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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조선시대 역관과 인삼에 얽힌 사연

 

조선시대 역관과 인삼에 얽힌 사연

[무역입국의 그늘,밀수 밀화]

 



‘약방에 감초’란 말이 있듯 조선시대 무역을 이야기할 때면 역관(譯官)과 인삼을 뺄 수가 없다. 역관은 당시 국제교역을 위해 상대와 의사소통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통역사였고 인삼은 교역상품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수출품의 하나였다.

그래서 역관은 능통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명(明)나라와 조공무역이나 청(淸)과 부연사행(赴燕使行·외교사절의 일종), 일본과 통신사행 등을 수행하면서 국제무역상, 외교관, 무기수입상, 정보원, 개화사상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천의 얼굴을 가진 역관은 조선 후기에만 사역원 소속으로 약 600명에 달했다. 그런데 실제 관직을 부여받고 직무를 수행하는 역관은 70여명에 불과했다. 대다수 역관은 공식적인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임시직으로서 제대로 된 녹봉도 없었다. 그래서 역관은 안정된 경제적 토대를 갖지 못했다. 오로지 사행으로 나설 때 부를 축적하거나 보상을 받을 수 있어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관이 국제무역상으로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도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출장비 대신에 인삼 8포를 무역권으로 준 것이다. 포당 10근씩, 총 80근이 역관들의 무역자금이었다. 1682년(숙종 8년) 당시 인삼 1근당 가격을 은 25냥으로 환산하면 인삼 80근은 자그마치 은 2000냥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당시에도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그 효능이 입증돼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인삼은 수출량을 제한하는 등 통제된 무역품이기도 했다.

특히 인삼은 17∼18세기 청·일간 중개무역(仲介貿易)을 하면서 교역상품으로서 꽃이었다. 인삼은 중국에서 반입한 백사나 견직물보다 부피가 크지 않아 일본으로 밀반출하기가 쉬워 잠상(潛商·밀수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처럼 역관은 무역자금을 갖고 사행길을 나선 까닭에 국제무역상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연행무역(燕行貿易·조선 후기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 행렬을 통해 이뤄진 무역)을 하면서 책문후시(柵門後市·조선과 청국 상인 사이에 이뤄진 만주 책문에서의 밀무역)등 밀무역에 손을 대기도 하고 대일무역의 창구인 왜관(倭館)에서 중개무역을 하면서도 잠상과 짜고 인삼밀무역 등으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이용득 부산세관 박물관장

■사진설명=천의 얼굴 왜학역관이 가마를 타고 가는 모습을 담은 조선통신사행렬도.

 

 

 KBS 역사 스페셜  <조선시대, 역관은 갑부였다> 영상화면 1

 

KBS 역사 스페셜  <조선시대, 역관은 갑부였다> 영상화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