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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8월4일 토요일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2012년 8월 4일 토요일[(백)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성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는 성전에 예배하러 온 유다의 모든 이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전한다. 이 일로 예레미야는 사형당할 위기에 놓이는데, 아히캄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다(제1독서). 요한 세례자는 헤로데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충언을 하다가 그의 미움을 사고 만다.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헤로디아는 간계를 부려 결국 요한을 죽게 만든다(복음).

 

제1독서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1-16.24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오늘의 묵상

인간은 다른 이들과 연대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이에게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보여 줍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성인이 많은 죄인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르스의 성자’라 불리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아르스는 주민 2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거의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였지만, 세상사에 매달리거나 세상의 쾌락을 찾아 살기에 바빴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그 작은 마을의 본당 신부로 임명받습니다. 그는 아르스로 가는 도중에 만난 한 목동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게 아르스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나는 네게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겠다.”
비안네 신부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교회를 떠났던 신자들도 차츰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에게 전국에서 고해성사를 보러 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하루에 17시간 동안이나 고해성사를 주어야 할 정도였고,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이 1년에 2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성무일도』의 독서 기도에 나오듯이, 비안네 신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사람의 고귀한 과업이요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은 이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그는 기도와 극기와 사랑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행복을 찾는지 자문해 보았으면 합니다.

 

 

분당 요한성당 착한목자 예수상

 


2012-08-03 오후 12:47:11 조회수 77 추천수 1


8월4(토) 음6/17

聖 요한 마리아 비안네


요한 마리아 비안네(8.4)
성인명 요한 마리아 비안네(John Mary Vianney)
축일 8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아르스(Ars)
활동연도 1786-1859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장,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아르스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Lyon) 근교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 농부인
마태오와 마리 블루즈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안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5세 때에는 파리(Paris)에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안네는 어린 시절을 주로 부친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다.

정규 교육은 몇 개월밖에 받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비밀리에 첫 고해(1794년)와 첫영성체(1796년)를 받았다.
18세 때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Ecully) 본당 발레(Balley)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기초 교육이 부족하고 수학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특히 라틴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신학생이었던 비안네는
1809년에 징집을 당해 갖은 고통을 겪었다.
1811년에 베리에르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과정을 공부하고
1813년에는 리옹의 대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나,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퇴학당한 비안네는
학과 성적은 부족하였지만 발레 신부의 도움으로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신심과 성품을 인정받아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Grenoble)에서 시몽(Simon)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발레 신부가 있는 에퀼리 성당에서 2년 동안
보좌 신부로 생활한 비안네 신부는
1818년에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42년 동안이나 봉직하면서
주민들에게 열렬한 신심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비안네 신부의 노력으로 아르스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일신되었고,
그 또한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1827년부터 수천 명의 고해자들이 그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 아르스로 찾아올 정도였다.
매년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비안네 신부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오전 11시에 설교를 하고 성무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약 18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잘못 판단하고,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열심한 그 역시 가끔씩 사탄의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성품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충고는 간단명료하였으나
신심이 차고 넘쳤으며 직선적인 설교를 하였다.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는 열심한 성무에 지친 나머지 1859년 8월 4일
73세의 나이로 아르스에서 사망하였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가 된 비안네 신부는,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굿뉴스 가톨리 자료에서 발췌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는 성적 부진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평생 조그만 시골 본당을 성공적으로 지키신

위대한 사제 비안네 신부님


수도원을 다녀온 세 번 이외는 40년을 시골 아르스를 떠난 적이 없으나

늘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셨기에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님을 뵈러 모였으니

사랑하는 사제 성 비안네 님이시여,

본당 사제님들을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