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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산성·조선왕릉

남한산성 <지수당~ 동문~ 북문~ 서문>

 

남한산성 안내도

 

남한산성 지수당 연못

 

남한산성 지수당(池水堂)

종목        : 문화재자료 제14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83. 09. 19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변 산성리 124-1

소유자     : 국가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조선(朝鮮) 현종(顯宗) 13년(1672)에 부윤(府尹) 이세화(李世華)가 세운 건물로서 이 건물의 앞뒤로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으며 당시

고관(高官)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지금은 연못 하나가 매몰되고 두 개의 연못만이 옛 모습을 남기고 있다. 연못 가운데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빈터만 남아 있다.
  지수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형태이며 바닥면적은 43.11㎡(13.04평)으로 홑처와 팔작지붕이다. 가구구조는 굴도리가 사용된 1고주 5량가로서 측면쪽은 층량이 대량 위에 걸쳐져 외기중도리를 받고 있다. 종보 위에는 중앙에 파련대공을 얹어 치장하였으나 주심도리부분의 공포는 아무런 공포재가 없이 보머리만 돌출된 모습니다.
  내부 천장은 연목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며 외기반자쪽만 좁은 폭의 우물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측면 지붕의 합각벽은 전벽돌로 막아져 있으며 지붕기와 긑은 와구토바르기로 마감되어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채색되어 있다.

 

남한산성 단풍소경

 

남한산성 지수당 근처 은행나무

 

남한산성 지수당과 은행나무

 

남한산성 동문앞 소경

 

남한산성 동문(左翼門)

남한산성의 성문은 모두 4개이다. 동문은 산성의 남동쪽에 있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매우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의 위치와 형태가 선조(宣祖) 때에 이미 보수하였다고 하는 그 동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조(仁祖) 2년1624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正祖) 3년1779 성곽보수시에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 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이 문을 좌익문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4대문 중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하나뿐이다.

 

남한산성 성벽 복원구간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성벽 제2옹성(甕城)

옹성(甕城)은 성문(城門)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二重) 성벽을 말한다.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했으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三面)에서 입체적(立體的)으로 공격(攻擊)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施設物)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용도(甬道)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地誌) 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불렀음을 볼 때, 옹성은 성문뿐만 아니라 체성 벽의 보호(保護)를 위하여 돌출시켜 쌓은 시설을 포괄적(包括的)으로 지칭(指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 남장대지 안내석

 

남한산성 성벽 제2옹성 암문(暗門)

암문(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일반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월대(月臺)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 내에 필요한 병기(兵器), 식량 등 항쟁물자(抗爭物資)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包圍)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을 요청하거나 원병(援兵)을 받고 역습(逆襲)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암문은 평지성보다는 산성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산성의 경우 지형적으로 암문설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성벽 제2옹성(甕城)

옹성(甕城)은 성문(城門)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二重) 성벽을 말한다.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했으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三面)에서 입체적(立體的)으로 공격(攻擊)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施設物)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용도(甬道)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地誌) 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불렀음을 볼 때, 옹성은 성문뿐만 아니라 체성 벽의 보호(保護)를 위하여 돌출시켜 쌓은 시설을 포괄적(包括的)으로 지칭(指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 출처 :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관광사업단 / www.ggnhss.or.kr]

 

남한산성 성벽 제2남옹성(南甕城) 안내석

 

남한산성 성벽 제2옹성(甕城) 암문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성벽 제1옹성(甕城) 암문

 

남한산성 성벽 제1옹성(甕城) 암문

 

남한산성내 자투리밭 소경

 

남한산성 연무관 1

 

남한산성 연무관 2 

 

남한산성 연무관 안내판

 

남한산성 연무관(演武館) 3

종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 · 관아 / 관아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72. 05. 04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0-1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성할 때 건립한 것으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武術)을 연마하던 곳이며 이곳에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한양(漢陽)으로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초에는 연무당(演武堂)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肅宗)때에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로 하여금 개수(改修)하게 하고 연병관(練兵館)이라 쓴 편액(扁額)을 내리었다. 정조(正祖) 때에는 이를 수어영(守禦營)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練兵館) 또는 연무관(練武館)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고 높이가 높은 육중한 건물로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정면쪽은 2단의 기단을 축조한 이중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중기단의 중앙에 화강석 계단을 1개소 놓았다. 건물의 기단은 인근에서 채석한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장척의 화강석으로 큼직큼직하게 다듬어 설치되어 있다.
  주초석은 정면과 양측면 주초석을 높이가 높은 장주초석으로 하였는데 팔각으로 모를 접은 형식으로 모양을 내었으며 후면쪽 열만 자연석 주초석이 사용되었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이 있는 굵직한 원기둥이 사용되었다. 건물내부의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면쪽은 창호를 내지 않고 완전히 트여있어 개방된 모습이고 후면쪽 툇간열도 바깥쪽을 벽체로 막지 않고 마루도 깔지 않아 회랑형식으로 트여져 있다.
  가구고조는 모두 굴도리가 사용된 2고주 7량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공포는 주심도리 부분에 초익공을 둔 조선후기 익공계 양식이다.
  연무관 건물의 평면형태와 가구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들이 발견된다. 정면이 5칸인데 반하여 후면은 6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면 어칸에 기둥을 1본씩 더 세운 것이다. 따라서 이 기둥열의 건물내부 마루칸 쪽은 대량이 없이 고주주두에 단재의 보머리만 양쪽으로 돌출시켜 놓은 형상이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비교적 길게 내밀어져 있으며 처마앙곡과 안허리곡이 비교적 세다. 용마루의 양단과 합각마루의 끝부분에는 각각 1개씩의 용두를 놓았으나 추녀마루 끝에는 망와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에는 양성바르기를 하였고 건물 네 귀의 사래 끝부분에는 토수(土首)를 끼워 치장하였다.
  건물 측면의 합각벽은 박공과 풍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굵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노출되는 연등천장이고 외기반자쪽만 판재를 대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중앙칸 대량에는 전/후면에 용문을 측면쪽 대량의 한쪽 면에는 봉문이 그려져 있다.

남한산성 동문 1

 

남한산성 동문 2

 

남한산성 동문 안내문

 

남한산성 동문 3

 

남한산성 동문 4

 

남한산성 동문 5

 

남한산성 지수당 연못 1

 

남한산성 지수당 연못 2

 

남한산성내 종점 버스정류장

 

남한산성내 한옥집

 

남한산성내 은행나무집식당과 은행나무

 

남한산성내 식당가

 

남한산성내 남한산초등학교

남한산초등학교 역사

1912. 01. 25 : 광주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인가

1912. 05. 01 : 개교

1918. 04. 01 : 남한산공립보통하교로 학교명 변경

1938. 04. 01 : 남한산심상소락교로 학교명 변경

1941. 04. 01 : 남한산국민학교로 학교명 변경

1951. 01. 25 : 한국젅ㅇ중 폭격으로 교사(校舍)가 모두 불에 탐

1951. 06. 24 : 어린이 66명으로 다시 개교

1986. 03. 10 : 병설유치원 개교

1986. 05. 27 : 현 본관 건물 신축준공

1996. 03. 01 :  남한산초등학교로 학교명 변경

1999. 06. 14 : 국난극복 체험학습관 준공

2000. 03. 01 : 전교생 27명 3개학급(복식학급) 편성

                      원부족으로 병설유치원 휴원

                      제20대 정연탁 교장선생님 부임

2000. 12. 11 : 성남지역을 중심으로 집단전입 시작(1차 27명)

2001. 02. 16 : 제89회 졸업식(졸업생 8명, 총 졸업생 2,383명)

2001. 03. 01 : 전교생 94명으로 6개학급 편성

                      원생 15명으로 병설유치원 다시 개원

2001. 09. 03 : 별관건물(3개 교실) 신축준공

2001. 12. 04 : 전국초중고 대상 아름다운 학교 공모전 전국대상 수상

2006. 03. 01 : 입학식, 6학급 편성 (전교생 133명)

2011. 03. 02 : 현재 6학급 156명(병설유치원 22명) 편성

[출처 : 광주남한산초등학교 / www.namhansan.es.kr]

남한산성내 도로반사경

 

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 북문 망루 천정 내부 1

 

남한산성 북문 망루 천정 내부 2

 

남한산성 북문 망루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 全勝門)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7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을 져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여갔다고 한다.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 문이 있었다는 선조대의 기록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칭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으로 설치하였고,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문루는 단층(單層)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八作)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에 치미(?尾)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장식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椽燈天障)이며 기둥은 주심포(柱心包)양식의 민흘림기둥이다.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내 소나무군락 산책길 1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내 소나무군락 산책길 2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서문쪽 성벽 암문

 

남한산성 서문과 성벽

 

남한산성 서문쪽 야경포인트지점 가는 길

 

남한산성 서문 1

 

남한산성 서문(좌익문 : 左翼門) 2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初築)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7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통과하여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은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開口部)는 내외면이 반원형(半圓形)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板門)의 문짝에는 방형 철엽(鐵葉)을 서로 겹치도록 부착(附着)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도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 측벽에는 장군목(將軍木)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대문 안쪽의 천장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나 부분적(部分的)으로 표면(表面)이 박락(剝落)되어 전돌이 일부 노출(露出)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루의 처마는 겹처마를 두르고 누대의 용마루는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으며, 누의 천장은 연등천장에 일부에 우물천장을 병용하고 있다. 기둥양식은 주심포에 2출목(二出目) 익공식(翼工式) 이다.

남한산성내 소경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 至和門)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花崗石)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柱礎石)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내 순교자 현양비

관방의 요지며, 보장처로서 주목되어 산성이 축조되고, 행정치소가 산성 안에 마련되고, 나아가 광주유수가 임명된 남한산성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순교성지로 바뀌게 된 이유는 광주부윤이 토포사를 겸하면서 이곳이 바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 광주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지암을 비롯해 교회가 창설되면서 신앙 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되었던 곳이다. 교회의 선구자 이벽(李檗)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은 마재에 공동체를 조성하였는데 이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되었다.
  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李家煥)이다. 이가환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숙부로서, 그 자신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5년)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서 널리 사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배를 통해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 후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에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가 체포되어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잊을 수 없는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集)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金聖熙), 김차의(金次熙), 김경희(金敬熙), 김윤희(金允熙), 최지현(崔址鉉), 심칠여(沁七汝)와 서문 밖의 홍희만(洪喜萬), 홍학주(洪鶴周), 이천 단대의 정은(鄭?)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다.
[출처 : 천주교 수원교구 남한산성 성지 / www.nhss.or.kr]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분당 1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성남공항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검단산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분당 2

 

남한산성 성벽 암문

 

벌봉 안내 명판~ 남한산성 성벽 암문 밖에서 바위를 보면 흡사 벌과 같다 하여 벌봉이라 함

 

남한산성 성벽 '봉암성' 안내문

봉암성(蜂巖城)은 원성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을 말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벌봉 정상부에서는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벽이 넓게 조망된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군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적(敵)이 성 내부(內部)의 허실(虛實)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공격의 직접적인 사정거리(射程距離)안에 들게 되었다. 병자호란 후 이러한 약점(弱點)을 보강(補强)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 부윤(府尹)윤지선이 4월 1일에 축성을 시작하여 40여일 만인 5월 9일에 끝마쳤다. 실측 결과 성의 길이는 2,120m이며, 암문이 4개, 포대가 2군데이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新城)’이라고도 하였고, 본성에 대하여는 ‘외성(外城)’이 되며, 또 동쪽의 성이므로 ‘동성(東城)’이라고도 하였다.
  봉암은 해발 514m로 동장대에서 동북쪽으로 526m 거리에 있으며, 봉암의 북쪽 158m 지점에는 해발 504m인 법화봉(法華峰)이 자리 잡고 있다. 동장대에서 연결된 산 능선은 이 두 봉우리를 연결하며 곡선을 이루고 그 안쪽인 서쪽 사면에는 비교적 넓은 완경사 평탄면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완경사면도 해발 470m 지점부터는 아래쪽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마치 남한산성과도 같이 고위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봉암성에는 모두 4개의 암문이 구축(構築)되어 있다. 그 중 출입구에 해당하는 12암문만이 홍예문(虹霓門)이고 나머지는 모두 평거식(平拒式)인데, 특히 13암문은 북동쪽 방향으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主要交通路)로 이용되었고, 15암문은 한봉성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입구여서 왕래(往來)가 빈번(頻繁)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 내에는 여러 동의 건물터가 보이는데 이곳에 군포(軍鋪)가 15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정상부의 평탄한 곳에는 대부분(大部分) 군막(軍幕)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5암문 안쪽에는 동서 11m, 남북 7.7m, 높이 1.5m 정도의 방형(方形) 축대(築臺)가 있고, 내부에서 많은 양의 전돌(塼乭)과 와편(瓦片)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군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외 동장대터로 추정되는 벌봉 남쪽 175m 지점의 평탄지에는 높이 2m 내외의 고대(高臺)가 구축되어 있으나 초석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남한지』에 의하면, 숙종 31년(1705) 봉암성에 양(兩) 포루를 구축하는데 이 때 구축한 포루가 현재 봉암성의 남동쪽에 있는 2개의 포루다.

 

남한산성 성벽 암문

 

남한산성 동장대지 안내 명판

 

남한산성 성벽 동문에서 북문 사이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송암정 안내 명판~ 황진이와 기생의 투신자살 전설과 관련된 고사한 소나무

 

남한산성 성벽 산책길 1

 

남한산성 성벽 산책길 2

 

남한산성 동문

 

사진 : 니콜라이

글    : 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