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시조·성가·기도문

가정―이상(1910~1937)/북촌한옥마을 한옥대문 3장

 

家庭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여달렸다. 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이상(1910~1937)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2012.9.7)이다. 장석남교수의 평이다.

 

우리 근대문학의 영원한 첨단이 이상(李箱·본명 김해경)이다. 그 천재와 실험과 슬픔까지도 그렇다. 큰 뜻을 세웠으나 당시로써는 불치병인 폐결핵을 얻어 남은 생애의 기념비로서나 남기려는 뜻으로 치열히 써 모은 시와 산문들은 어쩌면 신(神)과 서러움과의 대결이었으리라. 당대 예술의 첨단을 알았던 그는 끝까지 서러움을 노골화하지 않았고 실험의 가면을 벗지 않은 채 문학을 갑옷 속에 감추었다.

띄어쓰기도 되어 있지 않아 얼핏 불친절한 듯한 시(詩)지만 읽을 때마다 나는 애잔한 마음으로 눈물이 괼 지경이다. 집안으로 들어설 수 없는 이 영혼을 보라. 이승과 저승의 언저리를 헤매는 영혼이다. '문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란 까닭'이라는 슬프고 정직하고 정확한 진단 아래 아름다운 독백과 서정이 번갈아 펼쳐진다. 혼(魂)만 남은, 이승의 생(生)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의 제 이름자 적힌 문패 앞에서 곤경의 풍경은 통곡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하다. '수명을 헐어'서라도 할 만했던 그 문학의 시대를 생각해본다.

이상 [李箱]

1910. 9. 14 서울~ 1937. 4. 17 도쿄[東京].

시인·소설가.

 

실험정신이 강한 시를 써오다가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아버지 연창(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의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때부터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큰집에서 살았는데, 권위적인 큰아버지와 무능력한 친부모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런 체험이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불안의식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

 

1927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현상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는 등 그림과 도안에 재능을 보였다. 1933년 각혈로 퇴직한 후 황해도 백천온천에서 요양하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금홍을 만났다. 그뒤 다방 '제비', 카페 '쓰루', 다방 '식스나인' 등을 경영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34년 김기림·이태준·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했으며,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한 뒤, 그해 9월 도쿄에 건너갔다가 1937년 2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감금되었다. 이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1937년 4월 17일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죽었다. 그의 문학사적 뜻을 기리기 위해 문학사상사에서 1977년 '이상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한옥대문 1

 

북촌한옥마을 한옥대문 2

북촌한옥마을 한옥대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