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의 종장 사계 김장생선생의 제자 송시열편...
예학자 우암 송시열선생편 입니다.
천안시내 압구정 한명회묘소에 들렸다가 충북 괴산군 청청면소재지에 도착하여 송시열선생 묘소를 물어보니 200여m정도 떨어진 코앞에 있다고 알려주더군요.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의 과거사.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등극하였는데 재편되고있는 중국대륙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민족의 큰 비극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되는데 인조가 청태종앞에서 지금의 석촌호수쯤되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난후 그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훗날 효종)등 죄없는 백성 10여만명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 가게 됩니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부부는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복수심만 불태우다가 8년여만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귀국하게 됩니다.
개방된 사고방식을 가진 소현세자부부는 아버지 인조의 눈밖에 나고 왕의 자리를 빼앗길것을
두려워해서 그랬던지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에 의문의 죽음(독살이라고함)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인 민회빈(강빈)도 시아버지인 인조가 괜한 이유로 사약을 내려 죽이고,
그의 아들 셋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두아들은 풍토병으로 죽고,
막둥이 아들인 이석견이만 혼자 살아남게 됩니다.
그 것이 KBS사극 "추노"의 역사적 배경인것 입니다.
"추노"만큼은 끝까지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인조는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히고 인조가 죽자
봉림대군이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으로 용상에 앉게 됩니다.
그 후 효종은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하여 누가봐도 무모한 북벌계획을 감행하는데
그 때 기용한 사람이 송시열, 송준길등 입니다.
그러다 효종이 제위 10년만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북벌계획은 유야무야 되어 버립니다.
우암 송시열은 15대 광해군, 16대 인조,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에 이르기까지
5명의 임금을 걸치면서 정치와 학계를 30여년간 한손에 쥐고 뒤흔들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한사람이 3천번 이상 수록되고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나 그 또한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숙종으로 부터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당시 큰 죄는 그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훗날 경종)을 세자책봉에 반대했다는 이유입니다.
우암선생 신도비각에 도착하니 그 옆의 은행나무가 겨울인지라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지만 돌에 새겨진 내용을 보니 82년도에 370년 되었다고
씌어있어 올해로 꼭 400년이 되는 은행나무입니다.
이 은행나무는 그 당시 정치상황을 다 알고 있을텐데....
선생의 신도비각
안의 신도비는 정조의 어필로 정조3년(1779)에 세운것으로 국난이
있을때는 땀을 흘린다고 적혀있더군요.(믿거나 말거나..)
묘소로 오르는 박석계단이 누군가가 말끔하게 청소를 해 놨습니다.
비교적 잘 시공된 박석계단이 높게 올라갑니다.
우암선생의 묘역
여느묘와 비교해도 검소하게 보이고 평범해 보였습니다.
묘지 정면
묘지 뒷편에서...
후손들이 손 본지 얼마 안 되는것 같았습니다.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각입니다.
여기부터는 우암선생의 발자취를 인터넷 사진을 바탕으로 옮깁니다.
우암 송시열선생 수명유허비 (정읍경찰서 뒷편 도로에 위치함)
선생은 숙종 15년(1689년)2월에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그 해 5월28일 조정의 명에 의해
다시 서울로 압송도중 6월7일밤 정읍에 도착하여 공무를 집행하면서 관리들이 출장시
잠을자는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니 그 때 나이 83세 그 뒤 6년이 지나 선생의
무고함이 밝혀지고 영조 7년(1731년)에 이 곳에 수명유허비가 세워졌다
우암 송시열선생 글씐바위 (전남 완도군 보길면 백도리 해안가에 위치)
여객선으로 노화도에서 내려 철부도선 으로(예전에는 여객선만 다녔다.)
해안가에 위치한 글씐바위에 갈수있다
나이든 동네주민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글씐바위 건너편 섬인 소안도 맹선리를
벗어나면 제주도로 가는 큰 바다가 열리는데 6.25전쟁때 제주도 신병훈련소로 병력을
싣고가는 군함이 화장실 문제로 그 곳에 정박하면 전쟁통이라 훈련소로 가기싫은 병력중에
산으로 도망갔다가 현역군인에게 잡혀 현장에서 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는
주민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여기 묘사된 송시열선생을 파헤친 책중에서
"이덕일 역사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어보니 송씨 가문의 후손들이 보면
화를 낼 법도 한 내용인데 작가가 이렇게 까지 묘사한것이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
을 얘기 하는듯 합니다.역사를 알면 현재와 미래가 보이는듯 합니다.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선조40년,1607년) 26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으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기묘록>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충청도 연산의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고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최명길의 추천으로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뒷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봉림대군 만16세, 우암 만28세) 그러나 병자환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좌절감 속에서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관직을(사헌부장령) 주어 불렀으므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으나(42세) 7일만에 벼슬을 떠났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시강원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왕비의 아버지인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져 낙향하였다.
인조 11년(1633년) 27세 때부터 사망하는 숙종 15년까지 56년에 걸쳐
네 임금이 부른 횟수는 167회였으나 이에 응한 것은 37회에 불과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9)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 거제 등지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1689년 1월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여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에 내려졌다.
다음해에는 문정이라는 시호라 내려지고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 23개의 서원과 전국 9개소의 사우에 제향되었다.
영조 31년(1755)에는 드디어 유학자 최대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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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의 개인적인 삶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삶을 산 인물이다.
소학은 평생에 걸친 수신교과서이다.
그는 검소함을 으뜸으로 삼아 조복도 비단이 아닌 무명을 사용하였으며
망건에 금관자도 달지 않았고, 부모가 생전에 가난하여 요도 없이 지낸 일이 있다 하여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의 효자였다.
가정에서도 효도는 그에게 성인의 도, 그 자체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중형을 아버지 섬기듯 하면서도
두 아우에게는 우애와 엄정함을 가르쳤다.
또 부인에 대한 예우는 깍듯해
며칠이상 외출시 부부가 서로 절하고 귀가할 때도 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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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여진 바위
보길도의 맨 동쪽 끝 해변에 있고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가 수평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앞은 소안도가 보이고 수평선 쪽에서 제주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주변의 경관은 20~30m의 높은 절벽이 약 300m까지 이어져 있으며, 절벽 위에는 해송이 울창하다. 이 절벽의 한 부분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 였던 우암 송시열의 마지막 시를 후세에 음각으로 남겨 놓았다.
조선 숙종15년(1689년) 때 왕세자 책봉 문제로 당파간에 논쟁이 심화되었고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명하게 된다. 유
배길에 오른 우암 송시열은 보길도를 지나다 한시 한 수를 지었는데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시다.
석벽에는 시 2수가 음각되어 있는데 한 수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고,
한수는 임관주(任觀周)작으로 추정이 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모진 사람들의 손에 의한 탁본의 흔적 때문에 잘 알아보기가 어렵다.
八十三歲翁 (팔십상세옹) 83세 늙은 이 몸이
蒼波萬里中 (창파만리중)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一言胡大罪 (일어호대죄)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三黜亦云窮 (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北極空瞻日 (북극공첨일)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南溟但信風 (남명단신풍)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 뿐이네
貂舊萬恩在 (초구만은재) 초구(임금이 하사한 담비 갖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感激泣孤衷 (감격읍고충)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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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고산 |
우암 |
출 생 |
선조20년(1587년)
서울 동부 연화방에서 출생 |
선조 40년(1607년)
충청도 옥천에서 출생 |
사 망 |
85세(1671년현종12년6월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芙蓉洞樂書齋)
에서 돌아가심. |
83세(1689년 숙종 15년)
국문을 위해 귀경 길인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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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의 사상적 종주는
영남학파의 퇴계 이황이다.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개혁적견해를 나타냄 |
서인의 사상적 종주는
기호학파의 율곡 이이이다.
신권 중심의 정치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보수적 견해를 나타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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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에서 47세까지
봉림대군의 사부로 6년여 동안 가르침. 효종이 임금이 된 후
동부승지로 특별히 임명 |
28세때 봉림대군의
사부로 6개월 동안 가르침
효종이 임금이 된 후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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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이란?
인조의 첫째 왕비는 인렬왕후 한씨로 소현, 봉림, 인평, 용성대군 등 4남을 낳고
인조 13년에 사망했고, 3년후 양주조씨와 재혼했다.
그녀가 장렬왕후 조씨이고 효종2년 자의대비 가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가 아들인 효종의 국상 때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제1차 예손논쟁이다.(1659년) |
남인의 논객 윤휴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함 이어
미수허목이 3년복 주장,
현종1년4월고산 윤선도가 과격한 상소로 논쟁에 뛰어들다 - 삼사로 귀양 |
집권당인 서인쪽에서 1년복을 주장함,
송시열, 송준길이
허목의 이론을 반박-1차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남.
고산을 지원하는 사람 권시, 조경, 홍우원 |
최대의 정적관계인 두 사람의 유적이 보길도에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뿌리는 선조 21년(1589) 발생한 정여립의 난때 판관은 서인 정철이었는데,
이때 죽음을 당한 이발(李潑)은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의 사위였다.
또한 효종의 장지를 수원으로 정하였다가 좌절되는 등
고산의 정치적 야망이 서인으로 인해 좌절되었다고 사료됨 | |
2차 예송 및 숙종과 우암의 충돌
2차 예송이란?
1674년(현종 15)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며느리인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인조의 왕비)의 상복기간을 둘러싼 논란이다.
예조에서 9개월복으로 정하였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이 1년복이라는 상소를 올려 시작되었다.
즉 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대우하느냐.
차자와 차자부로 보느냐의 차이인 것이며,
나아가 왕통 계승에 관한 문제가 따르는 것으로
현종의 왕통에 대한 서인들의 정면 도전이었다.
- 현종은 대노하여 남인의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승하하셨다.
열넷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숙종은 예손논쟁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유업을 이어받음.
진주의 유생인 곽세건이 상소하여 우암이 예론을 그르친 자이니 벌주어야 한다는 상소였다
-숙종이 옹호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동맹 휴학에 들어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하여 우암을 탄핵
-숙종 즉위 4개월 만에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 명령을 내림(우암 67세)
-남인 득세함
-숙종 5년 5월 우암의 최상을 종묘에 고함.
남인 탁남(허적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청남(허목을 비롯한 강경파)으로 갈라졌음.
1680년(경신년, 경신환국) 숙종 6년 3월 허견의 난으로 서인이 재 집권함.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 숙종 6년 5월 사사됨.
숙종 6년 5월 우암의 귀양살이 풀림.
숙종 14년(1688) 10월에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아 원자로 정호하자
우암이(82세) 반대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귀양(백도리 바위에 시 남김)-사사됨.
※참고문헌 :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2002)
1671년(현종12) 12월 윤고산께 직첩을 다시 주게 하였다.
1676년(숙종 2) 3월 윤고산의 상소를 불태우기를 청한 사람을 조사함.
1678년(숙종 4) 8월 손자 윤이석에게 6품직 이산 현감에 임명.
1679년(숙종 5) 8월 윤고산에게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림.
1689년(숙종15) 6월 제주에 귀양가 있던 우암을 불러 정읍에서 賜死 명함.
1690년(숙종16) 호남 유생 유이성 등 160여 명의 상소로 서원건립을 명함.
1672년(영조 3) 왕의 특명으로 불천지위 되심. 사후 57년 만임.
1800년(정조24) 상왈 호(號)를 부르되 필히 윤고산(尹孤山) 3자를 부르게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