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20일(목) 오늘의 글/시
바보처럼 살다 간 어른♧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바보’라고 부르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자존심 상하고 불쾌한 느낌이 들 것 입니다. 그런데 평생 바보라는 말을 듣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바보같은 삶이 오히려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사였지만 집 한 채 없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한 삶을 사셨던 분이 계십니다. 다음은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테니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 했다가 퇴원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 할 때 이를 눈치채고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 대학 교수 겸 부속 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먼저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값보다도 적은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 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가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 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 내기를 싫어 했고,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평생을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혼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 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가며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이는듯 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그저 캄캄한 어두움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박사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들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향년 85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칠흑같은 밤과 같은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사셨습니다.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하고 칭찬합니다. 그렇게 바보처럼 사는 위인이 많기를 바랍니다... 제2의, 제3의 장기려 박사님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한민국은 지구촌에서 귀감이 되는 멋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요즈음 전공의 사태를 보며 느끼는 의사와 정부에 대한 안타까운 맘입니다. |
(굿)🎩 판사와 두 도둑 이야기👻 옛날에 두 도둑이 재판을 받으러 판관앞에 끌려왔다. 한 도둑은 소를 훔친 소도둑이고, 다른 도둑은 닭을 훔친 닭도둑이었다. 소 한 마리 값은 천 량이고, 닭 한 마리는 한 량이었다. 간단한 도둑질 사건이라 판관은 쉽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평소 판관과 가깝게 지내던 소도둑은 자신을 잘 봐달라고 판관에게 8번에 걸쳐 8,000량을 손에 쥐어주는 바람에... 재판이 있는 날 고민을 하던 판관은 먼저 닭도둑에게 물었다. 피고는 어떻게 닭을 훔쳤나? 닭도둑은 "대문이 열려있어 한 마리 잡아 나왔습니다" 했다. 그러자 판관은 "닭이 크게 소리 낼텐데 어찌 잡았나?" 닭도둑은 "닭이 소리를 내기에 모가지를 꽉 잡고 숨을 못 쉬게 해서 잡았습죠" 판관은 소도둑에게 물었다. "피고는 어떻게 소를 잡았는가?" 소도둑은 "저는 그냥 밧줄 있어서 그냥 밧줄만 잡고 나왔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까 소가 따라 왔더라고요." 드디어 판관은 판결을 내렸다. "소도둑은 밧줄만 잡은 거고 소는 제 발로 왔으니 무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닭도둑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 잡았으므로 도둑질 3년, 동물학대죄 3년 총 6년 징역을 선고 한다" 구경하던 방청객들은 멍해졌다. 맞는 건지 틀리는건지..? 요즘 세태다... 요즘 판사다. 혹시 그 판사도 가산점 받아 고시 패스했나? ⛩️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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