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6월 28일 금요일[(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본기도
복된 이레네오 주교가 진리를 가르치며
교회의 평화를 이루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믿음과 사랑으로 새롭게 되어
일치와 화목을 위해 온 힘을 다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5,1-12
1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통치 제구년 열째 달 초열흘날에,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곳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공격 축대를 쌓았다.
2 이렇게 도성은 치드키야 임금 제십일년까지 포위당하였다.
3 그달 초아흐렛날, 도성에 기근이 심해지고 나라 백성에게 양식이 떨어졌다.
4 드디어 성벽이 뚫렸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칼데아인들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임금의 정원 곁에 있는
두 성벽 사이 대문을 통하여 아라바 쪽으로 갔다.
5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임금을 뒤쫓아 예리코의 들판에서 그를 따라잡자,
그의 모든 군대는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6 그들이 임금을 사로잡은 다음,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임금에게 데리고 올라가니,
바빌론 임금이 그에게 판결을 내렸다.
7 그는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8 다섯째 달 초이렛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제십구년에
바빌론 임금의 신하인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9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웠다.
이렇게 그는 큰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0 또한 친위대장이 이끄는 칼데아인들의 모든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가며 허물었다.
11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은 또 도성에 남아 있던 나머지 백성과
바빌론 임금에게 넘어간 자들,
그리고 그 밖의 남은 무리를 끌고 갔다.
12 그러나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비파를 걸었노라. ◎
○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는구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을러대는구나.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우리에게 한가락 불러 보아라.” ◎
○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
○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티모 2,22ㄴ-26)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복된 이레네오 주교의 천상 탄일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으로 이 찬미의 제사를 드리오니
저희가 진리를 사랑하여 신앙을 온전히 수호하고
완전한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주님의 자비로 저희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어
복된 이레네오 주교가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영광스럽게 되었듯이
그 신앙을 참되게 따르는 저희도 의롭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이레네오 주교학자 순교자 기념일
1998년 제기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칠갑산 청소년 수련장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둘째 날에 본당 신부님께서 사목위원들과 캠프장으로 방문 왔습니다. 먼 길인데도 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사목위원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간식을 준비해 왔고, 본당 신부님은 필요한 데 쓰라면서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보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1시간 정도 머물기 위해서 왕복 8시간을 걸려서 왔습니다. 신부님에게 왕복 8시간 걸리는 거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당의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4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학생들이 부주임 신부님의 인솔 하에 오스틴에 있는 피정의 집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저도 사목위원들과 함께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피정의 집으로 격려차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격려금을 주고, 1시간가량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적당히 구름이 낀 날이어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제가 선글라스 케이스를 가져간다는 것이 서두르는 바람에 면도기 케이스를 가져갔습니다. 선글라스를 쓰려고 케이스를 열었는데 면도기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왕복 8시간을 길 위에 있으면서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들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길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대관령도 미시령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차량 통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잊혀지는 걸 보았습니다. 산보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덜 피곤하고, 덜 피곤하니 산보가 즐겁습니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가축을 길들였습니다. ‘개, 양, 소, 말, 낙타, 닭, 고양이, 돼지’는 인류가 길들여서 같이 지내는 가축입니다. 신발도 처음에는 발에 익숙하지 않지만 자꾸 신으면 길이 들어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사제복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입으면 사제복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익숙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잘 키운 부부는 닮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눈빛이 비슷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가 비슷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님께서 격려 방문한 것을 배웠듯이, 부주임 신부님도 언젠가 그렇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태 8,1-4: 한센병 환자의 치유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며 치유해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이는 마치 이집트에 내린 열 개의 재앙(탈출기 7,14-12,36)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암시해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치신 바를 몸소 성취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하산은 당신이 구원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를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6.27.연중 제12주간 목요일 2열왕24,8-17 마태7,21-29
그리스도 반석 위에 인생집 짓기
“기본에 충실한,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
성서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내용은 시편에 이어 요즘 계속되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입니다.
오늘로서 산상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 집짓는 자들의 비유, 청중의 반응 세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집짓는 자들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내용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어느쪽입니까?
완성형 인생 집은 없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미완성성형 인생 집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쓰는 강론 역시 저에겐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일에 속합니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인생 집 짓기에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대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에 도움이 될 예화를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 오늘 우리 믿는 이들이 특히 경청해야 할 내용입니다.
“미루게 될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은 부지런함의 기본이다.
부지런함이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다산>
“나는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지금 수준의 정신적 정서적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식생활을 절제하고 근력운동을 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글 쓰기를 놓지 않으려 한다.
기력이 달릴 때는 남은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다는 말을 되뇐다.
함께 나이먹어가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이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믿지 말자고. 어리석은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고.
젊은이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자고.”<유시민>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묻는 질문에서 서방국가 대부분은 ‘가족’을 꼽은 데 반해,
한국은 첫째가 ‘물질적 풍요’였다.
‘인생에서 친구나 공동체적 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겨우 3%만 응답했고 최하위였다.
독서율을 보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에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는다는 것. 이건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때까지 불교,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기사도, 몽골과 이슬람의 정복전쟁등 거의 모든 문명이 ‘칼과 피’로 점철될 때
한반도에선 문치가 대세였다.
수천년동안 이 땅에서 삶의 최고가치는 독서였다.
세상을 바꾸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어야 한다.
대화와 토론, 즉 로고스의 향연이 도처에 흘러넘쳐야 한다.
그것은 에로스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지금은 먹방과 노래, 춤과 피지컬의 시대다.
연애 자체를 포기한 청춘이 수두룩하다.
단군 이래 청춘의 연애가 이토록 힘겨웠던 시절이 있을까?
사랑은 하룻밤의 열기가 아니라 창조와 교감의 열정에서 비롯한다.
출산은 그 절정에 속한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푸르른 청춘이 활짝 피어나야 한다.
청춘의 특권, 즉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포기한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건
너무 서글픈 일아닌가?
청춘이 쇠락한 시대를 중년과 노년은 또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그야말로 난세다. 특히 청년들에겐 가혹한 시절이다.
이 난세를 명랑하고 슬기롭게 건너가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곧 길이다!”<고전평론가;고미숙>
참으로 한결같은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책임을 다하는, 반석 위의 인생 집을 짓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분이 얼마전 카톡 메시지로 보내준 감동적인 진솔한 고백을 나눕니다.
“불교신자였던 아오스팅씨를 세례성사를 통해 구원해달라고 만7년 묵주기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기도했던 제 삼십대가 떠오릅니다.
그후 요셉수도원에서 성령받고, 통회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리던 아오스팅씨입니다.
집에 못하나도 칠 수 없었던 남편 아오스팅씨로 거듭나면서 집을 짓는 은사를 받아 세례받고
만10년 만에 요셉수도원 성전을 지은 기적이 기도의 힘입니다.
요셉수도원 수사님들께서 사랑해 주시고 믿어주셔서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집짓는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부님이 보내주신 강론집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묵상하며 콩나물이 자라듯이
아오스팅씨가 성숙해졌습니다.
우리 부부는 필히 요셉수도원에 감사드리고 보답을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분들 나름대로 성실히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정말 온전한 인생집 짓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단한 하느님 말씀의 실천과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없이는 불완전합니다.
참 좋은 의견에 완벽한 삶에 이론인데 하느님과 기도가 빠진 삶을 보노라면 참 허전한 생각이 듭니다.
궁극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해 답이 없습니다.
지난 24일 화성에서의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로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새삼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같은 위태한 가정은, 사회는, 나라는 아닌지 매사 깊이 성찰하며
점검하고 보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떠난 이들에게는 주님의 자비를,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주님 친히 위로해 주시기를 간청하며,
나라의 실질적 배려와 도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인재와 같은 대형사고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주님,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이 짝을 이뤄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 해도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자기착각의 피상적 헛된 짝사랑일뿐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름대로 잘 살았다 자부하는데 이와같은 주님의 반응이라면 얼마나 충격적이겠는지요!
완전히 착각이요,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내 뜻대로 지은 인생 집이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슬기롭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어리석게도 모래위에 인생집을 짓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 임금 여호야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니 그대로 모래 위에 나라집을 세웠던 것이며,
하느님 응징의 도구였던 바빌론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침공으로 유린되어 박살난 유다 나라입니다.
우리의 인생 집을 짓는데 참 유익한 반면교사가 되는 유다 임금 여호아킨입니다.
위기시 인생 집의 실상이 다음 복음 말씀을 통해 그대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은 모래 위에 인생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 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어디에 속하겠는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말씀 실행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이들이 정말 슬기로운 이들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경청-묵상-기도-관상-실행”의 렉시오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그리스도 예수님 위에 인생 집을 짓는 마음으로
온힘과 온마음과 온정성을 다해 강론을 썼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 인생 집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미완성 상태에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지침이 없이, 한결같은 열정과 정성으로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6/28(금)[(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조재형 신부)
2.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루하루 날마다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말씀 실행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이들이 정말 슬기로운 이들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경청-묵상-기도-관상-실행”의 렉시오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6/28(금)[(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제7일차 기도
복음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28일(금) 6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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