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융건릉 수령 110년 향나무 1
화성 융건릉 수령 110년 향나무 2
화성 융건릉 입구
화성 융건릉 안내문
화성 융건릉 안내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비 '조선왕릉'
화성 융건릉 개비자나무(천연기념물) 1
화성 융건릉 개비자나무(천연기념물) 2
화성 융건릉 개비자나무(천연기념물) 안내문
화성 융건릉 가는길 1
화성 융건릉 가는길 2
화성 융건릉 가는길 3
화성 융건릉 가는길 4
화성 융건릉 자생수목 현황사진
화성 융릉 가는길
화성 융릉 앞 다리
화성 융릉 앞 다리
화성 융릉 곤신지
화성 융릉 곤신지 안내문
화성 융릉 전경 1
화성 융릉 전경 2
화성 융릉 전경 3
화성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화성 융릉 상설도
화성 융릉 신도 어도 정자각 전경
화성 융릉 수라간
화성 융릉 정자각 1
화성 융릉 정자각 2
화성 융릉 정자각 3
화성 융릉 정자각 4
화성 융릉 정자각 5
화성 융릉 정자각 6
화성 융릉 정자각 7
화성 융릉 정자각 8
화성 융릉 홍살문과 수라간 전경
화성 융릉 제수진설도
화성 융릉 비각
화성 융릉 비석
화성 융릉 비문 해설내용
화성 융릉(사도세자와 경의왕후) 전경 1
화성 융릉(사도세자와 경희왕후) 전경 2
화성 융릉 전경 3
화성 건릉 상설도
화성 건릉 홍살문
화성 건릉 판위
화성 건릉 신도 어도
화성 건릉 정자각과 능전경
화성 건릉 비각
화성 건릉 비석
화성 건릉 비문 해설내용
화성 건릉 수라간 정면
화성 건릉 수라간 측면
화성 건릉 주변 소나무
화성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 1
화성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 2
화성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 3
융릉
추존왕 장조(莊祖) 장헌세자와 헌경의황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지정번호 : 사적 제206호
조성시기 : 1789년(정조 13)
능의구성
융릉은 훗날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훗날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능의역사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무덤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혜경궁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겼다.
건릉
22대 정조(正祖)와 효의왕후의 합장릉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지정번호 : 사적 제206호
조성시기 : 건1800년(순조 1)
능의구성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하다. 기단부가 향로와 같은 형태로 8면에 둥근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팔면에 새긴 장명등도 융릉과 같다. 또한 등신대에 가까운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원 아래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동쪽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6.25 당시 무너졌던 것을 199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각 안에는 1900년(광무 4) 고종이 어필로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자각 서쪽에 주춧돌만 있던자리에 2002년 수라간을 복원하여 세웠다. 그리고 정자각 남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융릉과 마찬가지로 참도 좌우에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놓은 것이 다른 왕릉에 비하여 특이하다.
능의역사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길지를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냈으며,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효의왕후의 능호는 정릉이라고 하였다가 위와 같이 건릉으로 합장하게 됨에 따라 능호를 따로 쓰지 않게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융릉관리소 / hwaseong.cha.go.kr]
'고궁·산성·조선왕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열매와 선정릉(2008.10.26) (1) | 2012.01.21 |
---|---|
조선왕릉전시관과 태릉(2010.2.7) (0) | 2012.01.19 |
경복궁(2006.10.28) (0) | 2012.01.17 |
경복궁 수문장교대의식(2006.10.28) (0) | 2012.01.17 |
수원 화성문화제(2008년) (0) | 2012.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