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오피니언 최우규 정치부 차장 입력 : 2012-08-16 21:17:38
11세기 영국은 북유럽 바이킹 데인족 출신 왕 ‘크누트 1세’의 폭정에 시달렸다고 한다. 런던에서 가까운 코번트리 영주 리어프릭(Leofric)도 데인족이었다. 그의 부인 고다이바(Godiva)는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족으로, 농민들의 고달픔에 가슴 아파하며 남편에게 세금을 깎아달라고 요청했다. 리어프릭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라. 그러면 세금 감면을 고려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고다이바는 번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농민들은 영주 부인의 헌신에 감동받았다. 그녀가 마을을 도는 순간 그 누구도 바깥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고다이바는 벌거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돌았다. 코번트리는 쥐죽은 듯한 적막과 의도적 무관심에 휩싸였다. 이 모습은 존 콜리어라는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가 그린 작품 ‘고다이바 부인’에 잘 묘사돼 있다. 고개를 푹 숙인 고다이바는 흰 알몸으로 붉은 마구를 씌운 말을 타고 간다. 문과 창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다.
모든 일에는 곡절이 있는 법. 양복 재단사 톰은 성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커튼을 들췄다. 알몸을 보려는 순간 그는 눈이 먼다. 신의 징벌이다. ‘관음증 환자’를 뜻하는 ‘Peeping Tom(엿보는 톰)’이 예서 유래했다. 이는 역으로 고다이바 헌신의 숭고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이 일화의 건너편에 한국 유력 정치인이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다. 박 후보는 14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 롤모델로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꼽았다. “파산 직전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럴 법도 하다. 어머니 앤 불린의 참수형, 언니 메리 1세 사후 25세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 최강국인 에스파냐 왕 펠리프의 구혼을 거절했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45년간 영국을 통치했다.
업적은 눈부시다.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를 잡았다. 빈민구제법을 실시하고 중상주의를 채용했다. 해상왕국 기초도 이때 이뤄졌다.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철학가이자 사상가인 프랜시스 베이컨,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의 활약 등 가히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요정 여왕(Faerie Queene)으로 불리던 그녀는, 처녀 여왕으로 생을 마감했다.
마르쿠스 헤라르츠가 그린 초상화는 절대군주의 위엄을 잘 나타낸다. 근엄한 흰색 궁정복을 목까지 채워 입고 있다. ‘그녀는 주지만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보복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되갚아줄 경우에 그녀는 권력을 증가시킨다’는 라틴어 명문이 초상화에 적혀 있다.
박근혜 후보도 20대 초반에 퍼스트 레이디를 경험하고, 결혼하지 않았다.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와 생애맞춤형 복지 등은 엘리자베스 1세의 빈민구제법 등 국민 사랑에 닿아 있다. 그러면서 여왕의 해상무역 확대, 중상주의는 새누리당의 주요 기조인 성장정책과 맞물린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임종 전 마지막 의회 연설에서 “나보다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아무리 백성을 사랑했어도, 결국 군림하고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실제 엘리자베스 1세는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권위로 인정받도록 하고, 전 국민에게 국교회 의식과 기도서 독경을 강제했다. 의회에는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하며, 강력한 사법·행정기능을 가진 추밀원 중심의 정치를 했다.
그렇잖아도 ‘공주’로 불리던 박근혜 후보는, 온몸을 호화로운 관복으로 꽁꽁 싸매고 추밀원 등 소수 의견을 수렴하며 절대권력을 누리는 여왕을 꿈꾸는 듯하다.
하지만 21세기 시민이 원하는 리더십은 내리사랑하는 절대군주보다는, ‘음험한 엿봄’조차 저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물심으로 헌신하는 고다이바가 아닐까.
고다이바 부인은 영주인 남편에게 세금감면을 요청하니...알몸으로 마을을 한바퀴돌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고다이바는 벌거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돌았다. 코번트리는 쥐죽은 듯한 적막과 의도적 무관심에 휩싸였다. 이 모습은 존 콜리어라는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가 그린 작품 ‘고다이바 부인’에 잘 묘사돼 있다. 고개를 푹 숙인 고다이바는 흰 알몸으로 붉은 마구를 씌운 말을 타고 간다. 문과 창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다...^-^
‘관음증 환자’를 뜻하는 ‘Peeping Tom(엿보는 톰)’은 커튼을 들춰 창밖을 본 양복 재단사 톰을 의미한다...그는 신의 징벌을 받아 눈이 멀었다고 한다...^-^
요정여왕...처녀여왕...엘리자베스1세...어머니 앤 불린의 참수형, 언니 메리 1세 사후 25세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 최강국인 에스파냐 왕 펠리프의 구혼을 거절했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45년간 영국을 통치했다...르네상스를 꽃 피운 왕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 "국민을 위하여, 국민에 의하여, 국민에 의한 정부"는 그 옛날 꿈같은 이야기 였던 것 같다...^-^
오늘날 신분제가 없는 지금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되겠다...^-^
- 2012년 8월18일 2시30분 -
신랑행차 1
신랑행차 2
신랑행차 3
메리 1세 [Mary I, ― 一世]잉글랜드 왕 브리태니커
적법한 왕위계승자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1553~58).
초기생애
헨리 8세와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메리는 어릴 때부터 동맹국이 될 만한 여러 군주들에게서 결혼신청을 받았으나 성사된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잉글랜드가 유럽 열강과 치열한 경쟁을 벌일 때 일종의 볼모역할을 했다. 학구적이고 총명한 소녀였던 메리는 어머니와 공작 신분의 여자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친척인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와 약혼했으나 카를은 메리에게 막대한 액수의 지참금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무시당하자 카를 5세는 즉시 파혼하고 더 이익이 될 만한 결혼상대를 찾았다. 메리는 1525년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또다른 약혼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러들로 성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아버지가 앤 불린과 재혼하면서 급속히 혼란에 빠졌다.
헨리 8세는 1520년대부터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할 계획을 꾸몄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죽은 형의 아내였으므로 그녀와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황은 헨리에게 캐서린과 이혼할 권리가 없다고 못박았고, 잉글랜드에서 이 이혼이 합법화한 뒤에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했다. 1534년 헨리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국교회를 세웠다. 캐서린과의 결혼을 근친상간으로 치부함에 따라 사실상 메리는 사생아가 되었다. 새 왕비가 된 앤 불린은 헨리에게 딸 엘리자베스(뒤에 여왕이 됨)를 낳아주고 메리가 부모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고, 어린 엘리자베스 앞에서 시녀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했다. 메리는 어머니 캐서린을 다시는 볼 수 없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편지를 교환했다.
앤 불린의 미움으로 메리는 끊임없이 처형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으나 그녀는 어머니의 용기와 아버지가 가진 불굴의 심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메리는 자신이 사생아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수녀원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해도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 뒤, 메리에게 자신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고 캐서린과의 결혼이 "근친상간에 따라 불법"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용서하겠다고 제의했다. 메리는 이를 거부하다가 카를 5세에게 설득되어 결국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을 깊이 후회했다. 헨리는 비로소 메리와 화해하고 그녀에게 지위에 어울리는 거처를 주는 한편 또다른 약혼계획을 세웠다. 메리는 헨리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의 아들 에드워드 왕세자의 대모가 되었다.
메리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주가 되었다. 미모는 아니었지만 노래 실력과 언어에 대한 소질이 뛰어나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딱지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으며 활동에도 심한 제약을 받았다. 여러 남자들이 청혼을 해왔으나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메리는 궁정으로 되돌아갔다. 여전히 사생아로 여겨졌지만 1544년에 이르러서는 에드워드를 비롯해 앞으로 헨리 8세에게 태어날 적법한 아이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얻었다. 에드워드 6세는 154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종교적 열정과 시기심 많은 고문들의 영향을 받아 예배할 때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메리는 개인 예배실에서 예전의 형식대로 미사를 올렸고 다시 한번 목숨을 잃게 될 위험에 빠졌다.
잉글랜드 여왕시절
1553년 에드워드가 죽고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올라 며칠 동안 여왕으로 인정받게 되자 메리는 노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정당한 군주는 메리였으므로 며칠 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런던으로 돌아왔다. 이제 37세의 중년에 이른 메리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으며 아버지 헨리 8세처럼 강인하고 진지했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잔인한 형벌과 사형집행장에 서명하는 것을 싫어했다.
메리는 새로 왕위에 오른 여왕으로 신중하게 처신을 해야 함에도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가운데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다. 고문들 대부분이 왕가의 혈통을 지닌 그녀의 사촌 데번 백작 코트니를 결혼상대로 천거했으나 메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기보다 11년이나 연하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할 결심을 했다.
헨리 8세가 가톨릭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함에 따라 재산과 토지를 얻은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그들의 부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으려는 메리의 열망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의회도 메리가 스페인 왕과의 결혼 포기를 청원하는 의원들에게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다"라며 무례하게 대한 일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다.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이 확실해지자 1554년 토머스 와이엇 경이 이끄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색인:개신교). 와이엇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빠르게 진격해오자 이에 놀란 메리는 훌륭한 연설을 통해 수천 명의 군중을 선동해 반란군에 맞섰다. 패한 와이엇은 처형당했고 메리는 펠리페와 결혼해 가톨릭을 복귀시키고 이단 처벌법을 부활했다. 그뒤 3년 동안 반란자들의 머리가 교수대에 걸렸고 이단자들은 쉴 새 없이 처형당했다. 그 가운데 300여 명은 화형을 당했다. 이 때부터 메리는 '피의 메리'라고 불리며 미움을 받았으며 그녀의 스페인 출신 남편은 불신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메리 자신은 악독한 살육으로 비난을 받았다. 메리는 국민의 뜻과는 달리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가 패해 잉글랜드가 유럽에서 갖고 있던 마지막 발판인 칼레를 잃었다.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고 건강 역시 좋지 않아 비탄에 빠진 메리는 몇 차례의 상상임신으로 더 낙담했다. 그녀는 1558년 11월 17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와 함께 그녀가 추구했던 모든 것도 함께 묻혔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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