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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성남 옛 이야기 13 - 선조 임금에게 비옷을 바친 권징(權徵)

선조 임금에게 비옷을 바친 권징(權徵)

 

***** 임오년(1582) ∙ 계미년(1583) 사이에 동요(童謠)가 있기, "나라를 어지럽게 할 자는 동인이요, 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서인이다" 하였는데, 이는 다만 동이(東夷)와 서융(西戎)으로만 알고 근심하였더니, 근래에 시사(時事)를 보니, 동인이 정권을 잡아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서인은 정권을 잡아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 《속잡록》

1592년 임진왜란이 나기 전 해의 민간(民間),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道 司雨裝直領)"이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임진년에 이르러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播遷=임금이 피난 가는 것)할 때에, 창황(蒼黃)하게 비를 무릅쓰고 떠났기 때문에 우비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사현(沙峴)을 넘었을 때는 비가 더욱 심하였는데,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따라와 우비와 직령을 올려서 임금이 비로서 입고 행차하였으니, 동요가 이때 이르러서 과연 징험했다고 한다.

임금이 돈의문(敦義門)을 나와 사현(沙峴)에 이르자, 동방이 차차 밝았다. 돌아보니 성안에 불이 일어나서 연기와 불길이 이미 공중에 솟구쳤다. 이는 난민이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거기에는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탕고에 들어가서 금과 비단을 디투어 가져가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태워서 하나도 남김이 없었으니 역대의 보물이며 문무루(文武樓)에 간직한 서적이며 춘추관(春秋館)에 있던 각조 실록(各朝 實錄)과 다른 창고에 간직했던 역사기록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다 잿더미가 되었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조존세(趙存世) ∙ 박정현(朴鼎賢) ∙ 임취정(任就正) ∙ 김선여(金善餘) 등이 또한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성을 넘어 도망하였다. 난민이 또 왕자 임해군(臨海君) ∙ 전 병조판서 홍여순의 집에 불을 질렀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이르자 비가 더욱 심한데 일행이 바삐 서쪽으로 향하여 달아나면서 질서가 없었으며 서로 부르짖었다.

임금이 벽제(碧蹄)에 이르자 모두 젖어서 갈 수가 없었을 지경이었고, 혜음령(惠陰嶺)을 지나자 큰 비가 물 퍼붓듯 하였다. 궁인들은 모두 약한 말을 타고 푸르고 흰 물건들로 머리와 낯을 가리고 울부짖으며 따라갔다. 마산역(馬山驛)을 지나자 어떤 사란이 밭두렁에 있다가 대가를 바라보고 통곡하기를, "나라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니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꼬" 하였다. 《재조번방지(再造蕃邦志)

선조 임금에게 비옷을 전해 준 경기감사 권징(1538~1597)의 묘소가 수정구 금토동 산63번지에 있다.

이보다 앞서 의주에서는 옛날부터 서로 전해 내려오는 동요가 있기를, "막좌리들이 강물 다 떨어지면 백마(白馬) 장군이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른바, 막좌리들이란 곳은 바로 의주 서쪽 성 밖에 있는 땅인데, 성 안 사람들이 여기다가 농사짓는 곳으로 인산보(麟山堡)와 직접 연접하였으며, 마이산(馬耳山)은 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보고 있으니 중국 지경이다.

이 무렵 압록강(鴨綠江)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와서 큰 들을 다 깎아 먹고 의순과(義順館) 문 앞이 도구(渡口)가 되었는데, 중국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강을 건너와서 원조함에 미쳐서 그가 타고 온 말이 곧 흰 말이었으니, 그 동요의 말대로 되었다. 《재조번방지》5)

5)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동요(童謠)

[출처 : 성남 옛 이야기 : 성남문화원(한춘섭 윤종준 편저)]

 

권 징( 1538-1598)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이원(而遠)이요 호는 송암(松菴)이요 시호는 충정(忠正)이요 관향은 안동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병조좌랑 춘추관기사관 우승지 좌승지 형조참의 관찰사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진강에서 전투하였으나 패배하고 권율장군과 함께 의병에 가세하여 한양 탈환작전에 참가하고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화친에 반대하여 왜군토벌을 주장하였다. 묘소는 금토동 산 63번지에 있다.

[출처 : 성남문화원]

 

권징 묘소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