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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7일 주일[(녹) 연중 제14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7월 7일 주일[(녹) 연중 제14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시며 배척받으십니다. 그들은 편견과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올바로 받아들일 것을 다짐하며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봉헌합시다.

입당송

시편 48(47),10-11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2-5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3(122),1-2ㄱ.2ㄴㄷㄹ.3-4(◎ 2ㄷㄹ)
◎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시여, 저는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보소서,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
○ 몸종이 제 안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
○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는 죽도록 멸시만 받았나이다. 거만한 자들의 조롱을, 교만한 자들의 멸시를, 저희 영혼이 죽도록 받았나이다. ◎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12,7ㄴ-10
형제 여러분,
7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 알렐루야.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주님,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보살펴 주시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 성경의 예언자들을 기억하며, 어떠한 어려움도 기꺼이 참아 내며 진리를 증언하게 하소서.

2.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세계 지도자들에게 사랑과 지혜의 은총을 주시어,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지키고 온 세상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끊임없이 소통하며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3. 장기 기증 운동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성자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셨으니, 생명의 나눔인 장기 기증 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시고, 저희가 이 운동에 동참하여 새 삶의 희망을 많은 이와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한 해의 반을 지낸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굽어살피시어, 새해에 계획하였던 일들을 되새기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계획한 일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 바치는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에 날마다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4 <구원의 역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탄생하시어 인류를 새롭게 하시고, 수난하시어 저희 죄를 씻어 주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오르시어 천국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34(33),9 참조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또는>
마태 11,28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를 수 있도록 기쁘게 약점을 자랑하고 싶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언제나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우리가 자만하지 않으면 주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나고,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4주일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들과의 친교입니다. 한국에서는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히려 미국에 있으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각자가 사는 곳에는 교구 사제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신학교에서 자주 불렀던 성가가 떠올랐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알라스카에서 온 신부님은 비행기를 3번 갈아탔다고 합니다. 콜롬비아에서 온 신부님은 선교센터가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초대합니다. 시카고에서 온 신부님은 모금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워싱턴과 댈러스의 신부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은 담낭에 생긴 담석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학생 신부님들은 언어 배우면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지낼 만 하다고 웃습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신부님은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의 심정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뉴욕의 신문사에 있다가, 댈러스의 한인 성당에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일 막내 신부님과 저는 31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3 4일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갔습니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면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주교님과의 면담입니다. 저는 주교님과 명동 교구청에서 5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보좌 주교님에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 되셨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여전히 겸손하시고,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저와 면담하면서 잠깐 놀라셨습니다. 명동에 있을 때 저는 염색해서 머리카락이 검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저는 염색하지 않았고, 지금은 머리카락이 하얗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셨지만 은색의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덕담해 주었습니다. 제가 변한 것이 있다면 머리카락의 색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저는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제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국에 돌아가도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면담을 마친 후에 교구장님은 교구의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3년 후에 있을 세계 청년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청년대회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대회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변화 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협력 사제, 미사 도우미 사제, 공소 사목 사제, 기도 전담 사제를 임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20년 가까이 보좌 신부로 지내야 하는 신부님들이 10년 안에 본당 사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율법과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전에는 로마의 시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전에는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에는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변화된 바오로를 공동체에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희망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사랑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4주일

복음: 마르 6,1-6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켜고, 입장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 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못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경력, 업적만을 과대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에게 보내진'(에제 2,4)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배경 구실을 합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힘은 오히려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고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혹 우리도 더러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이들,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 내 자식으로부터는 존경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리고 이를 바꾸어서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왜 내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부모 형제들, 내 동료들을 존경하지 못할까요? 
너무도 잘 알아서 그럴까? 

그런데 나는 진정 그를 제대로 아는 걸까요? 
혹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이유가 고향 사람들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우리 곁에 있는 내 동료, 내 형제를 존경하지 못한 이유를 내 형제에게서 찾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라워하였다’는 이야기는 보고 알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그분의 신적 권위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놀라워하였지만, 동시에 그분이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왜일까요? 

왜 우리는 가까운 이나 함께 살고 있는 이를 존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할까요? 

 

그것은 내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요? 

곧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닌 ‘내가 아는 그’라는 선입감을 믿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의 편견이요, 고정관념이요, 고착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을 섬기고 따르고 마는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생각에 가려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와 곡해와 왜곡과 몰이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질투와 시기, 비교와 경쟁, 이해타산의 이해관계와 계산이 있고, 신뢰가 아닌 의혹이 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다’는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무지의 지)입니다. 

사실 자신이 ‘안다’는 생각, 그 우상을 벗어나야 진정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자신의 앎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앎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제거해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하느님, 주님이신 주님이요, 비록 자신이 아는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이 변형되는 일,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앎을 비워내고 자신의 앎을 넘어서는 그분을 믿고 받아들임에 달려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마르 6,6)

마치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고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 앞에 선 것처럼, 당혹해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의사는 치유의 능력이 있건만 환자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혹해하시지 않으시도록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6.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아모9,11-15 마태9,14-17

 

 

                                                            삶은 선물이자 선택

                                            “날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시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교황청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1면에, “일치와 희망,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로의 사도적 여정을 위한

교황의 일정”이란 톱기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황은 ‘일치의 사도’가, ‘희망의 사도’가 되어 2024.9.2.-13일까지 제45차 해외 사도적 여정차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아, 동티모로, 싱가폴을 방문합니다.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열정이 참으로 경이(驚異)롭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현재의 교황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말마디이자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삶은 선물이자 선택이다. 날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시는 축제인생의 선물을 선택해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참 좋은 선물이자 선택이된 교황님의 존재입니다.

제가 자주 고백하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행복 또한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그러니 행복을 선택,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바치는 선물과 같은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의 선택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그날의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하면 내일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는 끝납니다. 정의의 예언자이자 희망의 예언자인 아모스입니다.

거의 대부분 예언자가 전하는바 언젠가 그날의 희망입니다.

바로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사는 것입니다.

역시 희망의 선택, 희망의 훈련, 희망의 습관입니다.

그대로 풍요로운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다음 아모스의 희망을 우리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지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밭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바로 오늘 그날의 희망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어제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수녀원에서의 하늘나라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감히 하늘나라 체험이라 명명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꽃처럼 환히 웃으며 환대하는 수녀님이 참 반갑고 고마워 살며시 안으며

기쁨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흡사 수녀님이 요즘 수도원 뜨락에 때되어 활짝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수녀님을 뵙는 순간 백합꽃인줄 착각했네요!

백합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마침 찍어둔 백합사진과 함께 보낸 메시지에 즉시 답을 받았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에겐 그대로 하늘나라 기쁨의 체험이었고 오후 내내 행복했습니다.

동시에 아주 예전 꽃 한송이를 선물로 갖고온, 지금은 고인이 된 가난한 자매에게 드린 답시도 생각납니다.

이 답시를 받았을 때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요!

여러번 나눴지만 나눌 때 마다 늘 새롭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언젠가 그날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펼쳐가며 우리 자신이 하늘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최고의 모범입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예수님 가는 곳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걸어다니는 하늘나라같은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땅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요한의 제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단식이 판단의 잣대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사랑이 그 판단잣대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단식 많이 한다고 구원이 아니요 이런 단식 경쟁은 백해무익할 뿐입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는 옛 장상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단식의 원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17-18)

 

결코 자랑하거나 과시할 단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이 바리사이들처럼 단식 많이 함을 과시하며 당신의 제자들을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단식의 때 되면 단식할 것이지 주님과 함께 즐겁게 보내야 할 축제인생을 분별없는 단식으로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자라면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 선물을 선택해 살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기막히게 적절합니다.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마찬가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 천조각을 헌옷에 대고 꿰매는,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꼰대가 되지 말고

발상의 전환, 사고의 전환으로, 예수님처럼 늘 새포도주의 하늘나라 현실을 담아낼 ‘늘 새롭고 좋은,

깊고 넓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새 부대의 마음으로 새사람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하늘나라의 삶이겠습니다.

 

참 고맙게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새 날, 새 부대에 새 포도주의 하늘 나라의 삶을, ‘에버 오울도, 에버 니유’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걸어가리라.”(시편85,13-14). 아멘.


7/7(일)  [(녹) 연중 제14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희망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사랑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2.“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새 천조각을 헌옷에 대고 꿰매는,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꼰대가 되지 말고

발상의 전환, 사고의 전환으로, 예수님처럼 늘 새포도주의 하늘나라 현실을 담아낼 ‘늘 새롭고 좋은,

깊고 넓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새 부대의 마음으로 새사람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하늘나라의 삶이겠습니다.(이수철 신부)

 

7/7(일)  [(녹) 연중 제14주일], 제16일차 기도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7일(일)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