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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산성·조선왕릉

남한산성 <침괘정~ 행궁~ 영월정~ 청량당~ 수어장대>

 

남한산성 안내도

남한산성(南漢山城)

종목        : 사적 제57호

분류        : 유적건보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면적 : 528459.47㎡

지정일     : 1963. 01. 21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 1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은 경기도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200여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자연생태환경과 더불어 산성 내 구석구석이 역사와 설화가 살아있는 탐방로를 구성하고 있다. 2009년부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남한산성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추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 및 연구조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수도권의 매력적인 명소이자 세계 속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남한산성의 내일을 기대해본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에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축성하고 주장성 또는 일장성이라 불리었다.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에 이 터에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계속 증수하여 조선말 순조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 내에는 유사시 임금이 이어할 수 있는 행궁을 비롯해 종묘, 사직, 관아, 객사, 종각 등이 설치되었다.

 

남한산성 침괘정 안내도~ 이 건물은 집무실로 쓰였고, 무기고나 무기제작소는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침괘정 1

 

남한산성 침괘정 2

 

종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72. 05.04

소재지     : 걍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91-1

사대        :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확실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朝鮮) 영조(英祖) 27년(1751) 광주유수(光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하고 침괘정(枕戈亭)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 부근은 옛부터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였다는 설이 전하고 있고, 또 이 건물 우편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어 명(明)나라 사신 부총병(副摠兵) 정룡(程龍)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이 부근에는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며 높이가 높다.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형식이다. 남측의 2칸열에 우물마루를 간 마루방을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건물 3면에 걸쳐 난간 없는 툇마루를 두르고 그 안쪽에 온돌방이 구획지어 길다랗게 축조된 평면형태이다. 양측면과 전면 퇴각열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온돌방을 비롯한 그 나머지 부분의 천장은 격자형의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있다.
네모지게 대충 다듬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각기둥이 세워졌으며 굴도리를 사용한 전형적인 2고주 7량가의 가구구조를 갖추고 있다. 공포는 주심도리 부분에 출목도리 없이 주심부분에만 이익공을 짜올린 것으로서 주간 사이에 화반과 주심부분에는 첨차를 사용한 조선후기의 익공계 양식이다.
온돌방과 마루방의 외부쪽 각 면에는 궁판이 이는 2짝의 세살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고 온돌방 내부의 칸막이 부분에는 유사시 접어서 들어 올릴 수 있는 4짝의 세 살 분합문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온돌방은 모두 전면쪽 툇마루 밑을 파고 내려간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어 고멕이 벽쪽에서 불을 때게 되어 있고 후면쪽 화계시설 첫 단 부분에 전벽돌로 축조된 높은 굴뚝이 있다. 
 비교적 길게 내밀어진 처마는 처마의 안허리곡이 앙곡에 비해 급하게 휘어져 있으며 지붕의 기와 끝은 와당으로 처리되어 있고 양측면 합각벽은 풍판으로 처리하고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깨끗이 채색되어 있다.

 

남한산성 행궁터 안내석

 

남한 행궁 복원, 정비 사업~ 상궐, 좌전, 하궐, 공원 조성

 

남한산성 행궁 전경

 

남한산성 행궁 후경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

종목        : 사적 제480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면적 : 19,256㎡

지정일     : 2007. 06. 08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935-6번지 외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가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인 남한산성행궁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자 한다.

 

남한산성 행궁 좌전 정전과 영녕전 1

 

남한산성 행궁 좌전 정전 안내판~ 원칙적으로는 건국시조와 왕의 선친으로 부터 고조까지 4대를 합친 5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나...

남한산성 행궁 좌전 영녕전 안내판~ 왕의 5대이상의 조상을 모신곳

 

남한산성 행궁 좌전 정전과 영녕전 2

 

남한산성 행궁 재적당 안내판~ 당(堂)은 전(殿)보다 한등급 낮은 건물, 좌전이 건립되기전 왕의 수신(修身)공간, 제사(祭祀)공간으로 사용 

 

남한산성 행궁 재적당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안내판~ 임금의 침전, 벽장등이 없고 단청을 함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1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2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3

 

남한산성 행궁 남행각 안내판~ 내행전 남쪽에 위치, 왕의 수행원이 기거한 공간

 

남한산성 행궁 남행각

 

남한산성 행궁 북행각

 

남한산성 행궁 좌승당 안내판~ 상궐 내행전 북쪽에 설치한 광주유수 의 집무용 건물

 

남한산성 행궁 좌승당

 

남한산성 행궁 1

 

남한산성 행궁 2

 

남한산성 행궁 3

 

남한산성 행궁 4

 

남한산성 행궁 5

 

남한산성 행궁 6

 

남한산성 행궁 7

 

남한산성 영월정 1

 

남한산성 영월정 2 

영월정은 문자 그대로 달 밝은 날 밤에 앉아보면 영월정의 운치를 느낄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행궁터로부터 소나무 숲길을 따라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목 200m 지점이고 숭열전으로 가는 길목 약 100m 전에 있다. 원곡 김기승 선생의 현판 글씨가 새롭다.
이와 같은 누대와 정자 말고도 남한산성 안에는 축성 이후 많은 누정이 세워졌다고 한다. 행궁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완대정(행궁 하궐), 우희정(완대정 아 래), 이위정(좌승당 오른쪽), 이명정(이위정 왼쪽) 등을 들 수 있다.

 

남한산성 노송지대 등산로

 

남한산성 취성암

취성암은 술에 취한 사람이 이 곳에 앉아 있으면 술이 깬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실로 이 바위에 앉으면 가슴 속까지 스며드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산성리 산 18번지에 설치된 표석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수 있다.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청량당 안내판~ 횡령누명을 쓰고 죽은 이회와 자살한 부인, 소실을 기리기 위한 사당

 

남한산성 청량당 1

 

남한산성 청량당 2

 

남한산성 청량당 3

청량당(淸凉堂)

종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72. 05. 04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2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가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이회(李晦)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祠堂)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本堂)의 전면에는 이회(李晦)의 초상화(肖像畵)가 있고 좌,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李晦) 처첩(妻妾)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후 새로 만든 것이다.
  청량당은 정면3칸, 측면 2칸이다. 주칸(柱間)은 정면 양협칸과 측면 두칸은 같이 잡았고, 정면어칸만은 반자정도 넓게 잡았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이고 기단바닥은 흙바닥이다. 정면초석은 화강석 방형초석이지만 상면을 평활하게 다듬었을 뿐이고 측면은 배면의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각주이고 내부는 전칸(全間)이 우물마루이다.
  민도리집이지만 건물내부에 주두와 소로를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정,배면 평주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사분변작한 위치에 동자주 없이 주두만을 놓고 종량을 걸었다. 종량 위에는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었다. 도리는 모두 굴도리이다. 측면 중앙기둥 위에서는 대들보 위로 층량을 걸었다.
  처마는 사면 모두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합각벽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다.
  창호(窓戶)는 정면어칸에만 출입문을 설치하고 양협칸에는 창문을 설치하였다. 출입문은 궁판달린 네짝 띠살문이며, 창은 이중창인데 외부는 띠살창이고 내부는 아자창이다. 내부 배면과 측면의 각 칸에는 벽감을 설치하고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벽감외부에는 두짝 띠살문을 달았으며 띠살문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였다. 우측면의 정면쪽 협칸만은 벽감없이 벽면에 초상화를 걸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어장대

 

종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72. 05. 04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가

관리자     : (재)경기문화재단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四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청량산 정산(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楊州), 양평(楊平), 용인(龍仁), 고양(高陽) 및 서울, 인천(仁川)까지도 조망(眺望)할 수 있다. 당초에는 단층누각(單層樓閣)으로 축조하고 서장대(西將臺)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를 맡았던 수어청(守禦廳)(전(前), 좌(左), 우(右), 중(中), 후(後)의 5관(官)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右營將)이 진(陳)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인조(仁祖)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淸太宗)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英祖) 27년(1751)에는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왕명(王命)으로 서장대(西將臺)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扁額)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겪은 시련과 인조(仁祖)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현 봉천(奉天))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淸國)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효종(孝宗)의 능소(陵所)인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恥辱史)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헌종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개건하였는데 중층(重層)의 누각건물(樓閣建物)로써 그 형태와 구성이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물 중 특이한 예에 속한다. 지붕과 내부를 모두 이층으로 꾸몄으며 하층의 내진고주(內疹高柱)가 상층에서는 변주(邊柱)가 되는 평면구성방식을 택하였다.
  기단(基壇)은 장대석 외벌대이며 기단바닥과 건물내부의 외진(外陣)에는 전돌을 깔았다. 내진부분은 외진보다 한단 높게 하여 장마루를 구성하였으며, 이층바닥도 역시 장마루로 되어 있다. 초석(礎石)은, 1층 변주들은 팔모뿔의 머리를 자른 형태의 장초석이고 내진고주들은 원형평면의 석재 상부를 호(弧)를 그리며 가공하여 상부에 기둥이 앉힐 자리를 평탄하게 다듬었다. 기둥은 모두 원주이며 민흘림으로 되어 있다. 주칸(柱間)은 정면어칸이 10척(尺), 협칸은 8척(尺), 툇간은 6척(尺)으로 잡았고 측면은 가운데 두칸은 9척(尺)으로, 툇칸은 6척(尺)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일층은 초익공으로 이층은 이익공으로 되어 있다. 쇠서는 모두 수서이다. 이층에는 화반과 운공으로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 고주(高柱)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동자주 세운 후 종량을 걸었다. 종량위에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걸었다. 측면 중앙고주에서는 대들보 위로 휘어 오른 층량을 걸었고, 일층변주에서는 내진고주 몸에 퇴량을 걸었다.
  처마는 상,하층 모두 사면을 겹처마로 꾸몄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합각벽은 전벽돌 쌓기로 되어 있다. 용마루와 합각마루 그리고 하층 추녀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설치하였고 상,하층의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지붕 마루는 모두 양성바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천장(天障)은 하층내진 부분은 상층마루 하부가 천장이 되고 외진은 연등천장이다. 상층에서는 외기에 대량사이에만 우물반자를 구성하고 나머지 부분은 연등천장이다. 창호(窓戶)는 상층에만 구성되어 있는데 칸마다 두짝 판문을 달았다. 상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하층 내진 북동쪽 칸에 목재로 설치되어 있다. 단청(丹靑)은 모로단청이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매바위

 

남한산성 수어장대 무망루

 

남한산성 수어장대 무망루

 

남한산성 수어장대 무망루 안내문

 

남한산성 수어장대 측면 1

 

남한산성 수어장대 측면 2

 

이승만 대통령 행차 기념 식수 비석

 

이승만 대통령 행차 기념 식수

 

대한제국 말기 탁지부 측량소 삼각점 표석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어장대 출입문 1

 

남한산성 수어장대 출입문 2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어장대 올라가는 등산로

 

남한산성 수어장대

 

[글 출처 : (재)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 www.ggnhss.or.kr]

 

사진 : 니콜라이

글    : 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