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1.경복궁
명칭 경복궁(景福宮)
분류 궁
지정사항 사적 제117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이 궁은 4개 궁궐 중에서 가장 먼저 영건되고 또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궁지(宮址)는 대체로 고려 3경 중의 하나인 남경의 궁궐자리로 인정되는데, 이보다 좀 더 남쪽으로 넓은 터에 옮겨 지어진 것 같다.
궁의 면적은 126,000여 평, 담의 높이는 20자 1치, 둘레 1,813보(1보는 6척)의 규모였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을 각각 배치하였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은 조하(朝賀)를 받던 곳이며, 역대 국왕 가운데 정종 · 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 · 중종 · 명종 · 선조 등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궐내에 산재하고 있는 건물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경회루(慶會樓)로서 본래 태조 때에는 작은 누각에 불과하였던 것을 태종 12년에 신축하여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명종 8년(1513) 9월에 내장고(內藏庫)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편전 (便殿)인 사정전(思政殿)으로부터 그 안쪽에 있던 경녕전(慶寧殿) · 흠경각(欽敬閣) 등 태조 때 이래의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으므로 이 해 9월에 다시 재건하였다가 그 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회신(灰燼)되어 버렸다.
이로부터 270여 년 간 경복궁은 황폐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고종 2년(1865)에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왕실의 존엄을 높이고 자기의 권세를 국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경복궁 중건계획을 발표하고 영건도감(營建都監)을 두어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찬반의 의견이 서로 엇갈렸으나 대원군이 반대를 무릅쓰고 중건을 강행하였다.
거창한 이 공사는 그 진행 과정에서부터 양반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체 국민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끝내 경제적인 파탄을 초래하여 대원군 정권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궁궐 개요)
사적 117호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6
창건시기 : 1395년 (태조 4년)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근정전(223호), 경회루(224호)
- 보물 : 자경전(809호), 자경전 십장생굴뚝(810호), 교태전 아미산굴뚝(811호), 근정문과 행각(812호),
풍기대(847호)
현 면 적 : 126,337 평 (416,990㎡)
2.경희궁
명칭 경희궁지(慶熙宮址)
분류 궁
지정사항 사적 제271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
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敬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私邸)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왕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慶德宮)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거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同音)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 회상전(會祥殿) · 흥정당(興政堂) ·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이치되어 최근까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3.창경궁
명칭 창경궁(昌慶宮)
분류 궁
지정사항 사적 제123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1 창경궁
이 궁은 옛날 고려 때 수강궁(壽康宮) 터로서 세종 원년에 잠시 상왕 태종이 거처한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기에 본격적인 궁궐이 시설된 것은 성종 14년(1483)의 일이다.
성종은 당시 생존해 있던 조모 정희왕대비(貞熹王大妃, 세조비) · 모후인 소혜왕후(昭惠王后, 덕종비) · 양모(養母)인 안순왕후(安順王后, 예종 계비)를 위해 왕의 정궁인 창덕궁과 가까운 수강궁 터에 새 궁궐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창경궁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초부터 중수가 진행되어 왔는데, 대간(臺諫)들의 공사 중지 요청이 있었고 또 반역음모설로 인한 옥사가 자주 일어나 일시 공사가 정지되었다. 그러다가 광해군 7년 4월에 왕이 정릉동 행궁(行宮)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이어(移御)하면서부터 창덕궁 영건의 공사에 다시 착수하였다. 그러자 정원(政院)과 대간에서 재차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 시기에 궁궐을 영선(營繕)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주장이 비등하였는데, 왕은 이를 무시하고 역사를 강행하여 왕 8년(1616) 11월에 이르러 드디어 중수(重修)가 완결되었다.
그 후 인조반정이 있은 다음 반정공신의 1인인 평안병사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이 반군에 함락되자 왕실과 조정은 창황히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 때 무뢰악소배(無賴惡小輩)들이 왕궁으로 난입하여 물건을 도둑질하고 불을 질러 통명전(通明殿) · 환경전(歡慶殿) · 양화당(養和堂) 등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는데, 난이 진정된 이후 다시 중수되었다.(1619)
그 뒤 순종 융희 원년(1907) 11월에 왕실의 오락장 · 동물원 · 식물원 등이 궁내에 병설되어 창경궁은 창경원(昌慶苑)으로 개칭되었다. 동년에 원내(苑內)의 권농장(勸農場) 터에 못을 파고 춘당지(春塘池)라 하였으며, 1911년에는 못의 북쪽에 일본식 건물인 수정 (水亭)을 세우고, 이보다 2년 앞에는 그 뒤쪽에 식물원을 설치하여 주로 열대식물을 심었다. 그리고 옛 보루각지(報漏閣址)의 부근에는 동물원을 꾸며서 서울의 명소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현재 동물원과 식물원의 시설은 경기도 과천에 서울대공원이 설치되면서 그곳으로 이전하였으며, 창경궁은 복원공사가 완성되어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궁궐 개요)
사적 123호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1
창건시기 : 1484년 (성종 15년)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명정전(226호)
- 보물 : 홍화문(384호), 명정문과 행각(385호), 옥천교(386호), 통명전(818)호, 풍기대(846호), 관천대(851호)
현 면 적 : 6만5천평 (222,657.9㎡)
4.창덕궁
명칭 창덕궁<후원포함>(昌德宮<後苑包含>)
분류 궁
지정사항 사적 제122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이 궁은 태종이 즉위하여 한양천도 문제가 거론되면서부터 건립하기 시작한 이궁(離宮)으로 출발하였다. 이궁인 창덕궁은 태종 4년 10월 6일 왕명에 의하여 영건(營建)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역은 이궁조성도감제조(離宮造成都監提調) 이직(李稷) 등의 설계와 감독으로 진행되었다.
이미 태조가 건립한 경복궁(景福宮)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이궁을 신축한 이유는 역시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본궁에 대한 피방(避方)의 처소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피방이란 흉을 피하여 길의 방향으로 잠시 자리를 옮긴다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관념이다.
건설중인 창덕궁의 역사(役事)를 돌아보고 준공도 되기 전에 이궁의 정전에서 청정(聽政)을 하기도 하였다. 이 궁이 준공된 것은 공사를 명한 지 만 1년이 지난 태종 5년 10월이었다.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한 지 10일 후인 10월 20일에 왕이 새로 단장된 신궁에 입어(入御)하게 되었으니 이 날은 바로 환도와 신궁의 낙성 축하가 서로 겹치는 격이 되어 한양성내의 시민들은 경축의 기분으로 온통 충만되어 있었다.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으로 여기서 다시 인정문(仁政門)을 거치면 수조정전(受朝正殿)인 인정전(仁政殿)에 당도하는데,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 순조 · 철종 · 고종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동쪽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을 비롯하여 수십 채의 전각 · 누정 등 건축물이 궐내에 산재해 있었고, 그 중의 대조전(大造殿)은 왕비가 거처하는 정당(政堂)으로서 역대 국왕 중 여기서 탄생하고 승하한 왕이 많았다.
창덕궁의 후원 약 62,000평이 지금의 이른바 비원(秘苑)으로 경복궁의 남성적 장려함에 비하여 창덕궁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자랑하고 있다. 창덕궁은 후원을 합하여 약 15만여 평으로 면적은 경복궁보다 넓으나 그 궁궐의 규모는 경복궁에 비할 수는 없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에 화재를 입었으나 광해군초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 뒤로도 대소의 화재가 여러 번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곧 중수, 개축되어 전각의 수에는 증손(增損)이 심한 편이었다. 창덕궁은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정궁으로 사용되어 국왕이 상주한 기간이 가장 길었던 궁궐이었다.
(궁궐 개요)
사적 122호 ※ UNESCO 세계문화유산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1번지
창건시기 : 1405년 (태종 5년)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인정전(225호)
- 보물 : 돈화문(383호), 인정문(813호), 선정전(814호), 희정당(815호), 대조전(816호), 구선원전(817호)
현 면 적 : 135,212.1평(446,983㎡)
5.운현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가(私家).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운니동 98-50
시대 : 조선시대
면적 : 9,413.2㎡
분류 : 궁지
사적 제 2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운현궁은 조선 말기를 표하는 건물로 당시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이용되던 곳이다.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12세 되던 해까지 머물던 장소이며, 명성황후가 세자빈으로 임명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그 후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을 증축하여 명실상부한 궁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 민씨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봉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여기에서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다.
내부에는 궁궐과 운현궁 사이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고종이 사용하던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이 이용하던 공근문을 포함한 4개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운현궁의 노안당 현재는 궁의 규모도 축소되어, 대원군이 즐겨 찾던 아재당은 헐리고 궁의 일부가 덕성여대 교사와 현 중앙문화센터로 쓰이게 되면서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이로당, 노락당 만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최고의 권력가들이 모여 개혁정치를 도모했던 운현궁은 이제 그 어디에서도 그런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는 소규모의 사적으로 남아있지만 유물전시관을 비롯해 고종, 명성황후 가례 재현행사, 국악공연 등의 문화행사가 끊이질 않는 시민들의 전통 문화 교육장으로서 큰 몫을 하고있다.
6.종묘
세계 문화유산지정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봄·여름·가을·겨울과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봄·가을과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교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이 배어 있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7. 칠궁
조선시대 7명의 왕 또는 추존왕의 모친을 모신 사당.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다. 원래 이 자리는 1724년(경종 4) 8월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후궁 출신의 빈(嬪)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봉사(奉祀)의 은전을 받지 못한 그의 모친 최숙빈(崔淑嬪)을 추념하여 사당을 짓고 봉사한 육상궁(毓祥宮)이 있던 곳이었다. 그 후 국운이 기울어진 1908년(융희 2), 각 묘전(廟典)의 제전(祭典)을 간소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 또는 추존왕의 사친(私親:모친)을 모신 다섯 사당을 이곳에 옮겨 육궁(六宮)이라 하였고, 이후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 은(垠)의 생모인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사당을 이곳에 옮겨 칠궁이라 하였다.
제 1궁 육상궁(毓祥宮)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
1966년 3월 22일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2만 5791㎡인 궁지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에 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하면서 생모(生母)를 기리기 위해 묘를 지었는데, 지을 당시에는 숙빈묘라 이름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육상묘로 개칭하였으며, 1753년(영조 29)에는 육상궁으로 승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는 영조의 화상 두 폭을 봉안하였다. 1882년(고종 19) 8월 불이 나서 궁이 소실되자 이듬해 다시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1908년(융희 2) 7월 23일 예절이 번거로우면 본뜻을 잃는다는 황제의 조칙(詔勅)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궁들을 합설(合設)하였다. 이에 따라 원종(元宗)의 어머니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묘인 저경궁(儲慶宮), 경종(景宗)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묘인 대빈궁(大嬪宮), 정종(貞宗)의 어머니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묘인 연우궁(延祐宮), 장조(莊祖)의 어머니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묘인 선희궁(宣禧宮), 순조(純祖)의 어머니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묘인 경우궁(景祐宮) 등 5궁의 신위(神位)를 육상궁에 함께 봉안(奉安)하면서 육궁(六宮)이라 하였다. 5궁이 육상궁에 합쳐지면서 연우궁을 제외한 4궁의 건물과 토지는 모두 국유(國有)로 되었다. 1929년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淳嬪嚴氏)의 신위를 봉안함에 따라 칠궁(七宮)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현재 육상궁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묘우(廟宇)가 있고, 그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이 있으며, 육상궁 왼쪽에는 네 개의 묘우가 독립하여 있다. 육상궁을 비롯한 7궁은 조선 후기 왕실의 후궁들 가운데 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건물이다.
제 2궁 저경궁(儲慶宮)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仁祖의 아버지)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사당
원래는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의 생부인 추존왕(追尊王) 원종(元宗)의 구저(舊邸)이자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로, 지금의 중구 남대문로 3가에 해당하는 남부 회현방(會賢坊) 송현(松峴)에 있었다.
이름 역시 송현궁(松峴宮)이었는데, 1755년(영조 31) 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김씨(敬惠裕德仁嬪金氏)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하면서 저경궁으로 고쳤다. 그러다 1870년(고종 7) 경우궁(景祐宮)의 별묘로 위패를 이안(移安)하였다가, 1886년 경우궁이 옥인동으로 이건되면서 함께 옮겨졌다.
1908년(순종 2) 다시 인빈의 위패를 궁정동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으로 이안하였는데, 이후 궁의 원래 건물은 1927년까지 남아 있다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를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궁의 정문과 하마비(下馬碑)는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뒤뜰에 보존되어 오다가 1933년 정문은 철거되고, 하마비만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정면 3칸에 기둥은 네모 기둥이며, 전각의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 모양의 쇠서받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1번지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궁 7명의 위패를 봉안한 칠궁(七宮)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제 3궁 대빈궁(大嬪宮)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영조의 이복형)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당
1722년(경종 2)에 건립되었다. 희빈 장씨는 같은 칠궁(七宮) 안의 육상궁(毓祥宮)에 봉안되어 있는 숙빈 최씨(淑嬪崔氏)와 마찬가지로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비시키고, 후궁으로는 유일하게 왕후에까지 올랐다가 5년 만에 다시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후 1722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동시에 대빈궁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신주가 봉안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낙원동에 해당하는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에 있었으나, 1870년(고종 7) 육상궁으로 옮겼다. 이어 1887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가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육상궁에는 6명의 후궁 신주만 봉안되어 있어 육궁(六宮)이라고 하다가 1929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을 옮겨오면서 지금과 같이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목조건물로, 건축 기법은 칠궁의 다른 건물과 비슷하지만, 기둥이 모두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어 좀더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제 4궁 연우궁(延祐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사당으로 현재 신위는 육상궁에 합사
정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소원(昭媛)이 된 뒤 1719년(숙종 45) 효장세자(孝章世子)를 낳았는데, 이가 곧 뒷날 왕으로 추존된 진종(眞宗)이다. 1721년(경종 1) 세상을 떠난 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빈(嬪)에 봉해졌다.
연우궁은 바로 이 정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유길원(綏吉園:사적 359)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진종을 왕으로 추존하면서 위패를 봉안한 궁호(宮號)를 연우궁이라 하고, 1778년(정조 2) 경복궁(景福宮)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세웠다. 이곳은 육상궁(毓祥宮)과 가까운 곳으로, 1870년(고종 7) 육상궁 건물 안에 합사되어 오늘에 이른다.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1번지 칠궁(七宮) 안에 있으며, 육상궁 건물에 합사되어 있는데, 왼쪽이 육상묘이고, 오른쪽이 연우궁이다.
제 5궁 선희궁(宣禧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사당으로 현재 신위는 경우궁에 합사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인 1764년(영조 40)에 건립되었다. 원래 영빈 이씨의 시호(諡號)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쳤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新橋洞)에 해당하는 한성(漢城)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었다. 이후 1870년(고종 7)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으로 옮겼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궁터(서울시유형문화재 32)가 신교동에 남아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경우궁(景祐宮) 묘사(廟祀) 안에 합사되어 있다. 목조건물로, 내부 제단의 투각이 뛰어나며, 제단이 단색 옻칠로 되어 있어 칠궁의 다른 제단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단출한 것이 특징이다.
제 6궁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사당
임금의 생모라도 정실 왕후가 아니기 때문에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 따로 모신 별묘(別廟)로, 1824년(순조 24) 북부 양덕방(陽德坊:桂洞 전 휘문고교 교정)에 사당을 짓고, 그해 12월 궁호(宮號)를 경우궁이라 하여 위패를 모셨다.
1884년(고종 21) 10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에 의하여, 경우궁에 일시 강제로 이어(移御)한 고종은 여기에서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戚臣)들이 참살당하는 곤욕을 겪은 후, 이듬해인 1885년 경우궁을 인왕동(현 玉仁洞)에 옮겨 짓도록 명하였고, 국운이 기울어지고 일제의 세력이 궁중에 범람할 무렵인 1908년(융희 2)에는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에 저경궁(儲慶宮:元宗의 생모궁)·대빈궁(大嬪宮:景宗의 생모궁)·연우궁(延祐宮:眞宗의 생모궁)·선희궁(宣禧宮:사도세자의 생모궁)과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위패를 함께 봉향하여 6궁(六宮)이라 하였으며, 1929년 이은(李垠)의 어머니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덕안궁(德安宮)을 합하여 7궁이 되었다.
제 7궁 덕안궁(德安宮)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의 사당
1903년(고종 40)에 건립되었다. 순헌황귀비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어머니로, 1897년에 영친왕을 낳으면서 귀인으로 책봉된 뒤, 1903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았다.
이 때부터 경운궁(慶運宮) 안의 명례궁(明禮宮) 터에 경선궁(慶善宮)을 세우고 이 곳에서 살다가 1911년 7월 사망한 뒤 이름을 덕안궁으로 고쳤다. 이후 1913년 지금의 태평로1가에 새로 궁을 짓고, 엄비의 묘우(廟宇)라 하여 궁 이름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1929년 7월 덕안궁을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 현재는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육궁(六宮)이라 하다가 이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비로소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정면 3칸의 목조건물로, 앞 툇간이 틔어 있으며, 네모 기둥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앙에 화려한 무늬로 투각된 제단과 위패가 놓여 있고, 측면은 중방 아래까지만 벽돌을 쌓았으며, 뒷면은 상방까지 벽돌을 둘러 쌓았다. 사당 앞 서쪽에 남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안청(移安廳)으로 쓰이는 부속건물이 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경비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중구**
1.덕수궁
지정번호 : 사적 제124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중구 정동 1-23
덕수궁은 원래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光海君)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고쳐부르고 7년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만을 거처케 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西宮)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廢位)되고, 인조(仁祖)가 이곳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고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別宮)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 황제(高宗 皇帝)가 러시아 왕관에 있다가 환궁(還宮)하면서 이곳을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純宗)에게 양위(讓位)한 후, 왕궁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 황제의 장수(長壽)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이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아가셨다. 덕수궁에는 지난날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18,635평의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大漢門), 중화전(中和殿), 광명문(光明門), 석어당(昔御堂), 준명당(浚明堂), 즉조당(卽祚堂),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및 석조전(石造殿) 등이 있다. 덕수궁은 특히 구한말(舊韓末) 비운의 황제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돌아가심으로 3.1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2.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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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사적 제10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 2가 105
광희문(光熙門)은 속칭 수구문이라고도 하며 조선 태조(朝鮮太祖) 5년(1396)에 건립한 서울성곽의 8문중의 하나이다. 1915년경에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霓)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대로 수축(修築)할 때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3.남대문 (숭례문)
지정번호 : 국보 제1호
시대 : 조선 태조7년(1398)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7년(1398)에 처음 건립된 후 세종 30년(1448) 크게 고쳐 지었다. 이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 제1호로 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아래 위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편액의 필자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로 쓰여 있으나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있는 것은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불꽃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현존하는 성문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전형적인 다포(多包)양식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한국 건축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
4.장충단비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
시대 : 광무 4년(19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197(장충단공원 내)
이 비(碑)는 대한제국 때 을미사변(乙未事變)·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순사(殉死)한충신·열사를 제사지내던 장충단(奬忠壇)의 비이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지 5년 후인 1900년 9월 고종은 남소영(南小營)에 장충단을 꾸며 사당과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을미사변 때 돌아간 장병들의 영혼을 모셔두어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主神)으로 삼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등 장병들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의견에 따라 다음 해에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하여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함으로써 문무(文武)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에 제사하는 신위에 포함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군악이 연주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당과 부속건물은 파손되었으나 현재 장충단비가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 내에 있던 것을 1969년 현위치로 옮겼다. 비의 "장충단(奬忠壇)"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5.성제묘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번지 96호
성제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운장(雲長) 관우(關羽)를 받드는 곳이다. 남묘(南廟)·동묘(東廟)와는 달리 임진왜란(1592) 이후 민간인에 의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일제 때 이 터의 일부를 팔았기 때문에 좁아졌다고 하며, 1974년 10월에 서울시에서 부분적으로 해체, 보수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9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원래는 관우부부를 추모하는 제사였으나 현재는 동제(洞祭)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사당은 조선시대의 민간신앙 및 의식구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6.숭정전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시대 : 조선 광해군 8년(1616)경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3가 26번지 1호(동국대학교내)
이 건물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서 광해군 8년(1616)경에 건립되었다. 숭정전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정령(政令)을 반포하던 곳인 만큼 남향으로 놓였으며, 경희궁 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었다. 건물주변에 4개의 출입문이 조성되어 있었다. 남에 숭정문(崇政門), 동남에 건명문(建明門), 동에 여춘문(麗春門), 서에 의추문(宜秋門)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후전(後殿)인 자정전(資政殿)의 정문인 자정문(資政門)이 있었다. 주위에는 사방에 행각(行閣)을 두르고 앞뜰에는 돌을 깔고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2중 기단(基壇)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을 앞면6개, 옆면5개 배열하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가로 5칸, 세로 4칸 규모로 평면을 구성하였다. 순조 29년(1829) 경희궁의 대화재 때에도 숭정전은 피해를 면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3월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로 이건(移建) 되었으며, 1976년 9월 동국대학교 안 정문 옆으로 이전되어 정각원(正覺院)이란 현판을 걸었다. 숭정전은 17세기의 궁궐 목조 건축 전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과 함께 조선중기의 목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덕수궁(조선) 전경, 사적 제124호, 서울 중구 정동
사적 제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령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및 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大安門)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중앙에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전의 뒷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으며,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령전이 있다. 함령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이 있으며,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전인 중화전의 주위에 회랑이 없어 다른 궁궐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현재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중화문·함령전·즉조당·준명당(浚明堂)·석어당·덕홍전과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과 정관헌 등이 남아 있다. 서양식으로 세워진 석조전과 정관헌은 주변의 한식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건축양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의 본래 모습이 상당히 손상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로 본래 일반사가의 집을 궁궐로 꾸몄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덕수궁석조전
석조전(1910), 덕수궁에 있는 근대서양식 건축물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설계는 영국인 G.R. 하딩이,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공사감독은 한국인 심의석(沈宜碩),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M.H. 데이빗슨 등이 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정관헌
정관헌(1900 이전), 전통목조건축 요소와 서양적인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
덕수궁 안에 있는 양관(洋館) 가운데 하나. 함령전 북쪽에 있으며 190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종의 연유(宴遊)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양옥이라고는 하나 팔작지붕 등 전통목조건축의 요소가 많이 있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바깥두리기둥은 처마를, 안두리기둥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지붕은 안두리기둥이 받치는 부분까지만 팔작지붕을 씌우고 바깥두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분은 지붕을 덧달아내어 퇴를 만들었다. 안쪽의 독립기둥은 기둥 밑부터 기둥 머리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기둥 머리는 둔중한 느낌을 주는 로마네스크풍으로 만들었다. 베란다에 두른 나무기둥과 처마장식 및 동제 난간이 매우 정교하다. 전체적으로 전통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건물로서 근대 서양식 건축의 도입을 보여주는 건물로 주목된다.
덕수궁중화전
중화전(1905 중건), 덕수궁의 정전, 보물 제819호
덕수궁의 정전.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궁궐 중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정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이던 것이 1층이 되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높은 2층 월대 위에 세워졌다. 기단에 회랑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남쪽 계단 앞에는 품계석(品階石)이 각각 12개씩 배열되어 있다. 원형 주좌의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올린 다포계로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궁궐건축의 상례를 따르고 있다. 외부 살미첨차는 3중으로 앙서를 조작하였고, 기둥머리에는 후기 건물에서 흔히 쓰는 안초공(按草工)을 두어 기둥머리의 허전함을 덜고 있다. 가구(架構)는 2중량 구조이며 2개의 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있다. 뒷줄에 있는 고주 사이에 어좌(御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닫집을 설치하였는데 닫집의 천장에는 쌍룡(雙龍)이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 시대의 덕수궁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1896년, 경복궁에서 아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이 때, 태후와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초상화(어진:御眞)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궁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 비로소 아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 :옮겨가 사는 일)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어서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건립되었고 이 해에 고종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광무 4년(1900)에 궁성(宮城)을 쌓는 일이 모두 끝났고 같은 해 봄에 발전 시설이 되어 궁내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광무 9년(1905)에는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 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완성되었다. 6년 2월엔 국가예산 31만 5천원으로 법전(法殿)인 중화전 창건공사가 시작되어 10월에 완공되었다. 광무 8년(1904)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침전인 함녕전을 수리하다가 실화한 것이 강풍을 타고 옮겨 붙어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중심곽 건물과 그 곳에 비치되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급한대로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응급, 복구되었다.
ㅁ 덕수궁 명칭변경
순종은 즉조당에서 즉위하고는 곧 창덕궁으로 옮겨가고서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하였다. 융희 3년(1909)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다. 조선조의 마지막 건축 공사였다. 고종이 1919년 함녕전에서 붕어(崩御)하면서 덕수궁도 다른 궁과 마찬가지로 궁으로서의 수명이 끝이 난다. 일제시대에 대부분이 철거되고 궐역도 축소되어 지금 현재 덕수궁의 면적은 18,635평이며 궐내에는 정문인 대한문과 외전 건물인 중화문, 중화전, 덕홍전, 내전건물인 함녕전,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그리고 광명문 그 외에 정관헌, 석조전 등 다수의 양식 건물들이 산만하게 남아 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백성들에 의해 궁궐들이 모두 불태워진 바람에 머무를 궁이 없어서 겨우 정릉동에 위치하고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에 임시 행궁을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은 제 15대 왕 광해군은 창덕궁 복구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 곳에 머물다가 광해군 3년(1611) 10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이때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해군은 그 해 12월에 다시 경운궁으로 옮겨 7년(1615) 4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기까지 이 곳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경운궁은 처음으로 궁다운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인다.
대한제국 시대의 덕수궁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1896년, 경복궁에서 아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이 때, 태후와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초상화(어진:御眞)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궁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 비로소 아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 :옮겨가 사는 일)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어서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건립되었고 이 해에 고종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광무 4년(1900)에 궁성(宮城)을 쌓는 일이 모두 끝났고 같은 해 봄에 발전 시설이 되어 궁내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광무 9년(1905)에는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 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완성되었다. 6년 2월엔 국가예산 31만 5천원으로 법전(法殿)인 중화전 창건공사가 시작되어 10월에 완공되었다. 광무 8년(1904)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침전인 함녕전을 수리하다가 실화한 것이 강풍을 타고 옮겨 붙어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중심곽 건물과 그 곳에 비치되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급한대로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응급, 복구되었다.
ㅁ 덕수궁 명칭변경
순종은 즉조당에서 즉위하고는 곧 창덕궁으로 옮겨가고서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하였다. 융희 3년(1909)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다. 조선조의 마지막 건축 공사였다. 고종이 1919년 함녕전에서 붕어(崩御)하면서 덕수궁도 다른 궁과 마찬가지로 궁으로서의 수명이 끝이 난다. 일제시대에 대부분이 철거되고 궐역도 축소되어 지금 현재 덕수궁의 면적은 18,635평이며 궐내에는 정문인 대한문과 외전 건물인 중화문, 중화전, 덕홍전, 내전건물인 함녕전,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그리고 광명문 그 외에 정관헌, 석조전 등 다수의 양식 건물들이 산만하게 남아 있다.
해방 후의 덕수궁
해방 후 1960년 대 들어서 덕수궁은 또다시 수난을 당한다. 태평로 일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이 허물어져 나갔고 대한문으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6m 안쪽으로 도로를 넓히면서 담장을 허물고 돌담 대신 철책으로 다시 담장을 친 것이다. 이 철책은 당시 관리들의 과오를 바로 잡는데 까지는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됬다. 당시 서울시는 덕수궁을 도시민의 공원, 놀이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궁내에 스케이트 장을 만들고, 벤치를 놓는가 하면은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 담장을 철책으로 만든 것도 길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알량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이후 담장은 원래의 사고석 담장으로 복원되고 궁 내부도 어느 정도는 정화되었으나, 선조 이래 갖추고 있었던 궁궐의 면모를 지금으로선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덕수궁은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규모엔 미치지 못하지만은 파란만장하였던 한말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리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궁궐이라고 하겠다.
덕수궁 대한문에 대하여
현 대한문은 德壽宮의 동문으로서 그 명칭이 대안문이었습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1904년 4월 덕수궁 대화재 이후 이를 중건하면서 1906년 4월 궁내부 대신 이재극(李載克)이 고종황제께 대안문도 수리할 것을 상주, 고종황제가 대한문으로 고쳐 시행토록 해 본래 대안문은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임.
덕수궁에 있는 건물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중화전(보물제819호) | |
규모:125평 연혁:1902년 광무(光武) 6년에 창건된 목조 건물로 화재로 손실되었다가 1906년 광무(光武) 10년에 중건됨. 고종황제께서 1897년 광무원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신 후부터 재위 기간동안 정전으로 사용. 본래는 증층건물이었으나 광무(光武)8년(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건물로 중건됨. 앞뜰에 조회, 기타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다.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
2.중화문(보물제819호) | |
규모:25.3평 연혁:중화전의 정문으로 1902년 창건된 목조건물이며 (당초에는 앞에 흠명문과 동편에 선춘문이 있었다.) |
2.중화문(보물제819호) | |
규모:25.3평 연혁:중화전의 정문으로 1902년 창건된 목조건물이며 (당초에는 앞에 흠명문과 동편에 선춘문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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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화문(보물제819호) | |
규모:25.3평 연혁:중화전의 정문으로 1902년 창건된 목조건물이며 (당초에는 앞에 흠명문과 동편에 선춘문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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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함녕전(보물제820호) | |
규모:97평 연혁:1897년 (광무 1년) 창건된 목조건물. 1904년 광무(光武) 8년 화재로 불타버려 화재직후에 중건. 고종황제의 침전으로서 광무(光武) 8년(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년 12월에 복원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이 침전에서 승하하셨다. |
4.석조전(등록문화재 제80호) | |
규모:1,245.9평 연혁: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기사 "하딩"의 건물설계와 영국인 "로벨"의 내부 장치로 영국인 "데빗손" 감독하에 1900년 광무(光武) 4년에 기공되어 1909년 융희(隆熙) 3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제26대 고종(高宗)은 이곳을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1933년 미술품을 진열하기 위하여 건물 내부를 일부 수리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1954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 |
5.미술관(등록문화재 제81호) | |
규모:1,037평 연혁:1938년 3월 일인의 손에 의해 건축하여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을 진열하던 곳. 석조 건물로 1936년 8월 21일 기공하여 1938년 6월 5일 준공 됨,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중임 |
6.정관헌(등록문화재 제82호) | |
규모:77.7평 |
7.석어당 | |
규모:46.3평 연혁: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광무(光武) 8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년에 중건하였음.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중층 건물로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몽진하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한다. 인복 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앉히고 인복왕후가 죄를 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
8.덕홍전 | |
규모:44평 |
9.준명당 | |
규모:83.9평(즉조당 포함) 연혁:이 건물은 창건년대는 미상이나 고종(高宗)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황제께서 한때 이 집에서 거처하셨으나 귀빈엄씨가 돌아간 뒤에 고종은 함녕전으로 이어하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
10.광명문 | |
규모:10평 연혁:1897년(건양 3년)에 창건 1904년(光武 8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
11.대한문 | |
규모:29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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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자격루(국보 제229호) | |
연혁:1536년 (중종 31)에 만들어진 물시계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에의해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는 경복궁에 보관되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중종 때 이를 본떠서 다시 만든 것이 창경궁 보루각에 보관되었다가,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수통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는데 중종 때 이를 만든 우찬성 유부(柳溥), 공조참판 최세절(崔世節) 등 참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
13.흥천사종(보물 제1460호) | |
규모:높이:2.82 직경:1.70 두께:3 연혁: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덕수궁(德壽宮) 근처에 유폐된 신덕황후의 왕실무덤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
14.중명전 |
중명전은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Seredin Sabatin)의 설계로 1897년부터 1901년에 걸쳐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된 지하1층, 지상2층의 벽돌조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렀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로 인해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외국사절들의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근대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1907년 4월 20일 이곳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은 이준은 이상설 · 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회복을 호소하였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였다. 건축학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192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대부분 소실되어 원형을 잃었다. 해방이후 여러 차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변경되었으며 2006년 9월 20일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인 덕수궁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
소년조선일보 글: 김명교기자 사진: 김종연 기자 입력 : 2012.10.12 16:04
매시 열리는 수문장 교대의식… 조선시대로 온 듯
북악산 배경 삼은 '향원정', 한 폭의 동양화와 같아
경복궁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건립한 궁궐로, '왕실과 백성에게 큰 복이 있길 바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심하게 훼손됐다. 하지만 1867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경복궁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5호선 광화문역을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다.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면 정문인 광화문을 이용하는 게 좋다. 근정전과 강녕전, 교태전 등 궁의 주요 건물이 광화문과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넓은 경복궁 곳곳을 빼놓지 않고 둘러볼 수 있다.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흥례문과 마주한다. 흥례문에선 경복궁을 지키는 수문장 교대의식이 열린다.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매시 정각이면 의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흥례문과 근정문을 차례로 지나면 왕이 나라의 주요 행사를 치렀던 공간인 근정전에 이른다. 근정전 마당에선 줄지어 서 있는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품계석이라고 부르는데, 신하들의 품계가 표시돼 있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하들은 자신의 관직에 해당하는 품계석 옆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근정전을 지나면 왕의 집무실이었던 사정전과 일상생활 공간인 강녕전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강녕전은 왕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곳으로, 왕실 가족의 생일잔치와 신하들을 위한 연회 장소로도 쓰였다. 강녕전은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과 이어져 있다. 왕비가 머무는 곳답게 교태전 곳곳은 아름다운 전통 문양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다. 특히 교태전 뒤뜰에선 왕비만을 위한 정원인 아미산을 만나볼 수 있다. 계단식으로 꾸며진 아미산에는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과 울창한 나무가 자리한다.
교태전을 돌아나가는 길에 경회루를 만났다. 커다란 연못 한가운데 세워진 누각,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큰 연회를 벌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곳이다. 왕과 왕실 가족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향원정. '향기가 멀리 퍼지는 정자'라는 뜻의 향원정은 왕실 사람들이 재충전을 위해 찾았던 곳이다. 멀리 북악산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 삼아 작은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바로 이곳, 향원정이다.
>> 경복궁
- ▲ 1향원정. 2집경당. 3경회루. 4강녕전 내부.
●위치: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번지
●문의: (02)3700-3900~1
●관람시간
△3~10월: 오전 9시~오후 6시(오후 5시까지 입장)
△11~2월: 오전 9시~오후 5시(오후 4시까지 입장)
△5~8월: 휴일·공휴일 오후 7시까지(오후 6시까지 입장)
※매주 화요일 휴관
>> '서울의 궁궐' 더 둘러보세요
창덕궁 조선 초기(1405년)에 지어진 창덕궁은 조선 시대의 임금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궐이다. 경복궁 다음으로 지어져 제2의 궁궐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불에 탔지만, 전쟁이 끝난 후 복원돼 임금들의 거처로 사용됐다. 조선 시대에 지어진 궁궐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고 자연과 건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위치: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경궁 성종이 세 명의 왕후를 모시기 위해 지은 창경궁은 왕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조선의 '효(孝)' 사상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우리 역사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식물원·동물원화 돼 창경원으로 격하됐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고서도 창경원으로 불리다가 1983년 제 이름을 찾았다.
●위치: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덕수궁 '경운궁'이라고 불렸던 덕수궁은 고종 황제가 왕위를 순종 황제에게 물려주면서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으로 피란 갔던 왕이 한성으로 돌아와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자, 당시 왕족의 집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월산대군의 집에 머물면서 궁궐이 됐다.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등이 들어서 있어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서울 중구 정동 5-1
경희궁 광해군이 세운 궁궐로, 서울의 5대 궁궐 가운데 서쪽에 자리한다고 해서 '서궐'로도 불린다.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3대 궁으로 꼽힐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돼 현재는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인 숭정전, 후원의 정자 황학정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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