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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성남 옛 이야기 / 성남문화유적 답사 -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 영조9(1733) 5 20, 전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1688~1733)가 세상을 떠났다. 이병태는 청렴결백함이 뛰어나고 몹시 가난하면서도 스스로 굳지조(志操)지켜 조금도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해어진 옷과 담박한 음식으로 지냈고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있을 때도 역시 집에 있을 때와 같았으며 숙수(菽水 : 콩과 물이라는 뜻으로, 변변하지 못한 음식을 이르는 말)를 이어대지 못하였는데도 그의 지조는 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본 천성(天性)이 그랬던 것이다.

문학(文學)과 인망(人望)이 같은 동류보다 뛰어났으나 정미년 이후로 뜻을 굽혀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다가 영남(嶺南) 고을에 한 번 쫓겨나 수토(水土)에 익숙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로써 죽게 되었으니 애석하다.

뒤에 영의정 심수현(沈壽賢) '살아서는 청백(淸白)한 지조가 있었고 죽어서는 시체를 염()할 기구가 없었으며 또 늙은 어미가 기아(飢餓)를 면치 못한다'고 아뢰어 고() 감사(監司) 한지(韓祉)의 전례에 따라 그 어미를 주휼(賙恤 : 가난한 사람을 구하여 도와 줌)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구휼(救恤 : 사회적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금품을 주어 구제함)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고 증직(贈職)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라 명하였다.

 

이병태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 유안(幼安), 호 동산(東山), 시호는 문청(文淸), 묘소는 수내동 산 1-2 중앙공원 내에 있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았으므로, 사후 장례비용이 없어 감사 한지(韓祉)가 왕에게 아뢰어 장례를 치르도록 부의를 내리기도 하였으며, 1745(영조 21) 1 18일 실록에는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이병태(李秉泰)는 청백(淸白)함이 남보다 지나쳐 굶주려 죽었다고 합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지금 분당구 수내동(藪內洞)의 동 명칭은 청백리인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이 일대에 숲을 가꾸어서 붙은 지명이라고도 한다.

[출처 : 성남 옛 이야기 / 성남문화원 발행 : 한춘섭 윤종준 편저]

 

 

분당구 수내동 산1-2 (중앙공원 내) 이병태 묘표

 

분당구 수내동 산1-2 (중앙공원 내) 이병태 묘(경기도기념물 제116호)

 

분당구 수내동 산1-2 (중앙공원 내) 이병태 묘(경기도기념물 제116호)

 

분당구 수내동 산1-2 (중앙공원 내) 이병태 묘(경기도기념물 제116호)

 

분당구 수내동 산1-2 (중앙공원 내) 이병태 묘 문인석과 망주석

 

소재지 : 분당구 수내동 산1-2

시 대 : 조선시대

종 류 : ()

내 용

이병태(1688∼1733)는 문신. 본관은 韓山(한산). 자는 幼安(유안) . 호는 (). 李穡(이색) 12대손. 進士 (진사 협) 의 자. 1715(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한 후 思陵參奉, 平市暑奉事, 內資寺直長(사릉참봉, 평시서봉사, 내자사직장) 등을 역임하였다. 1723(경종 3) 증광문과에 乙科(을과) 로 급제하여 權知副正字(권지부정자) 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27(영조 3)에 예조참의, 호조참의를 거쳤고 1730년 경상도관찰사를 배수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하여 그해 6월 특별히 그 직은 파하여 주었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고자 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陜川郡守(합천군수) 로 좌천되었다. 합천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군민들이 生祠堂(생사당) 을 세워 춘추로 제향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아 淸白吏(청백리) 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너무 가난하였기에 임종한 후 우의정 趙顯命(조현명) 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굶어 죽었다 하였고, 장례비용이 없어 감사 韓祉(한지) 가 왕에게 아뢰어 장례를 치르도록 부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에 추증하고 文淸(문청) 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역은 수내동 중앙공원 내에 南向(남향) 하여 원형의 쌍분 형태이다. 용미와 활개를 갖춘 봉분의 크기는 높이 170, 직경 460㎝이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묘표 ·혼유석·상석·6각 향로석과 상석 좌우에 8각 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상석은 문고리문양이 4면에 양각된 2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44·너비 140·두께 93㎝이다.

향로석은 교자상 형태로 크기는 높이 48·너비 34㎝이다. 망주석은 8각으로 석수가 양각되어 있고 크기는 좌 197, 200㎝ 이다. 문인석은 按頭(안두)형으로 좌우가 높이 168, 얼굴부분 56㎝이다. 이목구비는 뚜렷하며 큰 눈에 짙은 눈썹과 작은 입은 꾹 다문 근엄한 표정이다. 右手(우수)左手(좌수)를 덮고 있으며 손가락의 표현이 있다. 턱에 괴고 있으며 길다란 옷소매는 발목에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U’()형의 부드러운 衣紋(의문) 을 표현하였다. 좌측의 문인석은 안면이 흑황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墓表(묘표) 는 비좌와 비신 월두형으로 근래에 마련된 것이다. 비신의 비문은 前面(전면)에만 있으며 전면에 종4열로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知製敎淸白吏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文淸韓山李公秉泰之墓 贈貞夫人潘南朴氏? 贈貞夫人晋州柳氏?(통정대부홍문관부제학겸경연참찬관지제교청백리증자헌대부이조판서시문청한산이공병태지묘 증정부인반남박씨부좌 증정부인진주유씨부좌) ’의 비문이 있다.

참고문헌

京畿道(경기도), 京畿人物誌(경기인물지)(),1991.

비 고 : 경기도기념물 제116

[출처 : 성남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