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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5월 7일 수요일[(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5월 7일 수요일[(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71(70),8.23
저의 입은 당신 찬양으로 가득 찼나이다. 온종일 당신 영광을 찬미하나이다. 당신께 노래할 때, 제 입술에 기쁨이 넘치리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주님의 이 가족들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믿음의 은총을 주셨으니
저희가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원한 유산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6(65),1-3ㄱㄴ.4-5.6-7ㄱ(◎ 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
○ 바다를 바꾸어 마른땅 만드시니, 사람들은 맨발로 건너갔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기뻐하네. 그분은 영원히 권능으로 다스리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6,40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리라.
◎ 알렐루야.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부활하시어 우리를 비추셨네. 당신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며칠 전, 참 감동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한 자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어릴 적에 성당에 다니면서 수녀님들의 모습에 감동받았고,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정을 먼저 돌봐야 했고, 결국 좋은 분을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셔서, 미국에 오셔서 30년 넘게 목사님의 아내로 살아오셨습니다. 참 묘하지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있었지만,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삶을 다시 돌아보던 그 자매님은 작년에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제가 성당에 다닌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늘 성당에 있었습니다. 고백성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자매님은 30년 만에 고백성사를 보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성당에 나가며,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자매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자매님의 걸음 하나하나를 지켜보셨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는 단지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돌아감은 단지 죽음 이후의 귀향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여정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플라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플라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이데아 세계의 기억을 품고 태어난다.” 이데아란 무엇입니까? 완전한 세계, 영원한 참된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동하고, 진리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내면의 기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을 불어넣으셨던, 하느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비슷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주님, 당신 안에 쉬기 전까지는 제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30년 동안 마음 한편에 성당 종소리를 품고 살아오신 그 자매님, 하느님을 향한 그 내면의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매님은 하느님 안에서 쉼을 얻고 싶어서 다시 고백성사를 보았고, 이제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고자 하십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입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낸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무려 10년이 걸렸습니다. 바다에서 표류하고, 괴물도 만나고, 유혹도 많았지만, 결국 그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유혹도 있고, 실패도 있고, 길을 잃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본향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귀향의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주님을 만납니다. 그는 눈이 멀었고, 나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길을 잃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오로는 회개했고, 사도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싸워야 할 좋은 싸움을 싸우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디세우스처럼,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고 제가 만났던 자매님처럼, 돌고 돌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 여정에는 눈물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외로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떠나야 할 그날,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회개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 자매님이 고백하신 대로, “남은 날 봉사하고 나누며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 내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하느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지난날을 헤아리시되,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돌아온 자매님처럼, 우리도 그 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오늘, 이 순간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 안에서 시작되는 곳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요한 6,35-40

 

우리 모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하시겠답니다!

 

바야흐로 예초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죽기 살기로 예초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잡풀이 허리만큼 자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잡초에 칡넝쿨까지 왕성해 소나무며 백일홍 나무가 아사 직전입니다.

 

미안한 마음에 일단 며칠간에 걸쳐 정신없이 예초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미안하다고 말하며, 신경 써서 칡넝쿨도 제거해주고 과감하게 전지도 해주고 있습니다.

 

시들시들 죽어가던 나무들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화사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습니다.

고되고 험한 바깥 일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나무며 화초며 생명체들의 회복 탄력성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시들시들 죽어가다가도 조금만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시 살아나 얼굴을 쳐듭니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에게 생명의 손길을 건네면서,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하셨겠지,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많은 경우 숨쉬고 살아있지만 죽어있었던 때가 많았습니다.

얼마나 힘겨웠던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오늘 예수님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겹고 고달파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 너무나 감사하고 복됩니다.

우리 모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하시겠답니다. 아무리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요한 6,35-40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이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곧 당신 생명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에 대한 신비, 곧 ‘말씀의 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아모 8,11)

 

곧 당신 말씀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곧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곧 구원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5.6.부활 제3주간 화요일                                                          

사도7,51-8,1ㄱ 요한6,30-35

 

“나는 생명의 빵이다”

예닮의 여정

 

프랑스의 대신학자 '앙리 드 뤼박'(S.J,1801-1890)은 그리스도교 신앙 진리의 역설적 특징을

신학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설의 신비는 비이성적이라기 보는 초이성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자체가 역설이며 인간자체가 역설이고 교회자체가 역설입니다.

아니 우리 삶자체가 역설로 가득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내가 된다는 것 역시

기막힌 역설의 진리입니다. 

 

엊그제 25년전 ‘성요셉’ 시화詩畫를 많은 지인들과 나눈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때쯤이면 여전히 수도원 주차장앞 성요셉상 주변에는 연산홍이 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성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답글이 재미있습니다. “아, 성 요셉상이군요. 너무 인자해보여서 성모님인줄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또 하나 답글과 나눈 제 의견도 나눕니다.

 

“처음에는 성모상인줄 알고 갈때마다 마니피캇을 불러 드렸는데 성요셉상이라고 하셔서 한참 웃었습니다.”

“부부가 닮다보니 요셉과 마리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를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저희는 생각지도 못한 묵상을 이렇게 복되게 표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사랑합니다.”

 

날로 사랑이 깊어가는 부부들 얼굴을 보노라면 서로 닮았다는 사실에 감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역설중의 역설이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 형제들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나가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꼭 닮은 예수님의 참얼굴이듯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각각 고유의 내얼굴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이 명쾌히 밝힙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에 대한 복음의 군중을 대변한 다음의 청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간청이 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그대로 예수님께 생명의 물을 청하던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청을 닮았습니다.

사실 이런 우리의 간청에 응답해 주님은 날마다 미사때 마다 일용할 양식인 생명의 빵,

성체를 우리들에게 나눠주십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장엄한 절정의 말씀이 예수님의 신원을 명쾌히 밝혀 줍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탈출기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이 “나다(I AM)”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닮은 신적존재인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생명의 빵인 주님의 성체를 온마음, 온사랑, 온믿음으로 모심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늘 단 하나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 하나되는 길뿐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모범이 오늘 사도행전의 성 스테파노입니다.

무엇보다 순교중 감동적인 임종어가 그대로 주님을 닮았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계속되는 무지에 눈먼 인간의 불행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처럼 스테파노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순교의 죽음을 당합니다.

참 오묘한 섭리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미래 주님의 일꾼 사도 바오로가 될 사울을 예비했다는 사실입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테르툴리아노 교부의 진리가 입증되는 장면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고유의 참나가 되어가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생명의 빵, 예수님을 모시는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은 그대로 형제의 참얼굴이자 예수님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영국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의 기도를 나눕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퍼뜨리도록 도와주소서.

제 영혼에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하소서.

제 존재 전체를 온전히 관통하여 소유하시어

제 삶 전체가 당신의 빛으로 가득 차게 해 주소서.

저를 통해 빛나시고 제 안에 거하셔서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안에 당신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들이 저를 보고

저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보게 해 주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5/7(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 내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하느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지난날을 헤아리시되,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돌아온 자매님처럼, 우리도 그 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오늘, 이 순간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 안에서 시작되는 곳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조재형 신부)

 

2.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겹고 고달파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 너무나 감사하고 복됩니다.

우리 모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하시겠답니다. 아무리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영국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의 기도를 나눕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퍼뜨리도록 도와주소서.

제 영혼에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하소서.

제 존재 전체를 온전히 관통하여 소유하시어

제 삶 전체가 당신의 빛으로 가득 차게 해 주소서.

저를 통해 빛나시고 제 안에 거하셔서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안에 당신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들이 저를 보고

저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보게 해 주소서.” 아멘.(이수철 신부)

 

5/7(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5월7일(수) 7시1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