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25일 화요일[(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2,1-11
1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4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5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6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7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8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9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10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께 네 길을 맡겨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 주님을 믿으며 좋은 일 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주시리라. ◎
○ 주님이 흠 없는 이들의 삶을 아시니, 그들의 소유는 길이길이 남으리라. 환난의 때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기근이 닥쳐와도 굶주리지 않으리라. ◎
○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주님은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 버리지 않으신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받지만, 악인의 자손은 멸망하리라. ◎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구하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화요일
16년 전에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며, 아이의 할머니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와 찍었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이도, 저도 해 맑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가장 좋은 추천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년이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16년 전의 사진을 보며, 배우 ‘손지창’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배우 ‘더스틴 호프만’ 닮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의 얼굴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저의 표정이 웃는 모습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 때문에 유명해진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저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원본을 보았습니다. 표정으로 유명해진 그림도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입니다. 뭉크의 절규는 얼굴이라기보다는 표정에 가깝습니다. 거울 보고 활짝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얼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표정을 통해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얼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갈망을 뜻합니다. 시편 27장 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으니, 주님, 당신 얼굴을 찾나이다."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대면하며 대화했고, 그 만남 후 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얼굴은 더 평화롭고 기쁨에 차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얼굴과 표정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신앙인의 얼굴이 어두우면 다른 이들이 하느님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고,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슬픔을 겪으며 병고를 아는 이였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굶주린 이의 얼굴, 병든 이의 얼굴, 외로운 이의 얼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는 늘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정과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불친절한 얼굴이 아니라, 희망과 자비가 담긴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남겨 주셨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빵을 떼실 때야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분과 깊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을 증언하는 도구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빛나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이웃을 향해 따뜻한 얼굴과 사랑의 표정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9,30-3
영웅적인 순교의 비결!
돈보스코는 꿈의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큼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꿈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그는 100년도 훨씬 전에 자신의 제자들인 살레시안들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돈보스코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약간 맛이 간 사람’ ‘지나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20%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살레시오회는 160여 개국에 진출해서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지속해나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두 명의 살레시오 회원이 금으로 된 큰 성 잔을 들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안에는 피가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황하가 흐르는 중국이었습니다.
돈보스코가 꾸었던 그 꿈은 50여년 뒤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 당시 중국에서 활발히
사목활동 중이던 베르실리아 주교, 카라바리오 신부, 두 살레시안이 공소 사목 방문 중에
악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으며, 시성되셨습니다.
베르실리아 성인 같은 경우 수도회의 꽃인 수련자들을 교육시키는 수련장 신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제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큰 스승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그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슬슬 뒤로 물러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인 루아 신부님께서 당시 베르실리아 신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그의 출중한 자질과 성덕을 파악하고 뭔가 부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 부탁이 뭔가 했더니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마카오에, 홍콩에, 중국 본토에 수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선교단을 좀 이끌고 가주셨으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교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중국이라...거의 지구 반대쪽 나라인데...경제, 정치, 종교, 교육 등등 모든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던데...
가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된다던데...사랑스러운 수련자들은 어떡하고...사랑하는 내 가족들은 또 어떡하지...
그러나 베르실리아 신부는 즉시 생각을 바꿉니다.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즉시 접습니다.
환하고 기쁜 얼굴로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루아 총장님, 그럼 제가 언제 떠나면 될까요?”
중국에 도착한 베르실리아, 카라바리오 두 분의 선교사는 홍콩,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 깊숙이 들어가
영웅적인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교리교사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려다가
안타깝게도 화적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십니다.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현실을 기꺼이 견뎌낸 배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신앙, 그것이 순교의 비결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종이 된다는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와 그 길을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 길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가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곧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나아가,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 실현을 내려놓은 이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곧 어린이 같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서,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나 다 같이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나 다 같이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4.연중 제7주간 월요일 집회1,1-10 마르9.14-29
기도와 믿음의 여정
“지혜로운 삶”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공은 지어낸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길로 드러나는 것이다.”<다산>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요행이나 비약, 도약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기도와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저절로 내공입니다.
“넓게 배우되 함부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 지식과 덕을 갈무리해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예기>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내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전 장면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기 전 예수님의 산상에서의
변모신비체험이 있었습니다.
외딴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처럼 바로 산상에서의 신비스러운 변모체험이
예수님께는 내적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내공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의 여정에 축적되는 내공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도움을 청합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일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세대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믿음의 내공입니다.
한결같은 기도와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가는 내공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자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주고받은 대화가 좋은 묵상감입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흡사 자비송 기도처럼 들립니다만 이 또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믿을 때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음의 한계를 느낄 때 마다 지체없이 겸손히 고백하며 바칠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통쾌한 악령 축출의 응답에서 주님의 내공이 빛을 발합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마라.”
곧이어 죽은 것처럼 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는 일어납니다.
그대로 부활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사랑처럼 기도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기도요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의 수행 역시 필수 선택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한결같은 기도가 제일입니다.
평생 배워 익혀야 할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내공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말씀의 전개와 배치가 고맙습니다.
제1독서 창세기는 일단 끝나고 오늘부터 사순시기 전까지 집회서가 이어집니다.
오늘 집회서는 시작으로 ‘지혜의 신비’에 대해 환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면 알수록 은총의 선물처럼 선사되는 사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옛 사막의 수도자들이 스승을 찾은 것은 살아 있는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자는 저절로 지혜를 추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성장하는 사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도와 믿음의 삶은 지혜로운 삶에 직결됨을 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며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2/25(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슬픔을 겪으며 병고를 아는 이였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굶주린 이의 얼굴, 병든 이의 얼굴, 외로운 이의 얼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현실을 기꺼이 견뎌낸 배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신앙, 그것이 순교의 비결이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나 다 같이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나 다 같이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마라.”
곧이어 죽은 것처럼 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는 일어납니다.
그대로 부활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이수철 신부)
2/25(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오늘의 기도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나 다 같이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나 다 같이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5일(화) 5시-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5년 2월 24일 월요일[(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2.24 |
---|---|
[매묵]2025년 2월 23일 주일[(녹) 연중 제7주일]/신부님 강론 4개 (3) | 2025.02.23 |
[매묵]2025년 2월 22일 토요일[(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2.22 |
[매묵]2025년 2월 21일 금요일[(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2.21 |
[매묵]2025년 2월 20일 목요일[(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