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전시관 1
조선왕릉전시관 2
조선왕릉전시관 3(2009.12.24 개관)
조선왕릉전시관 안내도
조선왕릉전시관 내부 1
조선왕릉전시관 내부 2
조선왕릉전시관 정조국장행렬 모형
조선왕릉전시관 태릉 모형
조선왕릉전시관 왕릉 내부 모형
조선왕릉전시관 전시물
조선왕릉전시관 전시물 어보
조선왕릉전시관 내부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동판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동판
태릉 정문
태릉 강릉(비공개) 안내도
태릉 강릉 입구 전경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념비
태릉 순환로 1
태릉 순환로 2
태릉 순환로 3
태릉 순환로 4
태릉(문정왕후) 홍살문
태릉 문정왕후 안내문
태릉(문정왕후) 정자각과 비각
태릉(문정왕후) 정자각 1
태릉(문정왕후) 정자각 2
태릉(문정왕후) 정자각 3
태릉(문정왕후) 봉분과 정자각 1
태릉(문정왕후) 봉분과 정자각 2
태릉(문정왕후) 수복방
태릉(문정왕후) 비각
태릉(문정왕후) 비석
태릉(문정왕후) 비각 비문 해설
태릉(문정왕후) 봉분 1
태릉(문정왕후) 봉분 2
태릉(문정왕후) 봉분 3
태릉(문정왕후) 봉분 4- 문인석 마석 양석
태릉(문정왕후) 봉분 5-문인석 무인석 마석 등
태릉(문정왕후) 봉분 6-무인과 마석
조선왕릉전시관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가 영면하고 있는 조선왕릉은 역사성과 우수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9년 12월 개관한 조선왕릉전시관은 우리가 잘 몰랐던 왕의 국장절차와 조선왕릉의 역사, 왕릉의 조성과정 및 관리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시관을 관람한 후에는 사적 제201호인 문정왕후 태릉을 둘러보실 수 있고, 서울 근교에 위치한 나머지 38기의 왕릉을 탐방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꾸려져 있다.
태릉만 관람이 가능하고 강릉(13대 임금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은 공개제한지역임.
태릉
11대 임금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능
위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
지정번호 : 사적 제201호
조성시기 : 1565년(명종 20) 7월 15일
능의구성
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頭)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이 예외를 이룬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을 통틀어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는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 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능의역사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월 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월 4일 태릉으로 고쳤다. 7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
생몰년도 : 1501년 ~ 1565년
생애이야기
문정왕후는 1501년(연산군 7)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인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자,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대윤(大尹) 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 가운데 1544년(중종 39)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는 걸로 당쟁이 일단락되는 듯 싶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정권은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로 넘어왔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 일파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그 후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일화 1547년(명종 2)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게 되었다. 여기서 여왕은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를 일컬은 것이다. 이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는 을사사화에 이은 큰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이와 같이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형제들인 윤원형, 윤원로는 집권 초기 자신의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다. 문정왕후 집권 시의 정치가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는 당시의 대 유학자 조식이 그에게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 잘 드러나 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러한 직설적인 상소에도 조식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당대 문정왕후에 대한 위험한 언급이 금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
[출처 : 문화재청 태릉관리소 / taegang.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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