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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겸재 정선

정선 [鄭敾] 조선 화가 | 브리태니커

1676(숙종 2)~ 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겸재(謙齋). 호조참판에 추증된 시익(時翊)의 맏아들로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해 몹시 가난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남과 사귐에 결코 화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등 점잖은 군자적 풍모를 지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이웃에 살던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청하여 그의 권고와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한성부주부·하양현감·청하현감·훈련도감낭청·양천현령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화명을 통해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했으며, 이병연(李秉淵)·조영석(趙榮祏)·유척기(兪拓基) 등의 노론계 인사들과는 백악산(白岳山:북악산) 밑에 이웃해 살면서 평생지기로 절친하게 지냈다.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들은 친자연적(親自然的) 초속의식(超俗意識)과 풍류의식에 기초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정형산수와 산수인물 및 진경산수화가 대종을 이루는데, 특히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는 현실감 넘치는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하고 성행시킴으로써 한국적 회화 발전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전국의 명승지를 탐승하면서 우리의 국토미와 그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 무덤을 이룰 만큼 많은 붓이 닳도록 사생을 하며 동국진경(東國眞景)을 대성시킨 그는 자기집 주변의 서울 사철경관과 명승·명소를 비롯하여 금강산과 지방 수령으로 재임했던 지역 주변의 풍경들을 즐겨 그렸다. 인왕산과 백악산 등의 바위덩이를 표현하기 위해 넓적한 붓으로 짙은 먹을 여러 번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개발하고, 금강산의 개골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예리한 각필(角筆)의 수직준(垂直皴)을 창안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수묵법과 새로운 남종화법을 음양의 원리에 융합시킨 독특한 필묵법과 함께 대상의 특색 포착을 통한 인상주의적 감각에 의해 형성된 강렬한 바위주름법과 편필(便筆)의 소나무 묘법, 부감법의 대각선 구도 등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법을 창출함으로써 중국 산수화풍의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한국회화사에 일대 변화를 주었으며,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의 이러한 진경산수화풍은 실경사생의 모범이 되어 당대화가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화가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장시흥(張始興)·정충엽(鄭忠燁)·김응환(金應煥)·김석신(金錫臣) 등으로 정선파 라 불린다(→ 색인 : 정선파).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 金剛全圖〉·〈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호암미술관)를 비롯하여 〈청풍계도 淸風溪圖〉·〈인곡유거도 仁谷幽居圖〉·〈경교명승첩 京橋名勝帖〉·〈해악전신첩 海岳傳神帖〉(간송미술관)·〈정양사도 正陽寺圖〉(국립중앙박물관)·〈만폭동도 萬瀑洞圖〉(서울대학교 박물관)·〈육상묘도〉·〈연강임술첩 漣江壬戌帖〉(개인 소장) 등이 있다.

 

 

 


 

 

겸재 정선과 한강 그리고 1천원 지폐

한강 탐방 에세이 2012/05/14 19:58

 

겸재 정선(謙齋) 鄭歚1676년~1759년)은 조선 후기의 화가·문신이다.
20세에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됐다.
30세를 전후해 한국 산수화의 창조적 독창성이 돋보이는 진경산수화의 종화가 됐다.
금강산 등 전국을 여행하며 조선을 풍광을 화첩에 담는 작업을 꾸준히 했다.
겸재 정선은 60대 후반에 양천현령을 지냈다. 이때가 진경산수화가 완숙한 경지에 오른 무렵이다.
그는 양천현령으로 있으면서 서울과 한강을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때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을 남긴다.
“험준하고 힘찬 산악미에다가 부드럽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겸비했다."
겸재는 당시 강변의 풍경을 담아내면서 이같은 평을 받는다.
우리나라 지폐 천 원권 뒷면에 겸재의 그림이 있다.
산과 나무 그리고 한 채의 집이 어우러져 있는 ‘계상정거도’이다.
정선은 30세가 되기도 전에 조선팔도 안에 화가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하였고, 덕분에 먹고 사는 걱정은 없어졌다.
그는 궁정화가로 연잉군(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영잉군은 왕이 되어서도 정선을 아끼며 그의 예술 세계를 지원하는 기둥이 되어 주었다.

 

 


 

겸재 정선과 귀거래 그리고 덕양산

한강 탐방 에세이 2012/05/14 20:37

 

덕양산 기슭 행호강가에 자리한 정자 귀래정 그림이다.
정자를 세운 이는 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1580∼1656)이다.
그는 광해군 5년(1613)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다 모친상을 핑계삼아
병조정랑의 벼슬을 버리고 행주로 물러 나와 10년간 은거해 살았다.
인조 원년(1623)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벼슬을 살면서도 늘 행주로 돌아와 지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옛날 물러나 살던 집을 고치고 그 정자에 귀래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동진(東晋)시대 대표적인 은거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이름이다.
1742년에는 김광욱의 증손자인 동포 김시민(東圃 金時敏·1681∼1747)이 주인이 되어 서울 집을 오가며 살고 있었다. 김시민은 겸재와 인왕산 밑 한 동네에서 사는 친구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1651∼1708)과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김시민은 사천 이병연(쏏川 李秉淵·1671∼1751)과 함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의
외현손이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하는 친척간이었다.
겸재와 사천은 어려서부터 김시민과 함께 이 귀래정을 무시로 출입했을 것이다.
덕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강변 산자락에 큰 규모의 기와집이 지어져 있다.
행랑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로 꾸며진 제법 호사스런 대가 집 규모다.
본채 오른쪽 뒤로는 별당이 하나 있고 왼쪽 쪽문 밖으로는 정자가 우뚝 솟아있다.
이것이 귀래정이라고 전한다.
그 소나무와 전나무가 쌍으로 서있고 집 뒤편은 온통 잡목 숲으로 뒤덮여 있다.
솔숲에 둘러 쌓인 그 집 아래 강가에는 이 집 전용인 듯한 거룻배 한 척이 매어져 있다.
으리으리한 이 대가 집에 어디서 무엇을 실어다놓고 나가는지
쌍돛단배 한 척이 돛폭에 골바람을 받으며 강으로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1)개화사

한강 탐방 에세이 2012/05/14 20:13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 가운데 그림 하나로 그림 개화사이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의12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모습이다.
개화산은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표고 128.4m의 잔구성 구릉산지이다.
그야말로 동네 뒷산 수준이다. 일명 ‘주룡산(駐龍山)’이라고도 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주룡선생이라 자칭하며 이 산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가 이 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 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선생이 살던 옛 터라고 한다.
이 곳에 봉수대가 동·서 두 곳에 설치되어 있고,
봉수군과 봉대별장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봉수진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로 ‘開火山’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두개의 봉수대 중 동쪽은 방화동의 치현에서,
서쪽은 개화산에서 봉수를 받아 연락하였던 것이다.
치현의 동쪽 봉수대는 현재 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렇듯 임진왜란·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여 ‘開火山’이라 했다고 한다.
그후에 ‘開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본다.
산정에 서면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의 광활한 풍광과 바닷물이 들어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낙산·북악·남산을 비롯해서 멀리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오는 한강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조선 후기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 정선은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열수팔경도의 하나로 개화사라는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오솔길의 소나무숲과 그 아래 버들숲이 우거져 있고 전답이 있는 모습을 그렸다.
개화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건강하게 즐기며' 사는 낙건정

한강 탐방 에세이 2012/05/14 21:20

 

행주산성 덕양산에 충혜공 김동필(金東弼·1678∼1737)의 낙건정 정자가 있었다.
낙건정은 행주대교가 지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이조 호조 형조 공조등 6 판서를 모두 역임한 낙건정 김동필(金東弼.1678-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하게 즐기며' 살기위해 지은 집이다.
김동필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의 문인(門人)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때 비록 소론이 됐지만 스승과 벗들과의 관계 때문에
항상 노론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소론의 공격으로 경종 1년(1721)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 4대신들이 처형 되고
왕세제로 있던 영조가 환관들의 모함으로 위기에 몰렸던때
과감이 나서 이들 환관을 탄핵해 영조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때 그의 벼슬은 왕세제를 교육하는 시강원 보덕(보덕)이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강경파 노론의 눈밖에 나서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각오를 해애 했다.
이에 김동필은 경종1년 이 낙건정을 행호 강변에 짖게 했다
낙건정이란 이름은 송나라때 학자인 유일거사 구양수(六一居士 毆陽修.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 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낙건정 주인 김동필은 사천의 이종사촌 아우이면서 김시민과도 8촌 형제간이었고,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1689∼1746)까지도 이정구의 외현손이었다.
당연히 송인명은 이병연, 김동필, 김시민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했다.
겸재와 사천이 행주의 3대 별장인 귀래정과
장밀헌, 낙건정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겸재와 사천은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로 이를 기회 닿는 대로 사생해 냈으니
이 ‘낙건정’(?)도 그런 겸재의 그림 중의 하나다.

 


경강 첫 나루 광나루

한강 탐방 에세이 2012/04/24 04:32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鄭敾 : 1676∼1759)의 그림 「광진(廣津)」이다 .
아차산은 한양과 경기도 광주를 연결하는 나루인 광진(廣津) 즉 광나루는 아차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루라면 사람들로 붐볐을 법하건만 그림 속의 광나루는 비현실적으로 평온할 뿐이다.
그림 속 아차산 기슭의 집들을 사대부들의 별장들로 보았다.
한강 남쪽 나루의 이름 광나루를 말한다.예전에는 나루 부근에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유원지로도 이용되었던 곳이다. 부근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던 곳이다.
광나루 주변은 채소류, 과일류의 산지였다.
예부터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지는 요충지로 유명한 나루터였다.
오래전엔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했다.
이 광진을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이 나루 건너편이 초기백제의 옛 도읍지인 하남위례성 풍납토성이다.
이 광나루는 한강에서 가장 큰 나루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가에 있던 나루중에서도 중요한 곳으로 그림에 광진원도 보인다.
오늘날의 공무로 출장 중에 묶는 공무원과 중요한 국가 수입원인 쌀을 보관하던 창고,
도성 출입을 관리 통제하는 관청(도승) 들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도로를 이용한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다.
주로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로를 주요 교통로 삼아서 쌀을 비롯한 조세를 배로 이동 징수 하였다.
강가 곳곳에 그런 징수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었다.(조운창/조창)
강원도 산골에서 나무를 베어 뗏목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경상도 지방의 징수물들이 죽령이나 새재(조령)를 넘어
충주에서 남한강 뱃길로 이곳으로 모여 들기도 하였던 곳이다.
아마 그 당시는 광주 땅으로 불리던 오늘날의 천호동과 광장동 일대에는 주막을 비롯한
여각과 고단한 나그네들을 위한 선술집들이 즐비한 강변도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