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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성남문화유적 답사 - 이증 묘 및 신도비

 

 이증 묘표

 

 이증 묘표 이수의 태극문

 

 이증 묘

 

이증 신도비와 한산이씨삼세유사비(韓山李氏三世遺事碑)

 

李增 (이증묘) 神道碑(신도비 )

소재지 : 분당구 수내동 산1-2

시 대  : 조선시대

종 류  : ()

내 용

이증(1525∼1600)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韓山(한산) . 자는 可謙(가겸) . 호는 北崖(북애) . 李穡(이색) 7대손. 李之菽(이지숙) 의 아들이나 1549(명종 4) 司馬試(사마시) 에 합격, 1560(명종 15) 別試文科(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正字(정자) 에 이어 다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73년 이후 吏曹正郞(이조정랑) 을 거쳐 檢詳(검상) , 舍人(사인) , 執義(집의) , 直提學(직제학) , 承旨(승지) 그리고 通政大夫(통정대부) 에 이르렀다. 내직으로는 호·· 3조의 참의, 判決事(판결사) , 도승지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황해, 충청, 전라, 경상의 4觀察使(관찰사) 가 되었는 바 경상도의 경우는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568(선조 1) 遠接使從事官(원접사종사관) 이 되었고, 1580년 예조참판으로 聖節使(성절사) 가 되어 ()에 다녀왔다. 1585년 가선대부, 이후 가의대부로 승진했는데, 이때 형··이조의 참판, 한성좌, 우윤, 부제학, 대사헌, 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 를 지냈다. 1589년 대사간으로 있을 적에 鄭汝立정여립) 의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다음해에 平難功臣(평난공신) 3등이 되고 鵝川君(아천군) 에 봉해졌다. 1591년 형조판서, 자헌대부에 이르렀으며, 정헌대부로 있을 적에는 예··공조판서와 의정부의 左右參贊(좌우참찬) 을 역임하였다. 1593년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예조판서로 憲章(헌장) 禮儀(예의) 가 뛰어났다. 임진왜란 6∼7년 전 趙憲·洪聖民·李俊民 (조헌·홍성민·이준민) 등과 함께 왜적을 경계해서 후환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懿簡(의간) 이다. 유고로는 『北崖詩稿(북애시고) 』가 있다.

 

묘역은 분당 중앙공원 내에 나지막한 구릉 상부에 南西向(남서향) 하여 있다. 봉분 중앙에는 흑색의 상석·6각 향로석과 좌측에 묘표 및 봉분 좌우로 8각 망주석·문인석 2기 등의 석물이 있다. 망주석은 간주석에 석수가 양각되어 있으며 크기는 좌 148, 156㎝이다. 문인석은 금관조복형으로 좌 194, 2m로 얼굴부분이 62㎝이다.

 

墓表(묘표)는 백색화강암의 비좌와 一石(일석)인 대리석제의 비신 및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신은 표면이 반들거릴 정도로 매끄러우며 비문은 前面(전면)에만 있으며 종3열로朝鮮正憲大夫禮曹判書鵝川君韓山李公增之墓 配貞夫人慶州李氏?(조선정헌대부예조판서아천군한산이공증지묘 배정부인경주이씨부좌) ’로 되어 있다. 이수는 발가락이 두 개인 雙龍(쌍용) 이 연꽃 속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 양각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직경 2.8㎝인 작은 원 속에 太極紋(태극문) 이 조식되어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18·너비 98·두께 60, 비신 높이 114·너비 48·두께 18, 이수 높이 42·너비 61·두께 28㎝이며 總高(총고) 174㎝이다.

 

神道碑(신도비)는 분당 중앙공원 내 탄천을 바라보고 南西向(남서향)하여 있다. 현재 비각(1997.5∼1999.8) 내에 韓山李氏三世遺事碑(한산이씨삼세유사비) 와 같이 보호되고 있다. () 는 무늬 없는 백색화강암의 비좌 및 비신과 平屋蓋石(평옥개석) 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비문은 前後 2(전후 2) 에 있으며, 상단에는 前後 2(전후 2) 에 걸쳐 篆書(전서) 禮曹判書鵝川君贈領議政謚懿簡李公神道碑銘(예조판서아천군증영의정익의간이공신도비명) ’이라 되어 있다. 비제는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鵝川府院君謚懿簡公行推忠奮義平難功臣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鵝川君李公神道碑銘 幷序(유명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아천부원군익의간공행추충분의평난공신정헌대부예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아천군이공신도비명 병서) ’이다. 비문은 嘉善大夫兵曹參判兼弘文館提學 鄭斗卿(가선대부병조참판겸홍문관제학 정두경) (1597∼1673)이 찬하고, 5代孫 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李震休( 5대손 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이진휴) (1657∼1710)가 쓰고, 5代孫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右賓客 尹德駿(5대손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의금부사동지경연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우빈객 윤덕준) 이 전액을 했다. 撰者(찬자) 정두경은 글씨에 뛰어나 城南市(성남시) 여수동의 李淸臣墓碣(이청신묘갈) 외에 廣州郡(광주군 )남종면의 呂爾徵(여이징) 과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姜弘重(강홍중) 神道碑文(신도비문) 을 찬하기도 하였다. 書字(서자) 이진휴는 숙종대의 문신·서예가로 글씨에 뛰어나 南楊州(남양주) 평내동의 호조참판 睦長欽神道碑(목장흠신도비) 順天 仙岩寺重修碑(순천 선암사중수비) 등 여러 곳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건립연대는 崇禎再乙亥(숭정재을해) (1695, 숙종 21) 1659(효종 10)鄭斗卿(정두경) 이 이미 비문을 지었으나 건립하지 못하였다. 玄孫 李速(현손 이속) 이 여러 형제들과 小宗契(소종계) 를 조직하여 돈과 財用(재용) 을 마련하여 石物(석물) 을 갖추었으며, 이때 비로소 형제 중 李澤(이택) 이 고향의 수령으로 내려와 일을 시작하여 건립하게 되었다. 옥개석은 평옥개석형으로 일체의 장식성을 배제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비신보호의 목적 외에 경제적 여건으로 인한 규모의 최소화에 기인한 듯 하다. 성남 지역에서 이러한 평옥개석형태는 율동 韓潚(한숙) 의 묘표에서 찾을 수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63·너비 141·두께 93, 비신 높이 220·너비 86·두께 33, 옥개석 높이 33·너비 144·두께 91㎝이며 總高(총고)316㎝이다.

참고문헌

京畿道(경기도), 京畿金石文大觀(경기금석문대관) 6,1992.

경기도, 『경기문화재대관』,1998.

기전문화재연구원,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총서 제1), 2000.

한양대학교박물관, 『분당지구 문화유적 종합학술조사보고서』,1991.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3),1999.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남양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5),1999.  

비 고 : 경기도기념물 제116

[출처 : 성남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