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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8월 8일 수요일복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성 도미니코님

2012년 8월 8일 수요일[(백)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복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도미니코 사제는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설교의 사명을 수행하던 그는 1221년에 선종하였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유배당한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와 도시들이 재건되고 땅이 다시 경작되기를 바라신다. 이스라엘의 귀향은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을 고쳐 주신다. 예수님에 대한 가나안 부인의 겸손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1,1-7
복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여인들은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방인 여인들은 유다인들에게 더 큰 차별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하고 말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딸을 고치게 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을 보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들은 사회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는 것이 차별과 불평등의 이유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멸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도 예수님 시대의 이방인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차별과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넓고 깊습니다. 온갖 차별과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마음은 멍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아픈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 줄 사람은 먼저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분당 요한성당과 성모상

 

 


 

2012-08-07 오후 12:02:55 조회수 98 추천수 1


8월8(수) 음6/21

聖 도미니코



도미니코(8.8)
성인명 도미니코(Dominic)
축일 8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170-1221년
같은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기적


펠릭스 데 구즈만(Felix de Guzman)
아자(Aza)의 복녀 요안나(Joanna)의 아들인 성 도미니코(Dominicus)
에스파냐 북부 부르고스(Burgos) 지방의 칼라루에가(Calaruega)에서 태어났고,
1184-1194년 사이에는 팔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마도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 듯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Osma)에서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다.
또 그는 1203년에 오스마의 복자 디에고 데 아제베도(Diego de Azevedo, 2월 6일)
주교를 수행하여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가서
알비파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고, 시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Albigenses) 지역인 프루이유(Prouille)에서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1208년 교황대사 베드로 카스텔란이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세(Simon IV de Montfort)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성 도미니코는 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카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툴루즈(Toulouse)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에서 자신의 설교자회가
승인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음 해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로부터 승인을 받고
도미니코 수도회 일명 설교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성 도미니코는 수도회의 조직을 위해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회원이 새로 입회하면서 수도회도 정착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켜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수도회의 첫 번째 총회를 소집하였고,
그 이듬해 8월 6일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헝가리 순회 선교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일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성인이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도미니코 수도회를 설립하여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조화시키면서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큰 성공을 거두셨던

사제 성 도미니코 님이시여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가 부족한 이 시대에

젊은이들을 위한 등불이 되어 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