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해전 숭리의 공신, 한효순(韓孝純)
***** 한효순(韓孝純, 1453~1621)의 본관은 청주, 자는 면숙(勉淑), 호는 월탄(月灘)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순식간에 왜군들이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해왔다. 한효순이 경상좌감사가 된 후로는 항상 자주색 도포를 입고 나각(螺角)을 울리며 감사의 위엄을 성대하게 베풀어서, 각 고을에 주둔한 왜적이 성에 올라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효순은 태연히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겠구나" 하였으며, 이 때문에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함창당교(咸昌唐橋))에 있던 왜적이 좌 ∙ 우도(左右道)의 요해지를 점령하고 그 세력이 심히 성하였기 때문에 효순은 안동에 나가 주둔하고 병사 박진(朴晉), 우후(虞侯) 권응수(權應銖), 밀양부사 이수일(李守一) 및 의병장 정대임(鄭大任) 등은 모두 안동과 예천 등지에 모이는 한편 효순이 이수일을 대장으로 삼아 만호(萬戶) 민정홍(閔廷鴻) 등을 거느리고 용궁(龍宮)을 지키게 하였다. 또 안동부사 우복룡(禹伏龍)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아 예천에 진을 치고 정예군사 2천 명을 뽑아 응수(應銖)에게 주어 기회를 틈타 밤에 습격하게 하고, 스스로 십여 고을을 군사와 말을 거느리고 의성(義城), 안덕(安德) 등지에 주둔하여 인동(仁同)에 있는 왜적을 엿보았다. 병신년에 김륵(金玏)을 대신하여 부찰사(副察使)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12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장계에 의하여, 효순이 명을 받아 해군의 일을 전적으로 관할하고, 삼도 수군(三道水軍)의 격군(格軍 : 뱃사공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과 군량을 주야로 조발(調發)해서 보내는 동시에 병선과 기계를 급히 수선하게 하여 이순신이 적을 방어하는 일을 도왔다.4)
한효순은 《신기비결(神器秘訣)》을 저술하였는데, 대포에서 조총(鳥銃) ∙ 천자총(天子銃) 등에 이르는 각종 화기의 제작과 사용하는 데 필요한 연장 및 화약 ∙ 약선(藥線) ∙ 탄환 등과 화기 취급상 주의할 점 등이 수록되었다. 또한 화기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았어도 병법을 모른다면 전쟁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였다.
한효순의 묘소는 서현동에 있다.
[출처 : 성남 옛 이야기 : 성남문화원(한춘섭 ∙ 윤종준 편저)]
韓孝純 墓(한효순 묘) 및 神道碑(신도비)
소재지 : 분당구 서현동 산63-1
시 대 : 조선시대
종 류 : 墓 (묘)
내 용
한효순(1543∼1621)은 문신. 본관은 淸州(청주) . 자는 勉叔). 호는 月灘(월탄0 . 尙敬(상경) 의 자. 1568년(선조 1)에 生員(생원) 이 되고 1576년 式年文科(식년문과) 에 丙科(병과) 로 급제하여 검열 수찬을 거쳐 1584년 寧海府使(영해부사) 가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영해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후 경상좌도관찰사에 특진하여 순찰사를 겸임하였으며, 1594년(선조 27) 병조참판, 1596년 慶尙·全羅·忠淸道體察副使(경상·전라·충청도체찰부사) 를 지냈다. 1597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1604년(선조 37) 이조판서에 오르고, 다음해 평안도관찰사, 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1606년에 우찬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이조판서에 재임되어 李爾瞻(이이첨) 과 함께 인사권을 장악하여 반대파를 모두 추방하였다.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廢母論(폐모론) 을 발의하여 이에 반대하는 李恒福·奇自獻(이항복·기자헌) 을 탄핵하여 유배케 하였다. 1618년 폐모를 실현시켜 西宮(서궁) 에 幽閉(유폐) 케 했으나 1613년 인조반정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편서로는 『神器秘訣(신기비결)』·『陳說(진설)』이 있다.
묘역은 서현동 청주한씨 선영의 나지막한 구릉에 北向하여 있다. 원형의 봉분은 높이 150㎝, 둘레 14.8m이며, 봉분 하단에 높이 62㎝, 너비 92㎝의 원형호석 16매를 두르고 있다. 또한 봉분 주위에는 2단의 토축활개를 두르고 있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묘표·상석·6각 향로석과 상석 좌우에 8각 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계체석은 근래에 마련하였다. 봉분 중앙의 墓表(묘표) 는 바좌와 월두형태의 비신으로, 비좌는 4면에 안상문과 상부에 전후 5엽, 좌우 1엽의 단판복련문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은 백색대리석제이며 비문은 행서로 前後 2面(전후 2면)에 있다. 前面(전면)에 종3열의 大字(대자)로 ‘淸州後人月灘韓公孝純之墓 贈貞敬夫人順興安氏貞敬夫人晉州姜氏?(청주후인월탄한공효순지묘 증정경부인순흥안씨정경부인진주강씨부) ’의 비문이 있다. 後面(후면) 에 公(공)의 약력을 기록하고 있는 묘비문은 공이 生前(생전)에 自述(자술) 한 것이며, 건립연기는 崇禎癸亥(숭정계해) (1683, 숙종 9)이다.
이렇듯 자신의 묘비문을 생전에 남기는 예는 흔치 않은데, 성남 지역의 경우는 수정구 금토동의 南公轍墓碣(남공철묘갈) 에서 확인되며, 이외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眉未 許穆墓碣(미미 허목묘갈) 등에서 소수 확인된다. 크기는 비좌 높이 28㎝·너비 96㎝·두께 62㎝, 비신 높이 136㎝·너비 上(상)57.5㎝·下(하)54㎝·두께 20㎝이다. 상석은 높이 26㎝·너비 155㎝·두께 92㎝이다. 향로석은 높이 46㎝·너비 33㎝이다. 망주석은 좌우 높이 196㎝ 가량으로 굵고 우람하며, 특이하게 양각된 석수조각의 몸통부에 직경 4㎝의 원형 홈이 있다. 문인석은 금관조복형으로 좌우높이 186㎝ 가량이며, 얼굴부분 62㎝인 3등신의 신체비율이다.
神道碑(신도비) 는 묘역 하단에 北向하여 비좌와 오석의 비신 및 8작지붕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비문은 4면에 있는데, 상부의 篆書(전서)는 ‘朝鮮國議政府左議政○西興府院君謚莊獻韓公紳道碑銘(조선국의정부좌의정○서흥부원군익장헌한공신도비명) ’이며, 비제는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傳四道體察使舟師大將兼鹽鐵糧餉摠管使西興府院君謚莊獻韓公紳道碑銘 幷序(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녹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 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전사도체찰사주사대장겸염철양향총관사서흥부원군익장헌한공신도비명 병서) ’이다. 비문은 嘉善大夫前行奎章閣祗侯官 李炳觀(가선대부전행규장각지후관 이병관) 이 찬하고, 正憲大夫前議政府贊政兼掌禮院兼奎章閣提學 朴箕陽(정헌대부전의정부찬정겸장예원겸규장각제학 박기양) (1858∼1932)이 서하고, 資憲大夫前行宮內府特進官 尹祖榮(자헌대부전행궁내부특진관 윤조영) 이 전하였다. 건립연기는 甲子 月 日(갑자 월 일) 이다.
크기는 비좌 높이 32㎝·너비 120㎝·두께 86㎝, 비신 높이 194㎝·너비 76㎝·두께 38㎝, 옥개석 높이 76㎝·너비 124㎝·두께 84㎝이며 總高(총고)302㎝이다.
참고문헌 :京畿道(경기도), 『京畿人物誌(경기인물지)』下(하), 1991.
한양대학교박물관, 『분당지구 문화유적 종합학술조사보고서』(총서 제14집), 1991.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8집), 2000.
[출처 : 성남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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