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27일(토) 오늘의 글/시
당 태종의 거울 / 따뜻한 하루[441]
재상 위징은 주군인 당 태종에게 무려 300번의 바른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태종이 태평성대로 이끈 이유는 '당 태종의 거울'이라고 불린 위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태종이 국경지대 토벌 차 연령을 16세로 낮추어, 건강한 남자를 징집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위징이 이를 강하게 반대했기에, 왕은 대노하여 사람을 보내 그를 훈계했습니다.
그렇지만 위징은 이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 태종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폐하의 명령은 못을 말려 고기 잡고, 숲을 태워 사냥하고, 닭 잡아 달걀을 꺼내는 것입니다.
병역은 숫자보다 질인데, 어린 사내들까지 모두 징병하면 그 원성이 하늘에 맞닿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왕에게 직언했습니다.
"윗사람의 행실이 바르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하면 명령도 지켜지지 않고 일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러하오니, 폐하께서는 인격 수양을 늘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실 것입니다."
이러니 왕은 위징이 오늘 무엇을 반대할지, 어떤 직언을 할지 항상 골머리를 앓았답니다.
하지만, 당 태종은 그나마 위징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넓은 통치자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종은 슬기롭고 어진 그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복을 바로 입을 수 있고,
옛일을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소.
또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세상 이치와 이해득실을 볼게요.
짐은 평생 이 세 가지 거울로 내 잘못을 돌아보려 하였는데,
위징이라는 거울 하나를 잃었으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소."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사가 만사’임을 드러내는 명언이 있습니다.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하면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며,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하면 나라가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도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를 가까이 한답니다(잠언 3,33).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그렇습니다.
'군명후현신직(君明后賢臣直)', 명석한 군주와 어진 황후와 바른 신하라는 뜻으로,
이는 성군의 바른 통치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세 가지 조건이 되기 때문에,
감언이설보다 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한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양의 장작과 양탕국] 지금 고양시 일대가 옛날에는 한양에서 필요한 장작을 공급하던 곳이었는데 이 고양의 장작이 커피와도 관련이 있어 말나온 김에 소개해 본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시절이라 하고, 고종황제와 순종황졔가 아주 즐기셨다고 한다.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끓여서 국물을 먹는 음식이란 모조리 탕국이라 불렀기에, 자연스레 서양에서 들어온 끓여먹는 국물이라 하여 커피를 '양탕국'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당시 양탕국은 값이 너무 비싸 서민들은 냄새도 맡아 보기 힘든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던 중 1910년을 전후하여 쁠레쟝 (Plaisant) 이라는 약삭빠른 프랑스인 장사꾼 하나가 대한제국에 들어와 황성에 머물면서 무엇으로 돈을 벌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쌀만큼이나 수요가 풍부한 장작에 눈길이 꽂혔다. 당시 한양성내에서 소비하는 장작의 대부분은 지금의 고양시 일대에서 채집되어 무악재를 거쳐 서대문과 자하문 (창의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쁠레쟝은 고양의 나무꾼들이 한양으로 가져온 장작을 그자리에서 매점매석하여 한양성내에 독점적으로 팔면 돈 좀 만지겠다는 요량으로 광통교 언저리쯤에 자리를 잡고 장작과 숯 장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한양엔 "나무 재벌" "장작왕" 으로 불리던 최순영이 장작과 숯의 유통을 거의 독점지배하여 8개 장작시장 중 7개와 세군데의 시탄장 (柴炭場; 장작과 숯을 같이 취급하는 가게) 까지 장악하고 있어 장작시장은 후발주자가 뚫고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은 철옹성이었다. 이에 쁠레쟝은 철저한 현지화를 결심하고 자기 이름을 부를 가져오는 상서로움이라는 뜻의 '부래상 (富來祥)' 이라고 바꾸고 직접 보온병에 커피를 가득 담아 서대문과 자하문으로 들어오는 나무꾼들에게 다가가 커피를 주며, "나는 고양 부씨입니다." 이라 하며 접근해서 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시는 양탕국 한사발을 거저 주며 같은 값이면 장작을 자기에게 넘기도록 했는데 나무꾼들은 매우 좋아하며 그리 하였다고 한다. 거기다 부래상은 무악재에서 서대문까지 오는데 100걸음 거리마다 "고양 부씨의 시탄장으로 오시오. 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시는 양탕국 한사발을 공짜로 줄 것이오." 라는 광고를 줄줄이 붙여놓았다. 자신을 '고양 부씨' 라 하여 한국인들이 억세게 집착하는 지연 혈연 의식을 장사에 활용한데다 커피까지 상술의 일환으로 동원한 것이다. 당시의 나무꾼들은 지금의 고양시 일대에서 장작을 채집하여 달구지나 등짐으로 운송을 해왔으니 무척 고단하였을 것이고, 카페인을 접해보지 않은 그들에게 양탕국은 새로운 맛과 함께 일종의 탕약내지 보약같은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처음 맛보는 양탕국에 나무꾼들은 녹용보다 효과가 좋다고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부래상은 태평로 바닥의 장작시장을 지배했다는 우화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후 부래상은 서울시 성북동의 울창한 숲속에 우아한 서양식 별장을 짓고 살면서 화장품을 밀조하여 프랑스산이라고 속여서 팔아 먹다가 발각되어 추방되고, 간송 전형필이 1934년 부래상으로부터 이 별장을 구입하여 박물관으로 단장하여 운영하다가, 용도를 미술관으로 바꾸니 이것이 현재의 간송미술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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