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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6월 30일 주일[(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6월 30일 주일[(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드리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입당송

시편 47(46),2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1,13-15; 2,23-24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
2,23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ㄴ 참조)
◎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
○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8,7.9.13-15
형제 여러분, 7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목자이신 주님, 주님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의 몸과 마음을 보살펴 주시어, 주님 백성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일치의 토대가 되어 온 교회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2. 한반도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참평화를 바라시는 주님, 남북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할 수 있는 화해와 용서의 마음을 내려 주시어,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저희를 통하여 한반도가 화해와 용서의 장이 되게 하소서.

3. 고통받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온유하신 주님,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굽어살피시고 위로하시어, 그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 이웃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자비하신 주님,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보살펴 주시어, 그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저희가 복음을 실천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예물기도

하느님,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3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03(102),1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어린 딸을 살리려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가 그 모습과 그분의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저는 199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경본을 읽을 때 꼭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황과 우리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부분입니다. 33년을 지내면서 우리 교황은 3분을 이야기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주교는 4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그리고 정순택 베드로 주교입니다. 이곳 댈러스 교구에서는 우리 주교 ‘Burns Kelly'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매 미사마다 교황과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은 그만큼 그분들의 직무와 직책이 무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이 교회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 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26대 사목회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27대 사목회가 출범합니다. 26대 사목회를 이끌어 주셨던 사목회장님과 사목위원들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6대 사목회는 팬데믹의 어려움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1977년 시작하여 이제 27대 사목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가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교황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지난 주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기로 한 어떤 행사에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도,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간이 늦어지고, 애를 태우고, 끼니도 제때 못 때운 관계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내 또래 다른 영감님들은 저리 세상 편히 지내고 계시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뭔 꼴이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굳이 안 그래도 때 되면 삼시 세끼 딱딱 밥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과 생애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936년 12월 17일생이시니, 새롭게 정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87세+6개월이십니다.

한쪽 폐도 온전치 않은 데다, 무릎까지 문제이니,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래 분들은 안 그런 분들도 많지만, 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계시거나,

오늘 내일 하시거나, 그래서 산에 누워 계시나 집에 누워 계시나 별반 차이 없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그 연세에도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교황님을 시간대 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파악은 안 되지만,

아마도 이분도 여러 이유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살아생전 사임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연세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카스텔간돌프 교황 전용 별장에서 편히 쉬고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서는 그러지 않으실 듯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교회 쇄신과 개혁을 위해, 시노달리타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순교자의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미 달릴 곳을 다 달리신 교황님이시지만,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이 너무나 사소한 고통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공동선을 위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남아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활활 불태워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작가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를 창조하셨음을 말하며, <창세기>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창세 1,27)는 말씀을 반향해줍니다.

"그러나 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2,24)는 사실도 동시에 말하면서, 불멸의 상급을 받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지혜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지혜 6,19).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입니다.”

(지혜 15,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 어려움에 닥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하는 장면으로, 먼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밝히십니다.

이는 물론 물질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물질적, 영적 이중적 의미로 확장해 어려움에 빠진 신자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복음은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인물이 보여준 것은 ‘간절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열병 앓은 여인에게는 “딸아, 너의 믿음이 네를 구원하였다.”(마르 5,34)라고,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두 번째 것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이도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그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 23)

회당장은 그야말로 전적인 신뢰의 자세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시되 인간만은 당신 '손'으로 창조하셨듯이, 이제 당신 '손'을 얹으시어 딸을 치유하시어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간청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르 5, 35)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참담한 순간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진정으로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르 5, 36)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르타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믿는다면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요한 11, 23-26 참조) 

그렇습니다. 

죽음의 이 순간이 바로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11, 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이로에게도 이 순간이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나아가 이미 죽은 딸을 살려주실 분으로, 더 깊은 믿음을 끌어올리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고,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가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배하고 있던 자리를 예수님께서 지배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눈에 보이는 희망이 가라진 현실 상황에서, 바로 그 상황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단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기다리는 인격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으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야이로'라는 이름의 뜻대로, 곧 ‘주님께서 깨우치리라, 일으키리라’는 그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탈리다 쿰!”(마르 5,41), 이 말씀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일어나 새 사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6.29.토요일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도12,1-11 2티모4,6-8.17-18 마태16,13-19

                                                          교회의 두 기둥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위 화답송 시편도 좋고,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화답송 후렴도 참 경쾌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교회의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니 기쁨이 저절로 샘솟는 느낌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갑니다. 

감사의 응답이 바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사람으로,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겸손한 삶이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91장도 두 사도의 교회를 위한 보완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사실 두 사도 모두 67년경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명을 환히 밝혀 비교해 주는 감사송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

 

참 아름다운 보완관계의 사도요, 하느님께서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읽은 주석 내용 역시 두분의 관계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드로는 일치와 연속성의 위대한 상징인 교황에 의해 대표됩니다.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회가 분열되고 붕괴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중앙 조직에서 분리된 교회의 일부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교회는 베드로의 중심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분열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면 바오로는 또 다른 핵심 역할인 예언적이고 선교적인 역할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장자리에서 일하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교회의 관심을

소외된 사회적 관심 분야로 밀어넣고, 교회의 경계를 더욱 확장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하는’(semper reformanda) 교회입니다.”

 

두 사도의 보완으로 비로소 가톨릭 교회는 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 늘 한결같이 빛나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는 삶입니다.

 

바로 살아있는 진리의 특징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마디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를 포함한 모든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성현들이 말하는 어른도 이런 분입니다.

 

“어른이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존재다.”<다산>

바로 안주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 노력하는 다산의 피나는 내적고투를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어른은 말을 할 때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행할 때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며,

오직 의만 따를 뿐이다.”

의로움을 추구하며 진리에 활짝 열려 있는 유연한 겸손한 이가 참으로 어른이자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똑같은 성인을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의 역할이 있고 바오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바오로를 닮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나 고유의 성인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보완하고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고유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사도는 우리가 배울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극찬과 더불어 무한한 축복을 받아낸 베드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을 정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이런 고백이요, 역시 베드로를 꿰뚫어 알아본 주님의 감격에

벅찬 감동적 고백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런 신앙고백의 베드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후 주님을 곡해함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이 주님의 극찬과 축복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늘 평생 새롭게 자신을 쇄신하는 기회로 삼게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의 추억이 “늘 옛스러우면서 늘 새로운” 삶을 살게 함을 봅니다. 

 

다음 순교의 죽음을 예감한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그대로 우리의 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역시 사도와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일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사도의 삶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얼마나 힘찬 고무적인 고백인지요! 참으로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로 영적승리로 삶을 마감한

바오로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그 깊이를 보여줍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방심할 수 없는 영적전쟁입니다. 혼자서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교회의 도움,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베드로가, 바오로가 장엄한 순교로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음도 교회가,

주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천사의 보호아래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교회 공동체의 열렬하고 한결같은 기도 덕분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사도행전 중심부에,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는

이 구절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배경이신 주님과 그분의 교회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내 삶의 현장에서 천하무적 일당백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6/30(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되새김 구절

 

1.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조재형 신부)

 

2.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명을 환히 밝혀 비교해 주는 감사송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이수철 신부)

 

6/30(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제9일차 기도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30일(일) 4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