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산 이들은 죽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이요 역설인가!
물론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난다.
그러니 우리 산 이들이 죽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진실인가!
우리는 영원으로 운명되어졌다(We are destined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을 위해 지음 받았다(We are made for eternity)”
오늘 복음의 부활논쟁에서도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진리를 명명백백 밝히십니다.
새삼 우리의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부활의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는 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중 탈출기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죽은 이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the God of Jacob).’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새삼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확신에 넘치는 고백은 부활신앙에서 연유됨을 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샘솟는 내적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죽음을 폐지하시고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빛나는 삶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정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자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입니다.
그 거칠고 위험한 고난의 삶중에도 80세 전후의 장수를 누리시다 순교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게르만인들의 사도인 보니파시오는 ‘평화의 친구“라는 뜻의 빈프리트라는 이름을 지닌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되었고, 716년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게르만족의 복음화를 위해
그를 선교사로 파견합니다.
교황은 이때 그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보니파시오 이름도 주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정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불가사의의 정력적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풀다 수도원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교구들을, 수도원들을 설립합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그는 마침내 프랑스에까지 진출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던중 755년 6월5일 오순절에
현재 네델란드 도쿰 근처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52명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고 풀다 수도원에 묻힙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기립니다.
“독일에서 정치, 교회, 영성의 영역에서 발전한 모든 것은 보니파시오가 놓은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후계자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황제와 왕들이 기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성인이 편지 다음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합시다.”
정말 부활의 희망으로 무장된 ‘주님의 불퇴전의 용사'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였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백절불굴, 주님의 희망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ㄱ). 아멘.
6/6(목)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상 신자, 진상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그 외에도 하나가 추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존중, 배려와 호의적인 시선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도 않고, 내가 나에게 아주 박한 점수를 매기는데,
이 세상 누가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겠습니까? 좋은 점수를 주겠습니까?
세상 부족한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건네시는 거룩하고 품위 있는 의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빛나는 삶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정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자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입니다.
그 거칠고 위험한 고난의 삶중에도 80세 전후의 장수를 누리시다 순교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기립니다.
“독일에서 정치, 교회, 영성의 영역에서 발전한 모든 것은 보니파시오가 놓은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후계자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황제와 왕들이 기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이수철 신부)
6/6(목)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530(160)일 기도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6일(목) 9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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