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을 살아가는 힘
왜 우리는 혼돈을 꺼리는가. 그것은 무질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질서란 우리가 일정한 공간 안에서 어디에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격렬한 현기증과도 닮은 것으로 무엇에 의지해 행동하고 무엇을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 판단이 어려운 상태를 가리킨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의심하는 정체성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현대의 일본이 혼돈 속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명한 것으로 여겨왔던 질서와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미증유의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는 이런 동요를 일거에 가속화시켜 우리에게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계불량 속에 있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지금 우리는 마치 기존의 틀과 질서가 너덜거리며 무너져 내리면서 상상조차 못한 생의 심연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아닐까. 수만명의 목숨이 일거에 사라져간 미증유의 재해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망연자실한 채 “왜, 어째서…?”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다.
공황상태나 전쟁이라면 그곳에는 인간사회를 움직이도록 만드는 동인이 있어, 그 동인의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갈등과 대립의 드라마가 전개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미쳐 날뛰는 자연현상 앞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체의 의미 부여가 정지되고, 단지 자연의 맹위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경제의 만성적인 침체와 사회제도가 가져온 피로, 정체성의 흔들림 속에서 마치 숨통을 끊듯이 자연의 맹위가 습격하면서 우리는 혼돈 속에 내던져진 것 같은 현기증에 괴로워하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힘>을 쓴 것은 이러한 혼돈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그 힌트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 힌트를 준 이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유명한 실존분석 정신의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이다.
“고뇌하는 인간은 인간의 위계에서 볼 때 지성이 있는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 프랑클의 이 말은 과장해서 말하면 나에게 ‘하늘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는 말한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은 인생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생의 목적은 오히려 삶이 그때그때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라고.
살아 있으면서 행복을 바라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사람들은 유쾌함을 바라고 불쾌한 것을 꺼리고, 행복은 추구하지만 불행은 피하려 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는 인생의 정석이다. 이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욕망의 대상은 선이고, 혐오의 대상은 악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전후 일본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만족을 모른 채 탐욕스럽게 성장을 갈구하고, 편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해왔다. 첨단 과학기술 개발을 위해 격전을 벌여왔다. 이런 행위 모두가 공리주의적인 행복의 추구에 바쳐져 온 것이다.
죽음(死)을 지워버리고, 생을 구가하고, 오직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 낙관적인 현세 이익주의야말로 우리의 시대가 의지할 곳이었던, 그런 체제였다. 우리는 이 체제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닥친 일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온 것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를 이어주는 행복의 이야기. 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적당한 질서와 쾌적함 속에서 남들만큼의 행복감에 잠길 수 있었다. 비록 우리 바깥에 많은 부조리와 불행한 인생이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거대한 재해에 의한 죽음과 비극은 더 이상 일부의 사람에게만 강요되는 불운일 수 없게 됐다. 보통사람들도 행복보다 불행을, 유쾌함보다 고통을, 밝음보다 어두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낙관적인 공리주의적 다행증(多幸症·유포리아)에 휩싸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를 내가 쓰는 말로 하면 고뇌하는 것이 인생의 정석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이제야 살아가는 것은 고뇌하는 것이고, 역으로 말하면 고뇌하는 힘이 살아가는 힘임을 실감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혼돈 속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행복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라는 낙관적인 공리주의와 결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각오를 다지고 인생이 우리 하나하나에 던져준 물음에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의미임을 자각하면, 우리는 혼돈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분수령으로, 우리는 전후 시대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출처: 2011.9.20 경향신문]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수만명의 목숨이 일거에 사라져간 미증유의 재해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망연자실한 채 “왜, 어째서…?”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다...미쳐 날뛰는 자연현상 앞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체의 의미 부여가 정지되고, 단지 자연의 맹위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실존분석 정신의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는 "인생의 목적은 삶이 그때그때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라고." 했다...ㅜㅜ...^-^
** 우우...일본의 자연재해...일본 국민들이 혼돈 속을 잘 살아가길 바란다...ㅜㅜ...^-^
- 2012년 2월18일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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