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씨알여행(유기열)

얼레지- 은밀한 곳 숨기면 뭐 하나?

얼레지 은밀한 곳 숨기면 뭐 하나?

 

다 보여주고서라도 후손을 이어야지

동물은 은밀한 곳을 숨긴다. 소중한 곳의 보호본능과 치부를 드러냄에 대한 부끄러움이 합쳐진 탓이다. 식물은 반대다. 풀이든 나무든 대부분은 동물의 성기에 해당하는 꽃술을 드러낸다.

화려한 꽃잎 가운데에 정교하고 날렵하게 보란 듯이 내놓고 있다. 암술은 하나짜리가 많고 수술은 여러 개가 많다. 암술 하나가 수십 개의 수술을 거느리기도 한다.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일처다부제인 셈이다.

얼레지 역시 마찬가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아침 햇살을 받으면 꽃잎이 옆으로 벌어진 후 뒤로 젖혀지고 위로 말린다. 그러면 꽃잎이 휘어지는 부위안쪽에서 아래로 W자가 보이고 그 양끝에서 각각 1개의 선이 활모양을 한 무늬를 하고 있다.

그 사이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암술과 수술이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다. 암술은 수술보다 길어 수술 아래로 길게 나와 있다. 이렇게 꽃이 활짝 핀 모양이 처녀가 치마를 머리위로 뒤집어쓰고 머슴아를 유혹하는 듯 하다해서 바람난 처녀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물과 반대로 이 꽃은 낮엔 화냥년처럼 굴다가 햇빛이 약해지는 오후가 되면 꽃잎을 내려 꽃술을 가린다. 그저 피지 않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돌아가 요조숙녀(窈窕淑女)가 된다.

왜 얼레지는 이토록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랫도리를 내 보이는, 그리도 민망하지만 매혹적인 자태를 취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유는 생리적으로는 꽃의 열을 식히기 위해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차질 없이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얼레지는 씨로 번식을 한다.

5~6월에 씨를 받아 곧바로 심으면 이듬해 4월에 싹이 나서 5~6월까지 자라다 잎 등 땅위부분이 말라죽으면 휴면에 들어간다. 한 해 생육기간이 2~3개월도 안되게 짧은 셈이다. 이처럼 생육기간이 짧아 씨가 발아하여 꽃이 피기까지는 대략 5~7년이 걸린다.

한편 비늘줄기와 뿌리는 해를 거듭하며 자랄수록 땅 속으로 내려가 꽃이 필 무렵이 될 때쯤에는 땅 속 20~40cm 아래까지 들어간다. 꽃은 잎이 한 장일 때는 피지 않고 2장이 되면 땅속 비늘줄기의 끝에서 1개의 꽃대가 나와 2장의 잎 사이로 올라온다.

익어가는 열매
꽃이 핀다고 다 열매가 열리지도 않는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10개의 꽃 중 열매를 맺는 것은 5개도 채 안 되었다. 잎이 크고 무성한 얼레지의 꽃이 열매 맺는 율이 높았다. 또한 열매가 열린다고 다 익은 씨를 생산하지도 않는다. 열매가 익기 전에 동물들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비바람에 끊어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열매가 여러 가지 피해를 잘 견뎌내더라도 씨가 영그는 율도 높지 않다. 이처럼 얼레지는 한 알의 좋은 씨를 생산하기가 무척 어렵고 오랜 기간이 걸린다. 얼레지가 발칙한 처녀의 누명을 쓰면서까지 바람나는 것은 꽃가루받이를 잘 하여 좋은 씨를 많이 만들어 대를 차질 없이 대를 이어가려는 속뜻이 있다.

은밀한 곳은 숨기고 싶다.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싶다. 이건 만물의 한결같은 생각이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대를 이어 살아남는 일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얼레지 역시 ‘은밀한 곳 숨기면 뭐 하나! 다 보여주고서라도 씨를 만들어 대를 잇는 게 낫다는 것을.’ 알기에 비난 받는 일을 무시로 저지른다. 사람들은 속없이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니 세상 이치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익어 벌어지는 열매
얼레지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일은 이뿐이 아니다. 꽃가루받이 기간에는 잎에 암적색 내지 자갈색의 얼룩무늬를 만들어 놓는다. 땅에 거의 붙어 있는 잎이 꽃처럼 보여 공중에 홀로 외롭게 피어 있는 꽃에 벌 나비가 찾아 쉽게 찾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잎의 얼룩무늬는 없어져 잎 전체가 녹색이 되고 최대한 탄소동화작용을 많이 하여 열매와 씨를 키운다.

그런데 이 잎은 얼마 살지 않는다. 열매가 다 익기 훨씬 앞서 잎은 누렇게 되어 말라 사그라진다. 그래도 열매는 외줄기 자루에 달려 힘겨운 생을 이어간다. 잎이 없는 고통스런 삶을 2주 이상 산다.(2011년5월19일 잎이 누렇게 말라죽은 뒤 6월2일에 열매가 익어 벌어졌다.)

동물로 보면 먹지 않는 기아상태의 생을 얼레지가 이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 열매를 잘 익게 하여 잘 여문 씨를 생산하기 위해서다. 이때는 열매껍질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작은 탄소동화작용으로 만든 양분과 뿌리의 힘으로 산다.

얼레지의 잎에 있는 얼룩무늬는 피부병의 하나인 어우러기와 닮았다. 어우러기는 지방에 따라서 얼레기와 얼레지로 불리기도 하고 여기서 얼레지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봄철 2~3개월 자라다 이듬해 봄까지 깊은 땅속에서 잠을 잔다 하여 ‘숲 속의 잠자는 미녀’라는 별명도 있다.

영어로는 ‘Dog tooth violet'으로 불리는데 뒤로 젖혀진 꽃잎이 개의 날카로운 송곳 이를 연상하여 부르는 모양인데 아름다운 얼레지 꽃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얼레지란 우리말 이름이 훨씬 좋다.

얼레지는 잎과 뿌리를 먹을 수 있다. 어린잎은 데쳐서 나물로 먹기도 하고 강원도에서는 산모에게 미역국 대신 얼레지 잎으로 국을 끓여 주었다한다. 이래서 ‘산중 미역, 미역취‘로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잎을 데치면 미역처럼 미끈거린다.

열매는 뿌리에서 올라온 길이 10~30cm, 지름 2.0~4.0㎜의 열매자루 끝에 달리며, 위아래가 원만한 삼각뿔 모양이다. 위아래 양끝을 조금씩 잘라내면 사다리 형 세모기둥 모습이다. 3개의 능각이 있고 3개의 개개 면 가운데에 1개의 세로 골이 있다.

위 끝 가운데는 3갈래로 갈라진 암술머리가 달린 길이 1.5~3.0cm의 암술대가 달려 있다. 색은 초기에는 진한 녹색이며 익을수록 연 녹색을 거쳐 누런색이 되고 벌어질 때가 되면 거의 흰색에 가깝다.

크기는 길이 2~4cm, 변(너비) 1.0~2.5cm이다. 광택은 없으며 겉에는 수십 개의 잔주름이 가로로 나 있다. 물에 뜬다.

열매는 익으면 위에서부터 능각을 따라 3조각으로 갈라져 씨를 내보낸다. 벌어진 각 조각의 가운데(면에 나 있는 세로의 골 부위)에 막이 솟아 있다.

벌어진 열매를 보면 씨는 막 양 쪽에 일렬을 이루어 수평으로 붙어 들어 있다. 벌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씨의 위는 능각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 3조각으로 벌어진 열매는 처음엔 세모 종 같다. 그러나 오래되어 마르면 껍질이 옆으로 더욱 퍼지고 끝이 뒤로 젖혀지며 각 조각 가운데는 1개씩의 늑골막이 솟아 있어 마치 3발 달린 불가사리 같다.

1개 열매에는 10~50개의 씨가 들어 있다. 열매 껍질은 싱싱할 때는 부드러우나 마르면 딱딱하고 두께는 0.3~0.7㎜다.

씨는 얼핏 보면 둥근 막대나 타원형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타원형 공을 세로로 6~8등분한 모양이다. 아래는 좁고 뾰족하여 열매의 막에 붙기 쉽도록 되어 있다.

안쪽은 2개면이 만나 능각을 이루고 능각을 따라 세로로 1개의 띠가 있다. 등 쪽은 둥그런 하고 약간 볼록하다. 위 끝에는 길이 1~2㎜의 엘라이오좀이 붙어 있고, 엘라이오좀 위 끝 가운데는 길이 0.5㎜정도의 작은 돋음 점이 솟아 있다.

엘라이오좀을 터트리면 기름이 나와 미끄럽고, 종이에 묻으면 기름자국이 난다. 씨 색깔은 초기와 덜 익은 때에는 흰색이고 익으면 갈색이 된다. 크기는 길이 5~7㎜, 너비 2.5~3.3㎜, 두께 3.0~3.5㎜이나 마르면 이보다 약간 작아진다. 싱싱할 때는 광택과 윤기가 있고 겉이 매끄러우나 마르면 윤기가 없어지고 겉엔 잔주름이 있다. 물에 가라앉는다. 씨 알갱이는 희고 씨껍질은 0.02㎜정도로 얇다.

얼레지 꽃은 보는 위치나 사람에 따라서 느낌이 다른 듯하다. 위에서 보면 상투머리를 연상하기도 하고 옆에서 보면 위로 싹싹 쓸어 올린 처녀머리 같다. 어떤 이는 암내 난 아가씨가 치마를 들어 올려 치부를 보여주는 듯하며 웃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대가 끊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푸른 별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이다. 이런 얼레지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과 힘든 삶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우리 편의대로 느끼고 말하고 있는 인간을 얼레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얼룩무늬 잎과 꽃봉오리>

<거의 다 익은 열매>

-------------------------------------------------------------------------

[유기열 박사 프로필]

농학박사, 대학강사 국립수목원 및 숲연구소 해설가 GLG자문관 한국국제협력단 전문가 시인 겸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씨알여행 연재작가 손전화 010-3682-2593 블로그 http://blog.daum.net/yukiy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