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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시험에 떨어지고―장유(張維·1587~1638)/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2장

 

입력 : 2012.09.03 22:33

시험에 떨어지고
送張生希稷下第後歸海西婦家
(송장생희직하제후귀해서부가)

책 보따리 달랑 들고 부모 곁을 떠났건만
객지에서 고생 끝에 실의하여 돌아가네
과거에 급제 못한 오늘의 한 어찌 풀까
고향의 박 넝쿨은 이태 넘게 못 보았네
자넨 시름겹게 바다의 달만 보며 가고
나는 구름 조각 떠가는 강하늘만 응시하네
그래도 눈물 마른 규방의 아내가 안쓰러워
또다시 베를 잘라 귀향 편지 쓰게 하랴

 

獨携書笈別親闈(독휴서급별친위)
久客偏憐眊矂歸(구객편련모조귀)
攀桂可堪今日恨(반계가감금일한)
敦瓜嬴得隔年違(돈과영득격년위)
愁邊海月團團影(수변해월단단영)
望裏江雲片片飛(망리강운편편비)
却想秋閨粧淚盡(각상추규장누진)
何心更斷錦文機(하심갱단금문기)

―장유(張維·1587~1638)

 

 


 

잘찍어1,000년 넘는 과거시험...예나 이제나 신분상승과 출세의 지름길...공부! 시험! ...윽~ 머리가 지끈지끈!

 

조선문학의 4대가~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장유(張維)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한시(2012.9.4)이다. 안대회교수의 평이다.

 

조선 중기의 명신 계곡(谿谷) 장유가 과거 시험에 떨어지고 처가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써준 시다. 원래는 '시험에 떨어지고 황해도 처가로 돌아가는 장희직을 배웅하다'란 긴 제목이다. 1000년 이상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 제도가 유지되었기에 출세하려면 과거 시험이란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때도 과거 시험 공부의 최적지는 서울이라, 몇 해 동안 객지 생활을 했으나 보람도 없이 낙방하고 말았다. 어떤 위로도 그에게 힘이 되지 못하겠지만 장유의 시는 그의 눈물샘을 자극할 것 같다. 책 보따리 달랑 들고 시험에 매달린 사람들이 서울 하늘 아래는 지금도 많다.

 


 

장유 [張維]

1587(선조 20)~ 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이듬해 겸설서(兼說書)를 거쳐 주서(注書)·검열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후 대사간·대사헌·대사성을 지내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다음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했고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다.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었으며, 1631년 딸을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에게 출가시켰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공조판서로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했다.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母親喪)으로 끝내 사직했으며 장례 후 과로로 죽었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에 능통했고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다.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정묘호란 때 거의 분실되고 〈계곡만필 谿谷漫筆〉·〈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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