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8월 3일 토요일[(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본기도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6,11-16.24
그 무렵 11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귀로 들으신 것처럼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12 이에 예레미야가 모든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13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14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15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6 그러자 대신들과 온 백성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24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제게 응답하소서.
○ 진창에 빠지지 않게 저를 구출하소서. 원수들에게서, 깊은 물속에서 저를 구출하소서. 급물살이 저를 덮치지 못하고, 깊은 물이 저를 휩쓸지 못하며, 심연이 저를 삼켜도 그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소서. ◎
○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
○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거룩한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힘으로
저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
마침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또는>
마태 5,7-8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으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자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이 선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억울(抑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시기와 질투로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강한 사람에게 아무 말 못 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은 주로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성서에서도 억울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인에게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아벨은 억울할 겁니다.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나봇도 억울할 겁니다. 왕에게 충성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우리야도 억울할 겁니다. 우리 시대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던 박종철 열사도 억울할 겁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던 사람도 억울할 겁니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수사자료를 경찰에 넘겼지만, 항명죄로 1년이 넘게 재판을 받아야 하는 수사단장도 억울할 겁니다. 살로메의 춤판에 희생되어서 죽어야 했던 세례자 요한도 억울할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알아주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던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억울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부자는 평생 떵떵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의 집 문간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공정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아하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4,1-12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권자였습니다.
두 지방을 합해봐야 경기도 정도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주, 분봉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아첨하며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둘의 관계는 참으로 묘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두렵게 여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 세례자 요한이 곤경에 처할 때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건네는 날카로운 직언에 힘겨워했지만,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치도 않았던 기가 막힌 일-세례자 요한의 참수-을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모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잔머리를 너무 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은 꼼수와 권모술수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동쪽에 위치한 나바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하자 힘이 딸렸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와 협상을 체결합니다.
작은 강아지가 큰 개를 만나면 배를 발랑 뒤집어 항복을 표시하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레타4세 왕 앞에 깨갱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왕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헤로데 필립보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합니다.
갖은 감언이설로 꼬셨겠지요.
허영심이 가득했던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륜을 저버리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레타 4세 왕의 딸은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헤로데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난 딸 살로메를 데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품에 안깁니다.
당대 비리와 악행을 자행하던 고위층 지도자들의 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공연하게 천륜을 거스르는 두 사람의 악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듭된 고발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끄럼 없이 패륜의 길을 걷던 헤로디아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위협도 해봤습니다.
설득도 해봤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전도차 애논을 떠나 갈릴래아로 건너온 세례자 요한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 에브론 건너편에 위치한 마케론데 성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서기 28년경 참수 당함으로서 짧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고민 끝에 찾아냈다는 나라의 중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한숨만 터져 나옵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어린 양들을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웃이 쓰러지든 말든 내 앞길만 헤쳐 나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1-12
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8.2.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26,1-9 마태13,54-58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삶
“모두가 지나간다!”
새벽마다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매미 찬미노래입니다.
안도현의 시, '매미'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날마다 평생 줄기차게 찬미노래 바치는 수도자들은 이런 여름 매미를 닮았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내일이면 토요일, 머리 삭발하는 날입니다. 2주마다 깎는데 2주가 순간입니다.
아주 오래전 36년전 수도원 초창기 두분 스님을 모시고 선禪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저는 보름마다 머리 깎는 재미로 살아 갑니다.”
바로 저의 심정이 그러합니다.
저 역시 2주마다 머리깎는 재미로 삽니다.
마치 ‘2주’ 단위로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루 ‘하루’ 단위로 삽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공동체 형제들의 내외적 움직임도 다 다르고 눈부십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사는 수도자들도 모이면 어디나 분잡한 세속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게시판에 ‘8월 제 삶의 모토’를 써서 붙여 놨습니다.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당나라 임제 선사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은 이들로 말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깨어 살아야 할, 주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 꽃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감동적인 형제의 일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의 60대 중반의 가장처럼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분들중의 한분입니다.
자신의 노부모와 처가댁 노부모를 돌봐야 했으며 자식들도 챙겨야 했고 대학교수 은퇴후에도
아들과 함께 카페 개장을 앞두고 있는 형제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려 20여년 이상을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했고
기적적 은총으로 교수생활중에도 막중한 책임을 다했던 분으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데
만난지 16년쯤 됩니다.
공학박사로 대학교수 은퇴후, 작은 아들의 자립적 삶을 위해, 또 아버지 노릇 못다한 미안함에
빵굽는 학원에 다니며 빵굽기를 배웠고, 마침내 아들과 함께 개장될 가게에서 아들은 커피를 만드는 사장,
아버지는 빵굽는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합니다.
매사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겸손하고 진실한 형제님의 삶에 감동합니다.
어제 개장을 앞두고 봉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빵을 가져 왔는데, 미사를 봉헌할 때 부부의 모습은
흡사 청년들처럼 신선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청춘을, 전성기를 살게 되었다며, 이제 공학박사에서 생활박사가 되었다며 격찬했습니다.
‘데이르’(DAYRE), ‘오늘은 왕’이라는 가게 이름도 멋졌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린 왕다운 삶은 얼마나 멋진지요!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마가렛꽃은 ‘진실한 사랑’이요, 상사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합니다.
꽃이 지면 잎이 나기에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함을 이렇게 꽃말에 담은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어느 경우든 다 지납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곁같은 삶을 위해 기도, 노동, 공부가 조화된 삶에 운동 역시 필수입니다.
걷기 운동이 좋고 이에 탁구도 권합니다.
어제 파리 올림픽에서 탁구 여자 단식 신유빈 4강 진출에 앞서 경기를 잠시 봤고
얼마전 읽은 ‘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한경록)라는 칼럼이 생각났습니다.
필자는 탁구의 잇점을 “1.몰입할 수 있다, 2.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
3.많이 때림으로 스트레스 풀기에 제일이다,
4.최고의 다이어트 운동이다, 5.날씨에 제약없이 언제든지 쾌적하게 즐길수 있다.”로 꼽았습니다.
조화롭고 균형잡힌 영성생활에도 좋은 도움이 되고 심신을 동시에 연마할 수 있는
‘감각의 대화’인 탁구는 얼마나 유익하고 멋진 운동인지요.
바로 ‘모두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살아 간’,
또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의 대가, 삶의 달인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두분이 흡사 대칭을 이루듯 서로 닮았습니다.
늘 독서와 복음이 대칭을 이루는 구성입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도 대칭 구조입니다.
얼마전 읽은 ‘대칭의 물리학’을 나눕니다.
“자연계의 형태를 지배하는 궁극의 규칙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칭’인 것이 많다. 동식물의 형태와 패션, 건축 디자인등이다.
대칭은 사람에게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실은 수학이나 물리학등 다양한 자연 과학 분야에도
대칭성은 얼굴을 내민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우주의 형태를 결정하는 기본 규칙이 바로 대칭성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대칭을 통해서 더욱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두분 다 고립무원의 외롭고 고독한 처지였고 주변의 질시를 받고 배척을 받았던 참된 예언자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숙명입니다.
두분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지나가는 일들에 흔들림이 없었고
참으로 초연했고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레미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가차없이 몰아댑니다.
더불어 오늘날 언론이 예레미야처럼 과연 참된 예언자 역할에 충실한지 살펴보게 됩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달콤한 예언을 했다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무지에 눈 먼 온 백성이 일치하여 주님의 집에 있는 참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몰려드니
유다가 망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무지에 눈멀기로 하면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막상막하입니다.
선입견에 질투에 눈먼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선입견, 질투에서 자유로울 지혜로운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대로 우리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부정적 보편적 정서를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한, 깨달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초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지만, 지혜로우신 주님은 좌절하기 보다는
겸손히 공부와 배움의 기회로, 도약의 기회로 삼으셨을 것이며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주위 상황에 집착함이 없이 현실에 충실하며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8/3(토)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아하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양승국 신부)
3.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전삼용 신부)
4. 당나라 임제 선사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은 이들로 말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깨어 살아야 할, 주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 꽃자리’라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8/3(토)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43일차 기도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악에 굴하지 않고 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 2024년 8월3일(토) 6시1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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