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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회색 고무신> 묘엄스님

 

성철스님은 1944년 동안거와 이듬해 1945년 하안거를 경북 문경 대승사(大乘寺) 쌍련선원(雙蓮禪院)에서 지냈다. 지금은 대승선원이라 한다. 여기서는 평생도반 청담스님과 같이 있었다. 스님은 당신 도반의 둘째 딸을 이때 발심 출가시켰다. 1945년 단오날이었다.

“나는 (계를 설하기 위해)법상에 안 올라가는 사람인데, 순호스님(청담스님을 당시엔 순호스님이라 했다) 딸이니까 내 딱 한번 사미니계를 설한다.” 법상에 오른 성철스님은 청담스님 딸 인순이를 앉혀놓고 계를 설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이 명(命)과 목숨이 다하도록 일생동안 산목숨을 죽이지 말 것이니, 능히 이를 지키겠느냐?” “능지(能持, 능히 지키겠습니다)”

 

한국 최초 비구니강사 묘엄스님

선지식으로 우뚝 서

이렇게 5계와 10계를 다 설한 후 성철스님은 “이제 그대는 사미니가 되었으니 법명은 묘할 묘(妙)자, 장엄할 엄(嚴)자, 묘엄이라 할 것이다.” 이때 인순의 나이 14살. 현대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巨木) 묘엄스님은 이렇게 스님이 되었다.

묘엄스님은 지금 수원 봉녕사(奉寧寺)에 주석하고 있다. 봉녕사 주지이자 봉녕사승가대학 학장을 거쳐 종단의 품계(品階)로는 비구의 대종사에 해당하는 명사(明師)인 이 시대의 선지식이다.

묘엄스님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 윤청광(尹靑光)은 <회색고무신>으로 이름한 이 책에서 이렇게 써 놓고 있다.

 

묘엄스님.
“일제시대의 움츠러들고 변질된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불교정화를 외치던 청담스님. 그는 노모(老母)의 원을 들어주기 위해 하룻밤의 파계를 행한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딸은 그 출생의 사연 때문인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일제치하, 정신대(지금은 일본군 종군위안부라 부른다)에 가지 않기 위해 딸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다. 친구의 딸에게 불교, 역사, 교양 등을 손수 가르쳐주고 ‘묘엄’이라는 법명을 내려준 성철스님. 딸은 아버지 청담스님과 스승 성철스님의 바람대로 우리나라 비구니계를 바로 세우고 비구니들의 스승이 되기 위한 고된 수행길에 나선다.

청담스님, 성철스님뿐만 아니라 경봉스님, 운허스님, 동산스님, 효봉스님, 향곡스님, 자운스님 등 내로라하는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딸은 한국 최초의 비구니강사가 된다. 그 후 딸은 동학사, 운문사에서 비구니강원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으로서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뿌리가 되었다.”

 

<회색고무신>은 청담스님의 딸, 성철스님이 제자인 묘엄스님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스님의 딸로 태어나 오늘날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큰 스승이 된 묘엄스님은 어쩌면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남긴 가장 큰 사리가 아닐까.” (<회색고무신> 2002년 시공사 刊)

 

 

수원 봉녕사 일주문

 

수원 봉녕사 석탑과 비로자나불

 

수원 봉녕사 비로자나불

 

수원 봉녕사 청담스님 친필 불(佛)과 우화궁...^-^...묘엄스님이 입적하시어 흰색의 텐트(장막)가 설치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