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7월 6일 토요일[(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본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9,11-1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1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12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 이 일을 하실 주님의 말씀이다. ─
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14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 주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당신 백성에게 평화를 말씀하신다.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시는 어리석게 살지 않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저는 2019년 8월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매년 6월에 교구사제모임이 있습니다. 2020년 6월에는 과테말라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고, 교구사제모임은 취소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아직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지 않아서 교구사제모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22년에는 댈러스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있던 신부님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신부님만이 저보다 먼저 미국으로 왔습니다. 2023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2019년,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있던 신부님들은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고, 저와 같이 2019년에 미국에 왔던 신부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24년에는 워싱턴 DC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의 신문사 일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겼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온 신부님도, 저와 같이 왔던 신부님도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오래 되었고, 제일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시간의 무상함도 느껴집니다. 너무 오래있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찢어지고, 새 술도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낡은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처럼 미국에 온지 오랜 된 사제가 낡은 부대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이제 막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사제가 새 부대라는 의미도 아닐 겁니다. 저처럼 33년 된 사제가 오래된 술은 아닐 겁니다.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이 새 술은 아닐 겁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생각’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언제나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오래된 술과 낡은 부대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라는 새 술을 준비하였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비록 많은 지식이 있고,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낡은 부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받아들였던 어부들은 새 부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의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은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어버린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멍에를 남에게 씌우고 편한 길만 가는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도 새 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새 술이 될까요?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술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새 술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가 새 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새 술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새 술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착한 이웃이 새 술입니다. 겸손한 사람,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능력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직책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 할 수 있다면 저도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병들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깨끗하게 되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인해서 매일 새로운 세포들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들의 신앙생활로 거듭나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밭에는 농부가 원하지 않는 잡초가 함께 자라나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악한 것들이 자리 잡곤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악한 세력들입니다. ‘탐욕, 분노, 질투, 게으름, 미색, 교만, 과식’입니다. 이것들은 암세포와 같아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9,14-17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한 아이의 출생이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저출산 시대인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다들 아이 얼굴 구경하러 가고,
마을 입구에는 축하 플래카드까지 내걸립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우리는 비정상이 정상이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청춘 남녀들이 결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결혼식이 거행되고,
주님 안에 한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 엄청난 일로 여겨집니다.
요즘 우리 모두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혼인이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두 가문이 만나고,
두 가치관과 두 세상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살아왔는데, 이제는 함께 걸어줄 동반자가 생긴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할 평생 동지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이토록 기쁨 충만한 혼인 잔칫날에 어두운 표정으로 인상 쓰고 있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잘 차려진 축하연에 단식한다며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우울하게 앉아있다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가장 기본적인 분위기는 축제입니다.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은 혼인 당사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딱 마음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세상 멋진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그분과 이 세상, 그분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
그분과 우리 죄인의 혼인을 의미하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매일 새롭게 결합되고 한 몸이 됩니다.
매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우리 사이의 혼인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주님과 혼인한 우리는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그 혼인을 갱신한다니,
이 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하루는 매일이 기쁨 충만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이 지상 순례 여정이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매일 주님과 혼인하고, 그 혼인을 갱신하는 우리들이니, 얼굴을 활짝 펴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왜 단식을 하며, 무엇을 위해 하며,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
구약성경에서 ‘단식’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판관 20,26-28), 회개의 표시로(요엘 2,12),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의 표시로(2사무 7,6) 행해졌으며, 이사야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사 58,6-7)에 대해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전에 광야에서 단식하셨으며(마태 4,2), 사도의 임명이나 파견 때 행해졌고(사도 13,2-3;14,23), 마태오 복음사가는 단식할 때의 바른 자세(마태 6,17-18)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마태 9,15)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신랑이 와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34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신심 행위로 1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았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요한 3,2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천'과 '새 포도주'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 9,16-17)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 9,17)
사실 이 비유들은 ‘새 것’(헝겊, 포도주)과 ‘묵은 것’(옷, 포도주 부대)의 부조화를 강조하면서, 신랑이신 예수님의 때는 단식이 적합하지 않는 특별한 순간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치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비연계성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는 이 말은 붙임으로써 다른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곧 ‘묵은 것’을 잃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묵은 것’이 ‘새 것’에 의해서만 보존된다는 것을 제시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5.금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1821-1846) 신심미사
2역대24,18-22 로마5,1-5 마태10.17-22
순교적 삶
“섬겨라, 희망하라, 견뎌라”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2019년까지 대축일로 지내오다 주교회의 2019년 추계정기총회의 결정에 따라 2020년부터
신심미사로 봉헌합니다.
본격적 강론에 앞서 몇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엊그제 교황님과 이민자들과 만남을 주선했던 마티아 신부의 두 고백입니다.
“교황님은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고 그들이 행하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모든 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교황님은 그들을 ‘계속 나아가라’(to keep going)고 격려했다.”
교황님의 ‘계속 나아가라(to keep going)’는 특징적 말마디는 좌절함이 없이 줄기차게
계속 살아가라는 격려입니다.
또 하나의 고백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들을 구출하고 환영했을 때, 우리를 구원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역경에 처한 이들을 구원함이 바로 자신에게도 구원이 된다는 말마디입니다.
어제 읽은 ‘교부들의 발자취’에서 프랑스 출신의 놀라의 성 파울리누스(355-431) 주교의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간은 먼지요 그림자다.”
“나에게 유일한 예술은 신앙이요, 그리스도는 나의 시(詩)입니다.”
오늘 옛 어른이 말씀도 새롭습니다.
“세상은 나에게서 비롯되고, 나는 공부에서 비롯된다.
나를 닦는 공부의 길은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다.”<다산>
‘공부하다 죽어라’는 고승의 말도 생각납니다. 공부의 궁극목표는 결국 이웃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로가 군자를 묻자 공자가 답했다.
‘자기 몸을 닦아서 공경하는 것이다.’
‘자기 몸을 닦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은 요순임금에도 어렵다.’”
역시 수신의 궁극 목표도 이웃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의 두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흡사 세월 흐름의 빠르기가 기차를 타고 갈 때
휙휙지나는 풍경 모습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지나고 나면 한 순간 같습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신독과 더불어 떠오른 생각입니다.
“신독(愼獨), ‘홀로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도 인간의 품위, 존엄, 분별력을 지녀야 비로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귀결되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만25세까지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100여년간 박해로 한반도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만여명이 된다 하니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성인의 삶이 요약된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감동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성인의 짧은 생애는 보통 사람의 몇배는 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 젊은 나이에 어쩌면 그리도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는지 우리의 왜소한 믿음이 부끄럽게 생각됩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이 있습니다.
잘 깊이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모두가 힘든 순교적 삶을 살아갑니다.
순교적 삶을 위한 세 지침을 소개합니다.
첫째, “섬겨라!”입니다.
사랑의 섬김, 겸손의 섬김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당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평생 주님을 배우며 섬기며 살아가는 평생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잘 배우고 섬기는 일은 복음적 삶의 핵심요소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잘 듣는 경청이 우선입니다.
우리의 침묵도 결국은 경청과 섬김, 겸손과 순종을 위함입니다.
오늘 역대기 하권의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이점에서 완전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주 하느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우상들을 섬겼으며,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예 무지에 귀가 멀어 듣지 못했고 마침내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 예언자를 죽입니다.
그의 마지막 두 말마디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둘째, “희망하라!”입니다.
주님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도 믿음과 더불어 희망이 그 중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선물같은 희망이 우리를 살게하는 힘입니다.
바오로 말씀처럼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습니다."(로마8,24).
희망의 하느님, 희망의 여정,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희망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샘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 구원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희망과 꿈이 실종된 시절, 주님 ‘희망의 표지’로 살아갈 때 이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셋째, “견뎌라!”입니다.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의 사람이 궁극의 승리자가 됩니다.
정말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의 침묵, 인내의 겸손, 인내의 지혜, 인내의 사랑,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
결국 인내는 모든 것이 됩니다.
이런 인내가 깨어있게 하고 매사 조심하게 합니다. 이런 인내의 믿음이 불안이나 두려움,
걱정도 사라지게 합니다.
새삼 이런 인내심과 인내력 역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인내의 선택, 인내의 훈련, 인내의 습관 역시 절실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성규72,4-5)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도 인내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참으로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인내의 믿음, 정주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순교적 삶은 결국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요약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정주의 믿음, 끊임없이 샘솟는 희망의 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섬김의 사랑이 자발적 기쁨으로 한결같이 순교적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아멘.
7/6(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새 술과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생각’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언제나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오래된 술과 낡은 부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 할 수 있다면 저도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조재형 신부)
2.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하루는 매일이 기쁨 충만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이 지상 순례 여정이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매일 주님과 혼인하고, 그 혼인을 갱신하는 우리들이니, 얼굴을 활짝 펴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삶이 요약된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감동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성인의 짧은 생애는 보통 사람의 몇배는 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 젊은 나이에 어쩌면 그리도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는지 우리의 왜소한 믿음이 부끄럽게 생각됩니다.
(이수철 신부)
7/6(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5일차 기도
복음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6일(토) 8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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