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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8월 5일 월요일[(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신부님강론 4개

[매묵]2024년 8월 5일 월요일[(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신부님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모 대성전 봉헌

입당송

시편 70(69),2.6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난야,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8,1-17
1 유다 임금 치드키야의 통치 초기 제사년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이며 아쭈르의 아들인 하난야가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3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곳에서 가져가 바빌론으로 옮겨 놓은 주님의 집 모든 기물을,
내가 이곳에 다시 돌려 놓겠다.
4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아들 여콘야와
유다의 모든 유배자를 이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정녕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겠다.’”
5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제들과,
주님의 집 안에 서 있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6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였다.
“아무렴,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주님께서 당신이 예언한 말을 실현시키시어,
주님의 집 모든 기물과 모든 유배자를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오.
7 그러나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전하는 이 말씀을 들어 보시오.
8 예로부터, 나와 당신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들에게 전쟁과 재앙과 흑사병이 닥치리라고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
10 그러자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내어 부수었다.
11 그러고 나서 하난야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길을 떠났다.
12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순 뒤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가서 하난야에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
14 참으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우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나는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29.43.79.80.95.102(◎ 68ㄴ 참조)
◎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
○ 당신 법규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 ◎
○ 당신을 경외하는 이, 당신 법을 아는 이, 모두 저에게 돌아오게 하소서. ◎
○ 당신 법령 안에서 제 마음 흠 없게 하소서. 제가 부끄럽지 않으리이다. ◎
○ 악인들이 저를 없애려 노리지만, 저는 당신 법을 마음에 새기나이다. ◎
○ 당신이 저를 가르치셨기에, 당신 법규에서 벗어나지 않았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인 제물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지혜 16,20 참조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
<또는>
요한 6,3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양식으로 새로운 힘을 주시니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마태오 14,13-21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기적의 원동력, 내 작은 나눔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고, 궁색하고, 쪼들리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젖과 꿀이 철철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더 이상 가난도 눈물도, 아쉬움, 불평불만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살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귀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너무나 넉넉합니다.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십니다. 하인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암소도 한 마리 잡습니다.

풍성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린 배를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카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잔치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가 망했다, 파장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약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 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건너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8.4.연중 제18주일                                           탈출16,2-4.12-15 에페4,17.20-24 요한6,24-35

 

더불어(Together), 탈출(Exodus)의 여정

"참 아름다운 삶"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지어야 할 새로운 ‘집’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아마 앞으로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바로 매일 강론쓰기가 그러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최소한 대칭구조를 이루는 두 사람입니다.

더불어 하는 이,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더불어, 끊임없이 탈출의 여정에 올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이들이 아름답습니다.

 

몇가지 아름다운 사례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8월4일 주일이라 기념하지 않지만 원래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1786.5.8.-1859.8.4.) 기념일입니다.

전세계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전설적인 말년을 소개합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는 감동입니다.

 

“1855년경, 아르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숫자는 한 해 동안만 해도 2만명에 달했다.

이를 하루 단위로 나누어 계산하면 매일 평균 60명이 방문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하루 최소한 16-18시간까지 고해성사를 줬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했다. 

비안네는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1859년 8월4일 새벽 2시, 요한 마리 비안네는 아르스에서 41년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향년 73세에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날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 울었다.”

 

비안네 사제의 감동적인 하느님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 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바란다.

순간순간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 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비안네 사제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신이 아파 아침미사에 거의 못나오던 수도형제가 칸톨 부재로 어려움을 겪자 초인적 믿음으로 연이어 칸톨을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고맙고 자랑스러워 부재중인 원장과 기쁨을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피델리스 수사의 책임감과 활약이 놀랍고 감사하네요! 아침미사부터 끝기도까지 칸톨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고,

저녁기도 후렴도 성공적으로 불렀고 방금 성가지도 역시 잘 끝냈습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힘들어도 칸톨하기 위해 참는다고 합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워 기쁜소식 알립니다.”

“놀랍습니다. 신앙에서 나오는 저력같습니다.”-

 

요즘 프록스꽃이 한창입니다. “청춘의 기쁨, 열정”이란 꽃말도 멋집니다. 이 꽃을 받은 분이 보낸내 메시지입니다.

“아멘! 꽃말이 주는 설레임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주시는 청춘의 기쁨, 열정으로 사는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그러했고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러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한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렇게 사는 분들이 진정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우면 원망없는 세상이 된다.”<다산>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춘풍;春風)처럼 부드럽고 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가을서리(추상;秋霜)처럼 엄격하게 하라.”<채근담>

 

엊저녁과 아침성무일도 후렴의 뒷맛이 지금까지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이런 기도내용을 믿고 실천하는 이들이 영적으로 참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우리 삶의 여정은 ‘더불어, 탈출의 여정’입니다. 평생 이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 주인공 모세요, 제2독서 주인공 바오로요,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이고 그 뒤를 따를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의 인도하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이들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니 하느님 들으라 하는 불평들입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그대로 욕망에 노예된 우리의 보편적 모습니다.

영육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영적 삶을 살기는 이처럼 힘듭니다.

자비로운 주님은 이들에게 저녁 어스름에는 메추라기 고기를 내려 주고, 아침에는 만나 양식을 배불리 먹여주시니 우리가 부끄러워집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가 주고 받는 말이 마치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이라도 된 듯 부끄러워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저절로 이들과는 반대로 살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되니, 이들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불평불만 대신 찬미감사로 응답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중에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으로 주님과 함께 힘차게 희망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모세가 그러했고 예수님이 그렇게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둘째, ‘생명의 빵’ 예수님을 찾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시고자 이 거룩한 생명의 잔치이자 주님의 희생 제사인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일은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온힘과 온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하느님의 일은 없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모세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이름이 ‘나다(I AM)’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고백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나는 문이다”(I AM the Gate)

“나는 착한목자이다”(I AM the Good Shepherd)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길이다”(I AM the Way)

“나는 포도나무다”(I AM the Vine)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고스란히 닮은 예수님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우리를 언제나 구원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과 하나되어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첩경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을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주님을 찾는 성소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지 않고 엉뚱한 세상적인 것에서 찾기에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른 영혼들입니다.

세상에 주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런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셋째, 새인간을 추구하는 삶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평생목표요 과제가 새인간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닮아갈 때 새인간으로 변모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이요 새인간의 정체를 밝혀주며 우리를 고무 격려합니다.

주님을 그대로 닮은 새인간의 모범인 바오로의 육성을 듣는 듯, 단숨에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가르침을 받은대로 살아가십시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인간을 입으십시오.”

 

죽는 날까지 계속될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평생과제입니다.

이 기쁨, 이 맛, 이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을 통한, 기도를 통한, 교회를 통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무상 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시고 날로 당신을 닮은 새인간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8/5(월) [(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조재형 신부)

 

2.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을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주님을 찾는 성소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지 않고 엉뚱한 세상적인 것에서 찾기에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른 영혼들입니다.

세상에 주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런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이수철 신부)

 

8/5(월) [(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제45일차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8월5일(월) 7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