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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8월6일월요일 복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욕심을 부리려면-반신부

2012년 8월 6일 월요일[(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2-3).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일부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자신이 본 환시를 전하는데, 하느님의 모습은 지혜를 상징하는 백발로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의 아들’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넘겨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신다. 이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앞서 보여 주신 것이다(복음).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또는 2베드 1,16-19>
복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시자 얼굴 모습이 변하시고 옷은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시대, 곧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왔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평지가 일상생활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산은 외딴곳으로서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으로 가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을 닮아 거룩하게 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러 외딴곳으로 피정을 하러 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그분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신 것도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밖의 태양 빛을 받아 성당 안을 아름답게 비추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춘천 소양로 성당 내부 제대

 


2012-08-06 오전 1:08:12 조회수 54 추천수 1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 9,2-10



욕심을 부리려면



“어떤 개가 고기 한 첨을 물고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본 그 개는 그것이 더 큰 고기 덩어리를 물고 있는 다른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속의 개가 가지고 있는 고기를 빼앗으려고 덤벼듬과 동시에 자기 입에 물고 있던 고기 덩어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이솝우화) 이 이야기는 현재 가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좀처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에만 생각합니다.”(쇼펜하우어)


베드로 사도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옷은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3).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9,5)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체험을 영원히 간직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욕심을 부리려면 이런 욕심을 부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주님만을 차지하게 하소서”(예수아기의 성녀 데레사). 사실 주님은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데살5,5) 그러므로“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5,8) 분명한 것은 어떤 마전장이도 하얗게 할 없을 만큼 빛났다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빛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한2,3-4)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장소, 초막을 지어야 할 장소는 산 위가 아니라 베드로가 매일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물론 초막을 지을 재료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매일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활할 때 베드로와 우리가 머물 초막이 지어질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묵상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도 초막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삶의 연륜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고린3,18).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그러므로 다른 욕심은 접고 주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도록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