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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6월 19일 수요일[(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6월 19일 수요일[(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27(26),7.9 참조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갑자기 불 병거가 나타나더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1.6-14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걷다가, 예리코에 도착하자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요르단 강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7 예언자들의 무리 가운데 쉰 명이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요르단 강 가에 멈추어 서자, 그들도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섰다.
8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9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13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섰다.
14 그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1(30),20.21.24(◎ 25 참조)
◎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
○ 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시고, 당신 거처 안에 숨기시어, 사나운 구설에서 구하시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은 진실한 이들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자에게는 호되게 갚으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4,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예물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살리는 양식이 되고
사람을 새롭게 하는 성사가 되게 하시니
이 제사가 저희 육신과 영혼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7(26),4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요한 17,1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자명한 수학적인 진리도 있고, 존재의 근거를 알려주는 철학적인 진리도 있고, 현대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과 물질의 진리도 있습니다. 수학적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감시의 그물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그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유배를 갔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유배가 끝나 자유인이 되었던 그는 성경 말씀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유명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가 되면서 성경이 금서로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이 감옥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도, 극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극한의 순교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순교한 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이 올 때까지, 30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있었습니다. 사제가 없이, 미사가 없이 한국교회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직해라는 성경말씀입니다. 교우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조직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물질의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사목지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0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복음나누기 7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복음나누기는 미국의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6,1-6.16-18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또한 자연에게 별의별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죄를 쌓아갑니다.

때로 이 산더미 같은 죄 어떻게 보속해야 되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선•기도•단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있는 자선•기도•단식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외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래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 그리고 또 다른 부인 시간, 재능, 경험과 연륜 등등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오늘의 말씀>(6/19) : 연중 11주간 수요일

* <제1독서> : 2열왕 2, 1. 6-14 * <복음> : 마태 6, 1-6, 16-18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오늘의 강론> :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6.18.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21,17-29 마태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닮의 여정”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된다”

 

요즘 눈에 자주 띄는 푸른 하늘에 흰구름을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제 짧은 자작시입니다.

누구나에 공통된 하늘 같은 하느님 안에 살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웬만한 책들은 도서실로 보내지만 감명깊었던,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들은 방에나 집무실에 보관합니다. 

 

‘메르켈 리더십’이 그런책입니다.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무려 16년간 재임했던 분인데 퇴임후로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 사실도 참 놀랍고 멋집니다.

재임중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책, ‘메르켈 리더십’의 마지막 문장도 잊지 못합니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 지 묻는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노력했다(She tried).”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이 사실이 메르켈을 대변하고 있다.’

 

알베르크 슈바이처가 쓴 바흐 전기에서 다음같은 문답도 잊지 못합니다.

슈바이처가 묻고 바흐가 대답합니다.

“어떻게 자기 예술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낼수 있습니까?”

“나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다산의 삼근계三勤戒>

 

그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참 반듯한 천재의 특징은 “부지런한 천재, 노력하는 천재”임을 깨닫습니다.

상담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참으로 죄를 찾아보기 힘든 한결같이 성실한 분들도 간혹 만납니다.

이런 참 좋은 성인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의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있습니다. 

 

감쪽같이 합법적으로 자행한 아합과 이제벨 합작품의 완전범죄와 같은 나봇의 살인에 대한 사실이

폭로되는 오늘의 제1독서 장면은 흡사 지옥의 심판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 눈에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격적입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심판이 참으로 단호하고 준열합니다.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져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아합에 이어 이제벨에 대한 천벌도 예고됩니다. 사가(史家)의 아합에 대한 평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엘리야의 선언에 회개한 아합에게 당장의 재앙은 보류되지만 그의 아들대에 가서는

에누리 없이 재앙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제1독서가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면, 오늘 복음은 천국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사명을 수행하며, 사랑하며 살기만으로도

턱없이 짧은 세상인데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해도 더욱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더욱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뿐이기에

남는 기도문은 “주님,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 하나 뿐일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하느님 친히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지금부터의 삶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단호한 결의와 선택으로 바로 지상천국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답은 하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주님의 제6 대당명제인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사랑뿐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기도뿐입니다.

원수를 좋아하라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과 존중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하느님 눈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와 박해자에게도 자기탓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사정이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의 악의 희생자일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참 많을 수 있습니다.

무지에 기인한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왜곡된 시선이나 생각으로

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을 닮아, 끼리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의 편협한 이기적 사랑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사(聖事)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결코 동호회원들이나 친목회원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있는 모든 존재가 살 권리가 있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들이요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통절히 깨닫는 다면 전쟁의 악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난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물인생에 부여된 평생숙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이런 평생숙제를 목전에 둔 우리들인데, 평생 기도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일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들인데, 또 인생 후반에는 병마와의 싸움인데, 도대체 죄지을 시간이, 세상 헛된 일들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여기서 사랑의 완전함(perfectin)이란 대자대비하신 그분을 닮은 사랑의 너그러움(generosity),

온전함(wholeness)을 뜻합니다.

말그대로 둥근 마음, 둥근 삶의 둥근 사랑입니다. 

 

어제 문화영성대학원 전례 강의 중인 원장수사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도 소개합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오늘로 종강입니다.”

“종강! 축하드립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1학기 강의였네요!”

 

마지막 강의 주제가 '십자가'라니 참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모두가 주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수렴되며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67,1). 아멘.


6/19(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조재형 신부)

 

2.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노자의 도덕경 ...天地道(천지도)

천지의 도는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부쟁이선승 불언이선응)
다투지 않아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대응하며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불소이자래 천연이선모)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가만히 있어도 잘 꾀하니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하늘의 그물은 넓디넓어서, 성기면서도 놓치는 것이 없다.(이수철 신부)

 

6/19(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543(173)일 기도

 

복음<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19일(수) 12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