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읊다
믿지를 못하겠네, 인간의 술이 가슴속 걱정을 풀어낸단 말 거문고 가져다가 한 곡조 타고 휘파람 길게 불며 언덕에 올라 천리 너머 먼 곳을 바라보자니 광야에는 쏴아 쏴아 몰려온 바람 현자도 바보도 끝은 같나니 결국에는 흙만두가 되어버리지 작은 이익 얼마나 도움된다고 소란스레 다투다가 원수 되는가 그 누굴까 내 마음을 알아줄 이는 머리 풀고 일엽편주 물에 띄우리.
不信人間酒(불신인간주) 能澆心裏愁(능요심리수) 呼琴彈一曲(호금탄일곡) 長嘯上高丘(장소상고구) 高丘千里目(고구천리목) 曠野風颼颼(광야풍수수) 賢愚同結束(현우동결속) 竟作土饅頭(경작토만두) 錐刀亦何利(추도역하리) 擾擾成釁讐(요요성흔수) 誰歟會心人(수여회심인) 散髮弄扁舟(산발농편주)
―신흠(申欽·1566~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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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한시(2012.7.30)이다. 안대회교수의 평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상촌(象村) 신흠이 세상일에 마음이 답답하여 소리 높여 시를 읊었다. 산다는 것은 이익을 놓고 아옹다옹 다투는 것으로, 남들과 갈등도 생기고 원수도 된다. 위의(威儀)를 지키며 인생을 살아가기란 정말 힘들다. 그런 인생이니 걱정도 분노도 많다. 술을 마시면 걱정을 던다고 말들 하지만 괜한 소리다. 높은 산에 오르고 광야에서 바람을 맞으면 조금 나을까? 아예 모든 걸 포기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떠난다면 풀어질까? 살다 보면 울분과 허무함이 불쑥불쑥 일어나니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賢愚同結束(현우동결속) 竟作土饅頭(경작토만두)
현자도 바보도 끝은 같나니 결국에는 흙만두가 되어버리지
무덤을 '토만두'='흙만두'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결국 토만두 될 것을 '작은 이익'으로 다투다가 원수되는가!
선조에게 영창대군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어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으니 답답도 하였으리!! | |
신흠[申欽]
조선 인조 때의 학자․문신(1566~1628).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개방적인 학문 태도로 양명학(陽明學)을 높이 평가했으며, 도승지,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파직되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면되어 영의정까지 올랐다. 문집으로《상촌집(象村集)》이 전해진다.[출처]백과사전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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