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이경류(李慶流)
*****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조선 땅 천지를 노략질하면서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왜군들이 수내동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내동 마을 한구석에는 상주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돌아가신 이경류(1564~1592) 선생의 무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생각하며 말을 타고 이 무덤을 지날 때면 꼭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군들은 이런 예의도 모르고 그냥 선생의 무덤 앞을 지나치려 하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말의 발이 땅에 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채찍질하고 말을 끌어 봐도 말발굽은 땅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이에 화가 난 왜군들은 마침내 자신이 타고 온 말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 죽게 하였다.
그런데 전쟁 중에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어도 말이 없으면 그 군대는 망한 것이나 디름없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말을 모두 죽였으니 일본 군사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군 일본군은 패망하고 임진왜란은 누리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 사람들이 이처럼 전쟁에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이러한 사건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중앙공원 안에는 이경류 선생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선생의 죽음을 알린 애마의 무덤이 있다.
이경류 선생의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반금(伴琴), 자는 장원(長源)이다. 이색(李穡)의 9대손이며, 종묘서령(宗廟署令)을 지낸 이지숙(李之菽)의 손자, 평난공신(平難功臣) 의간공(懿簡公) 이증(李增)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이경류(李慶流)
상주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상주판관 권길(權吉)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되었다. 1727년(영조 3) 충신정려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재(李縡)가, 행장(行狀)은 이집(李集)이 지었다.
애초에 이경류 선생은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전해야 하는 직무를 맡은 것이 아니었기에 장수들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지 않아도 누가 비반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왜군과 맨주먹으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출처 : 성남 옛 이야기 : 성남문화원(한춘섭 ∙ 윤종준 편저)]
이경류 묘갈 비각
이경류 묘갈 비각
이경류 묘갈 정면
이경류 묘갈 측면
이경류 묘표와 문인석
이경류 묘표와 문인석
이경류 묘 측면
이경류 묘 정면
충신 이경류 말무덤 표지석
충신 이경류 말무덤
이경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 변기(邊璣)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하였다가 상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경류의 죽음을 모르던 고향집에서는 평소 이경류가 아끼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입에 물고 돌아가 이경류가 전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경류의 말은 상주에서 오백 리 길을 달려 주인의 소식을 전한 뒤에도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고 말았는데, 그 후손들이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의리가 있다 하여 잘 거두어 매장했다고 전한다.
정부인 안동권씨 묘표
정부인 안동권씨 묘 정면
정부인 안동권씨 묘 측면
정부인 안동권씨 묘
이정용 신도비와 이경류 정려비
李慶流 墓(이경류 묘) 및 墓碣(묘갈)
소재지 : 분당구 수내동 산1-2
시 대 : 조선시대
종 류 : 墓 (묘)
내 용
이경류(1564∼1592)는 문신. 본관은 韓山(한산) . 자는 長源(장원) . 호는 伴琴(반금) . 李穡(이색) 의 11대손. 판서 李增(이증) 의 자. 司直(사직) 이몽원의 외손. 첨지중부추사 趙律(조율) 의 서. 1591년(선조 24)에 진사가 되었고, 그해 식년문과에 乙科(을과) 로 급제하였다. 부친의 관직에 따라 6품에 승진하여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시 병조좌랑으로 助防將 邊璣(조방장 변기) 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상주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상주판관 權吉(권길) 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함께 전사한 尹暹(윤섬) , 박지 등과 함께 三從事(삼종사) 라 추앙되었다. 조정에서는 忠臣之門(충신지문) 이란 정려를 내렸고, 홍문관부제학으로 추증하였다. 1792년(정조 16) 손자인 정기의 벼슬로 인해 도승지, 직제학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陣地(진지) 에 다다라서는 관복과 이불을 한 아전에게 붙여 보내고 家人(부인)에게는 書札(서찰) 을 주어 이르기를 ‘사태가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나의 목숨은 하늘에 매어 있다. 다만 양친을 편안하게 받들고 아이들을 잘 보호하기만을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묘소는 관복과 이불로써 조성되어 있다.
묘역은 南西向(남서향) 하여 원형의 단독분 형태로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150㎝, 너비 440㎝이다. 묘역은 봉분 중앙에 묘표·혼유석·상석·4각 향로석 등의 석물과 상석 좌우로 8각 망주석, 금관조복형의 문인석을 갖추고 있다. 특히 문인석은 五梁冠(오량관) 의 冠帽(관모) 를 착용하고 관복은 蔽膝(폐슬) 과 後膝(후슬) 에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두 손으로 마주잡은 笏(홀) 은 무척 작으며 의습선의 표현이 뚜렷하다.
墓表(묘표)는 비좌와 비신 월두형이다. 비좌는 4면에 안상문과 상부에 전후 5엽, 좌우 1엽의 단판복련문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의 비문은 前面(전면)에만 있으며 종2열로 ‘朝鮮忠臣兵曹佐郞贈都承旨李公慶流之墓(조선충신병조좌랑증도승지이공경류지묘) ’의 비문이 있다. 아쉽게도 좌우 측면과 비문의 ‘贈(증) ’과 ‘李(이)’에 탄흔이 7군데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36㎝·너비 106㎝ ·두께 64㎝, 비신 높이 140㎝·너비 上(상)57㎝·下 (하)51㎝·두께 22.5㎝이며 總高(총고)176㎝이다.
墓碣(묘갈) 은 이경류 묘역 우측 하단 진입로변에 西向(서향) 하여 풍벽을 갖춘 맞배지붕 비각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좌와 백색대리석제 비신 및 8작지붕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상부에 전후 5엽, 좌우 1엽씩의 단판복련문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의 비문은 前後 2面(전후 2면) 에 있으며, 비제는 ‘有明朝鮮國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行宣敎郞守兵曹佐郞李公墓碣銘 幷序(유명조선국증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행선교랑수병조좌랑이공묘갈명 병서) ’이다. 비문은 嘉義大夫吏曹參判兼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 李縡(가의대부이조참판겸수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 이재) (1680∼1746)가 찬하고, 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世子左副賓客 洪錫輔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오위도총부부총관세자좌부빈객 홍석보) (1672∼1729)가 서하고,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知製敎兼校書館校理 金鎭尙(통훈대부행사헌부집의지제교겸교서관교리 김진상)이 전하였다.
撰者(찬자) 이재는 숙종대의 문신으로 글씨에 뛰어나 성남시 궁내동의 李졸神道碑(이졸신도비) 와 양주군 남면 상수리의 洪啓迪神道碑(홍계적신도비) , 은현면 도하리의 柳自湄墓碣(유자미묘갈) , 회천읍 봉양리의 崔孝蹇墓碣(최효건묘갈) , 광주군 실촌면의 金若時墓表(김약시묘표) , 안성시 고삼면 삼은리의 兪命建墓碣文(유명건묘갈문) 을 찬하기도 하였다. 건립연월은 崇禎紀元後再戊申(숭정기원후재무신) (1728, 영조 4) 10月이다. 옥개석은 비좌보다 넓고 커서 비신보호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旌閭碑(정려비) 는 중앙공원 내 탄천을 바라보고 정면 2칸, 측면 1칸의 비각 내에 이정룡 신도비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碑(비) 는 화강암 지대석 위에 놓인 장방형 비좌에 2개의 정방형 화강암 기둥을 세운 후 가운데 목제현판을 끼웠고 8작지붕을 얹어 놓았다.
이경류 정려비문
비좌는 4면에 당초문과 전후 5엽, 좌우 1엽의 복련문이 있다. 石柱(석주) 에는 前面(전면) 에 비문이 있으나 마모와 결락으로 뚜렷하지 않으며, 건립연대는 崇禎紀元後再丁未(숭정기원후재정미) (1727, 영조 3) 3月(월)이다. 석주 사이의 정려문은 종8열, 횡2행으로 ‘忠臣宣敎郞守兵曹佐郞李慶流之閭(충신선교랑수병조좌낭이경류지려) ’이다.
크기는 비좌 높이 38㎝·너비 101㎝·두께 63㎝, 석주 높이 189㎝·너비 35㎝, 옥개석 높이 44㎝·너비 237㎝·두께 106㎝이며 總高(총고)271㎝이다.
참고문헌
京畿道(경기도), 『京畿金石大觀(경기금석대관) 』6,1992.
京畿道(경기도), 『京畿人物誌(경기인물지) 』上,1991.
경기도, 『경기문화재대관』,1998.
기전문화재연구원,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총서 제1집), 2000.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고적조사보고 제27집),1999.
양주문화원,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I』(양주향토자료총서 제1집),1998.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1집),1998.
한양대학교박물관, 『분당지구 문화유적 종합학술조사보고서』,1991
비 고 : 경기도기념물 제116호
[출처 : 성남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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