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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산성·조선왕릉

남한산성 '금림조합' 등 이야기- 5개

(22) 독립운동의 성지, 남한산성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2009년 09월 07일 (월)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남한산성의 푸른 소나무 숲에는 외세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호국의 정기가 서릿발처럼 스며 있고, 암울한 주권 상실의 시대에서 빛을 회복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독립 운동의 역사 또한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의병항쟁의 중심지였으며, 만세운동과 그 이후 신간회 활동, 금림조합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 등을 통해 그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곧 남한산성은 인근 지역의 독립항쟁을 포괄하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나라 사랑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 의병 항전의 중심지

의병이란 국가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가 적과 싸우는 민중 의용병을 말한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정수(精粹)’라고 했다. 남한산성은 곧 의병 항전의 중심지였다.

을미의병(1895~1896)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의 지령을 받은 일단의 낭인(浪人)들이 명성황후를 소살(燒殺)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심진원(혹은 심영택) 의진을 비롯한 연합의진이 구성돼 의병운동사상 처음으로 서울진공작전을 계획, 실행하고 자진해산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항전했다는 점에서 독립투쟁사에 길이 남을 의거로 평가된다.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이 중심이 돼 이천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火砲軍 都領將 方春植)과 함께 포군 100명을 선발하는 등 단기간 동안 각지에서 최소한 900명이 모집돼 이천에서 결성된 ‘이천 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는 1896년 1월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을 백현(魄峴 : 광주~이천 사이에 있는 고개이름, 넋고개)에서 섬멸시키는 쾌거를 올렸고, 2월 28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심진원의 의병과 연합하게 됐다.

여기에는 광주, 이천 외에 양근(양평) 의진도 합세해 ‘동경조일신문’에는 남한산성 연합의진이 1천6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남한산성 의진은 3단계의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키고자 했는데, 이 작전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실패했다. 그러나 이곳에 주둔했던 의병들은 양근 및 양지 방면으로 이동해 이후 안동지방을 거쳐 1896년 6월에는 경주성을 점령하는 등 끝까지 항쟁을 계속했는데 이들의 창의대장은 김하락이었고 중군은 광주의 안시흥(安時興)이었다.

을사의병(1905~1907)은 남한산성 주변에서 1905년 6월에 약 200명으로 편성된 의병이 부민(富民)들의 재물을 군자금으로 확보하고 총기를 수집해 갔고, 광주의 구만서라는 사람이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평역의 일진회원을 처단했다. 1905년 11월 19일 이등박문이 각 대신을 위협해 5개 조의 을사조약을 늑결(勒結)함으로써 의병전쟁은 더욱 확산돼 갔다.

 

# 정미의병과 남상목 의병장

정미의병(1907~1910)은 성남지역 출신 의병장들이 활약한 시기였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4일 전문 7조로 된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바, 조선의 군사권·재판권·징세권이 박탈되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1907년 8월 1일에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광주의 화약고 2곳과 무기고 4곳을 폭파시켰다. 대량의 무기와 화약이 저장돼 있던 남한산성의 화약고는 의병에게 넘어갈 경우 일본군에게 치명적이었으므로 일본군은 황급히 폭파하고 말았는데, 이때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한다. 이 시기에 성남 출신의 남상목 의병장은 구식총 40자루와 신식총 10여 자루로 무장하고 전투를 별였으며, 윤치장 의병장도 광주 묵동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양주일대에서 활약했다. 남상목 휘하에서 좌익군장으로 활약한 김재선은 시위대의 퇴역병 출신으로서 전문적 군사지식을 의병 작전에 적극 활용했다. 남상목은 안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으나, 무기 부족 등 전투력의 한계를 느껴 이에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잠시 집으로 가던 중 밀고자에 의해 체포됐고, 고문을 받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에 장 파열로 순국했다. 남상목 의병장의 애국충정은 마침내 남기형 후손과 성남문화원의 향토사 정립 노력이 모아져, 2007년 5월 28일 기념사업회가 창립되고 성남문화원의 청원으로 2008년에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돼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 들불처럼 번진 독립만세 운동

 

1919년 2월에 고종 황제의 흉서(凶逝) 소식이 전해지자 국장(國葬) 문상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한백봉, 한순회 등의 주도하에 돌마면 율리(栗里)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하고, 낙생면에서는 남태희 전 면장이 주도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6일 저녁 5시경에 율리 마을 뒷동산인 모란봉에서 주민 100여 명은 봉화를 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는 것으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시작돼 같은 달 27일 분당리 장날에는 돌마, 낙생면의 연합시위로 이어졌고 대왕면 주민들까지 합세했을 때에는 그 수효가 3천 명에 이르렀다. 3월 28일 아침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27일과 같이 3천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이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총칼로 협박하며 강제해산시켰다. 또 동부면과 서부면에서는 이대헌, 김교영, 구희서 등이 3월 26일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송파, 오포면, 실촌면, 대왕면, 구천면, 중부면 등지에서 26일과 27일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일시에 봉화를 올려 신호를 함으로써 일본 측을 당황케 했다. 현재 성남지역인 중부면 탄리(炭里), 단대리, 수진리에서 운집한 300여 명의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3월 27일 남한산성으로 진입했다. 횃불을 신호로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과시한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에 집결하면서 평화적 시위에서 방향을 전환해 과격 양상으로 나타났다. 평소 친일 행각을 보이던 면장이 시위 동참을 거부하자 곤봉으로 면장의 머리를 가격했고 이에 일본 헌병이 발포해 강제해산 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산성이 조선시대 저항정신의 상징이며 근대화 과정에서 자주적인 군대 양성지였음을 감안하면 중부면의 만세시위운동은 면장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과격 형태로 진행됐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 지지와 열기에 고조된 신간회 광주지회 활약

3·1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이후로도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직후에 터진 ‘천도교 성미(誠米) 사건’은 천도교 광주교구장이던 한순회를 비롯해 김정봉, 한치백, 박무호 등 이 지역 출신들이 주축을 이뤘으며 모두 대거 소환조사를 받았다. 1923년부터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단기간 내에 전국적으로 확대돼 활발한 국민계몽이 시작됐다.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신간회’라는 단체를 통해 전개됐다. 1927년 6월부터 시작된 신간회 활동은 한백봉, 한순회, 한진회, 한용회, 한백호, 이대헌 등이 주축이 돼 ‘신간회 광주지회’를 이끌었다. 신간회는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자존의 독립정신함양과 노동야학, 교양강좌, 웅변대회와 각종연설회 등을 통해 국민계몽운동을 벌이는 한편,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폐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횡포에 대한 거족적 저항의식 고취, 관리와 경찰의 부정불의에 대한 정밀조사를 요구했다. 신간회는 전국에 약 140개소의 지회를 두고 3만9천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 농민과 노동자,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광주지회는 1927년 8월 24일 설립됐는데, 경성지회가 6월 10일에 설치된 점을 감안하면 빠른 시일에 설치된 것이어서 신간회에 대한 지지의 열기가 고조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간회 광주지회의 조직에서 주목되는 단체는 천도교 측이 농민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 구축한 산하 단체에서 등장한 ‘조선농민사 지국’, 1920년대부터 금주·금연 등 계몽운동에 치중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한 ‘청년회’, 사회주의 진영의 단체인 ‘노동공제회’가 있다. 석혜환, 정영신 등이 주도해 산성리에서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는 대표적인 사회주의 노동운동 단체다. 남한산노동공조회는 야학을 설립하는 한편 강연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노동계급의 의식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석혜환은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1929년에 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후반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3월, 석혜환은 원산파업단에 격문을 발송한 혐의로 10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고, 1935년 1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결성하고 비서부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돼 1936년 4월 경성지법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 남한산성 푸른 숲과 금림조합

현재 남한산성의 푸른 소나무들은 바로 남한산성의 주민들이 ‘금림조합(禁林組合)’을 결성해 일제의 무차별적인 벌목에서 지켜낸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삼학사 이후 살신성인의 애국정신으로 이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애국혼에 대해 광주·성남·하남 세 지역의 문화원이 2006년에 결성한 광주문화권협의회는 순국선열추모제를 공동으로 모시고 있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3편에서는 ‘하남의 이성산성(二聖山城)’에 대해 소개됩니다.>

 

 

경기도, 남한산성 소나무 숲 살리기 나서
일제 훼손 소나무 숲 매년 1000그루 상당 심어 육성
김영수 기자
경기도는 3일 일제 강점기에 무분별한 벌채로 훼손됐던 남한산성 소나무 숲을 되살린다고 밝혔다.

경기도는 3일 남한산성도립공원에서 우량 소나무 1000그루를 심었다. 이날 0.3ha에 걸쳐 심은 나무는 경기도산림환경연구소에서 양묘한 것으로 경기도는 중남부 고지형 환경에 적합한 종이라고 설명했다.

▲ 1934년 마을 주민들이 그 당시 조합장 석동균과 이영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산성리 금림조합장 불망비. © 시티뉴스

이날 심은 나무는 활착률을 높이기 위해 크기 1m 안팎의 7년생 나무를 선택했다. 통상 식목행사에서 심는 나무는 3년생 정도의 묘목이다.

60~80년생 소나무가 대부분인 남한산성 소나무 숲은 조선 후기 철종 때 무분별한 벌목으로 산사태가 빈발하자 산성마을 유지 석태경이 사재를 털어 1만 그루를 심었다. 고종 때 김영준이 1만5000그루를 더 심어 울창한 소나무 숲을 이뤘다.

그러나 일제가 전쟁물자와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숲을 훼손했고, 지난 1927년부터 마을주민이 금림조합을 조직해 보호해왔지만 현재는 1만2000그루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번 나무심기에는 그동안 산성 지킴이 역할을 해온 마을주민 등 60여명도 참여했다.

경기도는 앞으로 매년 1000그루 가량의 후계 소나무를 심어 남한산성 소나무 숲을 육성할 계획이다.

[출처]시티뉴스 2013.4.3.

 

 

무자년 새해가 어제 같더니 벌써 4월5일 식목일이 되었다.
나는 2001년부터 문화관광해설사로서 남한산성에서 보람을 느끼며 근무하고 있다.

◇ 남한산성의 야생화 노로귀 ⓒ 데일리안

오늘도 근무 날이라 일찍 서둘러 산성에 올라가보니 보라색 자태의 노루귀는 가녀리게 고개를 살짝 들고 피었고, 평생 처음 보는 복수초도 보았다. 그 외에도 처녀치마, 앉은 부채, 산괴불 등 수줍은 듯 저마다 꽃을 피우고 부지런한 귀룽나무는 벌써 많은 잎을 피웠다.

자연은 새, 인간, 곤충을 생각하고 먹고 남을 수 있도록 마음 씀씀이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우선 나부터 챙기는 차이점이 있다.

아름다운 야생화 군락지가 많은데 등산길이 마구 나있어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허리가 꺾여있는 것을 볼 때 내 허리가 꺾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마구잡이로 난립해 있는 길을 보며 안타깝기 그지없다.

남한산성의 20만평의 노송지대는 잘 보존되어 있어 산성을 찾는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산성의 소나무는 일제하에 산성 주민 스스로 금림조합을 만들어 지켜왔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많은 치적이 있지만 그중 육림을 잘하여 세계1위의 산림녹화 국가로 만드신 것이다.

올 1월27일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새로운 마음가짐과 남한산성의 역사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역사체험 등산대회를 가졌다. 3-4천명의 많은 인파가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뤘다.

또한 남한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현대의 재조명이란 제목으로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세미나도 가졌고, 경기도 공무원이라면 남한산성 등 역사문화유적를 모르면 승진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남한산성은 백제 초기의 터도 있지만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서 삼국을 통일한 후 당병을 막기 위해 주장성을 쌓았다. 세계 제일이라고 할 만큼 큰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이 발굴되었다.

벽채도 2m나 된다. 15kg자리 가와가 발굴되더니 더 큰 19kg되는 대기와가 발굴되어 지난 해 6월초에 사적 480호로 지정되었다.

◇ 남한산성의 소나무 숲 ⓒ 데일리안

임진왜란을 겪은 후 조선시대 광해군은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로 지정했다. 한양도성이 무너지면 제 2의 왕도로 쓰려고 한 것이다.

한양을 지키기 위해 동서남북 4곳에 유수부를 두었다. 동에는 광주 남한산성, 서는 강화, 남은 화성, 북은 개성이다. 유수는 한 달에 한번 열리는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수어청을 두어 수도방위사령부 역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시에 먹을 수 있게 식량을 약 50일분의 비축을 해뒀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곳으로 와서 45일 간의 피난을 했다.

12만의 청나라 대군이 쳐들어와 굉장히 긴 길이의 군대의 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한양도성 코앞에 와서야 비로소 허둥지둥 피난을 서둘렀다.

청 태종은 조선을 쳐들어가면 바닷길이 험한 강화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막았다. 대군과 종친들은 강화로 가고 미쳐 파난을 못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왔다. 인조를 업어 들어왔다는 얘기가 있는 서흔남의 비는 역사관 옆 지수당에 쓸쓸이 있는데 자세히 안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뉜 상태에서 성 밖 갑사창에 두었던 식량을 다 뺏기고 그 이듬해 20만의 병력이 증원되어 흰 눈과 얼음이 얼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의 군대가 얼마나 많았으면 헌인능까지 흰색이 안보였다고 하니 그 시대의 절박함을 알 것 같다.

강화가 함락되는 바람에 인질이 되어 삼전도로 끌려왔다. 인조는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상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나가 항복을 했다.

하지만 청군은 남한산성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을미사변을 겪고 일제와 항거해 경기도 지역 의병들이 집결해 대승을 거둔 곳 이기도 하다.

청에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겼는데 그 중하나가 성을 쌓거나 보수할 때 청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명이 망한 후 더 이상 인질을 붙잡아 둘 의미가 없어 8년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 을 돌려보냈다.

비로소 숙종 때에 이르러 행궁에 와서 과거도 보고 현절사에 어제도 내렸다.
봉암신성, 한봉성, 신남성을 차례로 쌓아 원성의 취약한 부분도 보완했다. 그 만큼 남한산성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홍여새 ⓒ 데일리안

삼국시대를 거쳐 성의 종류와 숫자도 많지만, 남한산성은 성산과 진산의 개념으로 아시아에서 두 번째의 긴 성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정조대왕은 여주 영릉엘 갔다 오다 남한산성에 들러 행궁에서 머물며 과거도 보고 성의 무너짐을 보고 대책을 세워 광주백성의 힘과 원임 수어사 홍국영의 돈 1만 꿰미와 임금님이 하사한 9백섬의 곡식으로 산성을 약 50일간에 보수를 하였다는(병암) 기록문도 있다. 보수를 한 후 4대문에 편액을 했는데 지금은 남문에만 남아 있어 다른 문에는 언제 걸릴지 기다려진다.

워낙 남한산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역대 임금이 많이 다녀갔는데 현장위주로 정치를 하시는 이명박 대통령임께 행궁에서 주무시는 것 까지는 바라지는 않지만, 역사의 생생한 현장에 한 번쯤 다녀가시면 내가 활동하고 있는 남한산성이 하루 빨리 복원되지 않을까 기대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을까하는 바램으로 감히 이글을 쓴다.

역사의 생생한 현장, 자연생태의 보고, 각종 새들의 아름다운 소리와 살짝 고개를 내미는 야생화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다.

◇ 수어장대, 무망루라는 편액이 있다. 나라를 지키는 힘이 없으면 안 된다는 無忘樓(무망루)이다. ⓒ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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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로 펼친 호국성지의 흥망성쇠

세계일보/2011.4.7.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11일 공개시연
사설 집필부터 작창까지 1년여 준비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떨어진 한강 남쪽, 넓은 뽕밭 잠실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솟아올라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꼭대기에 오래된 산성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곳이 곧 남한산성이라. 경기도 광주 성남 하남 세 지역에 걸쳐 넓은 한강을 해자(垓字)로 삼고 있는 바, 그런 즉 산성의 방략과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는 일이로되, 이 남한산성 형세를 한 번 살펴보것다!”


 

마당극 창시자 임진택(왼쪽)이 창작판소리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가 경기문화재단(이사장 권영빈)의 후원으로 추진한 창작판소리 ‘남한산성’의 도입부 아니리다. 2010년 첫 작품 ‘백범 김구’에 이은 두 번째 창작판소리다.

사설 집필부터 작창까지 1년여 준비기간을 거친 추진위원회는 11일 오후 2시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공개 시연회를 가진 후 하남문화예술회관(29일), 성남아트센터(5월 3일), 서울남산국악당(5월 20일), 그리고 9월 이후에는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뜰에서 본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창작판소리 ‘남한산성’은 호국의 성지 남한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낸 것으로,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고난의 역사를 비장과 해학에 실었다. 1970년대 마당극 시대를 연 임진택 예술총감독이 주도하는 창작판소리는 정통 판소리의 법통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반인들도 소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창작했다. 추진위원회는 향후 ‘세종대왕’ ‘다산 정약용’ ‘DMZ 이야기’ ‘녹두장군 전봉준’ ‘홍길동’ 등을 판소리로 창작할 계획이다.

남한산성의 장구한 역사를 ‘국난극복의 성지’의 관점으로 다룬 창작판소리 ‘남한산성’은 1부 ‘남한산성의 유래와 축성’, 2부 ‘병자호란-항쟁과 굴욕’으로 구성된다.

특히 2부 중 ‘기개 있는 선비들, 그리고 삼학사’ 대목에서는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삼학사에 정온·김상헌을 더하여 병자호란 당시 말과 행동이 같았던 사람들, 즉 조선 선비의 올곧은 기개를 온몸으로 보여준 고결한 정신과 행동을 새겨 기린다. ‘남한산성의 통한-삼전도의 굴욕’ 대목은 47일간의 항전에도 삼전도에 나가 끝내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우리 임금의 굴욕과 뼈아픈 삼배구고두례의 통한을 판소리로 그려낸다.

유연복 화가의 창작 판소리 ‘남한산성’ 병풍.

남한산성은 일제 강점기엔 만세운동과 그 이후 신간회, 금림조합 등의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맥을 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엔 의병항쟁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산성 내 호국사찰에서 국가 비상시 쓰려고 보관 중이던 무기나 화약 등을 내놓지 않자, 일제는 1907년 한날 한시에 전체를 불질러버리는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의 아홉 사찰과 수많은 문화유적이 모두 이때 불타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의 역사는 희로애락을 담은 우리의 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 역사의 흥망성쇠를 긴 여정을 통해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남한산성 정문에 ‘지화문’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화합이 없다면 누구와 더불어 성을 지킬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던지고 있다. 산성 행궁 내에 있던 인화관(人和館) 역시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임진택과 서울대 법대 출신의 소리꾼 한승석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가 각각 소리를 맡아 총 2시간30분에 걸쳐 완창한다. 북채는 이규호·강민수가 쥔다. (031)510-5409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걷고 싶은 길] 남한산성 본성 성곽

공감코리아/정책정보

 

 

도시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숨 막힐 듯한 그곳을 한나절 동안이라도 벗어나고픈 마음에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을 찾았다. 한 해에 2백만명의 방문객이 몰린다는 남한산성은 초입부터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기 성남시의 산성역 사거리에서 남한산성 중심지인 종로로터리까지 4.8킬로미터 구간을 자동차로 이동하는 데에만 40여 분이 소요됐다. 기다시피 해서 도착한 산성 내의 주차장은 입추의 여지조차 없는 듯했다. 주차를 하자마자 주저 없이 국청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국청사 부근에는 남한산성 4대문의 하나인 서문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인 1637년 1월 30일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에 갈 때도 이 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을 내려나갔다고 한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스러운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남한산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서문은 ‘우익문(右翼門)’으로도 불린다. 백제 온조왕 때부터 구축된 천험(天險)의 요새이자 천혜의 전망대인 남한산성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이 바로 이 서문이다.

서문 근처의 성벽 위에 올라서면 굽이쳐 흐르는 한강과 북악산, 인왕산, 관악산, 북한산 등에 둘러싸인 서울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좋은 날이면 봉긋한 남산 너머로 은빛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인천 앞바다도 아스라하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해넘이와 밤풍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장관으로 기억된다.

걷기 코스

게다가 마천역과 가까워 지하철 5호선을 이용해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이 맨 먼저 통과하는 곳이다. 그런 이점 때문에 서문은 남한산성 본성의 성곽을 따라 온전히 한 바퀴 도는 일주 트레킹의 시점이자 종점으로 삼기에 제격이다.

남한산성 성곽의 길이는 총 11.7킬로미터에 이른다. 그중 본성은 9.05킬로미터이고, 나머지 2.71킬로미터는 옹성(甕城)이다. 성곽은 주봉인 청량산(4백97.9미터)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백67.6미터), 동쪽의 망월봉(5백2미터)과 벌봉(5백15미터), 남쪽의 이름 없는 봉우리 몇 개를 연결해서 쌓았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 1대조인 온조왕 13년(BC 6)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 뒤로 신라 문무왕,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에 개축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다 인조를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게 만들었던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 2년(1624)부터 2년 동안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 되었다.

남한산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룬다. 그러나 성곽 안쪽에는 평균 해발고도 3백50미터 내외의 완만한 구릉성 분지가 형성돼 있다. 특히 우물 80개와 샘터 45개소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밖에서는 제법 험준해 보이지만 안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야말로 천혜의 전략요충지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자연 지형에 순응하며 완만하게 오르내리거나 구불거리는 남한산성의 성곽을 따라 걷는 내내 발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뿐했다.

북문과 동장대 암문 사이의 성곽 길. 하남시와 구리시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가깝게 보인다.
북문과 동장대 암문 사이의 성곽 길. 하남시와 구리시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가깝게 보인다.


남한산성은 숲이 좋다. 특히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탐방로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서울 근교에 이처럼 아름답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수령이 70~90년에 이른다는 이곳의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주민 3백3명이 벌목을 금지하는 금림조합(禁林組合)까지 결성해서 보호한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원스런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찾아가기도 편리한 남문~서문~북문 구간에는 걷기를 즐기는 트레커(trekker)들보다는 삼삼오오 짝을 이뤄서 놀러 온 행락객들이 많다. 그래서 다소번잡하고 어수선하지만 소나무숲 특유의 청신한 기운이 사람들의 기분을 밝게 만든다. 더욱이 성벽 길 곳곳에 탁 트인 전망터가 형성돼 있어서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상쾌한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북문(전승문)을 지나면 성벽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숲도 소나무 일색에서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뒤섞인 혼합림으로 슬그머니 달라진다. 그러다 2.9킬로미터에 이르는 북문~동문(좌익문) 간의 중간쯤에 위치한 동장대 암문을 지나서부터 소나무는 찾아보기 어렵고,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활엽수림으로 바뀐다.

그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적막강산처럼 인적이 뜸하다. 덕택에 새소리, 바람소리가 한결 가깝게 들려온다. 녹음 짙은 숲을 쓰다듬듯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유난히 맑고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구간이다.

“남한산성 숲길은 참 걷기 좋아요. 너무 힘들지도 편하지도 않게 적당히 오르내리거든요. 그리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꽃 피는 봄날도 좋고, 눈 쌓인 설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그래서 이 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근심 걱정도 사라지고, 한 2년 동안 매주 걸으니 몸도 몰라보게 건강해졌어요.”

매주 한 번씩 부인과 함께 남한산성에 올라서 약 5시간 동안 일주 트레킹을 즐긴다는 김몽석(58) 씨의 남한산성 숲길 예찬론이다.

‘우익문’으로도 불리는 남한산성의 서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 문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우익문’으로도 불리는 남한산성의 서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 문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동장대 옛터와 동문 사이에는 장경사 신지옹성과 장경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중 옹성은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해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본성의 성벽 아래에는 옹성으로 통하는 암문이 설치돼 있어서 적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드나들 수 있다.

장경사는 산사다운 고즈넉함과 호젓함이 돋보이는 절집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할 당시 축성공사에 동원된 승군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 세운 여러 절집 가운데 하나다. 축성공사에 동원된 승군들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성곽 방어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계속 주둔했다고 한다.

당시 장경사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망월사, 옥정사와 새로 지은 국청사, 개원사, 한흥사, 동림사, 천주사, 남단사 등 9개 사찰을 승군들의 거처로 활용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남한산성의 제일 명당터를 “차지한 덕택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전쟁을 비롯한 전란 속에서도 거의 피해를 보지 않고 건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산성로(342번 지방도)가 지난다. 고요한 숲길을 걸어오다가 갑작스레 만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성벽 곳곳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에 가슴이 활짝

어느덧 시곗 바늘은 오후 5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애초 계획한 대로 계속 성곽 길을 따라서 남문을 거쳐 서문으로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서문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장관을 놓칠 수 없기에 비교적 시간이 덜 소요되는 동문~종로~침괘정~수어장대~서문 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단축코스라 해도 줄곧 약 2.5킬로미터의 오르막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병자호란 당시 총지휘부가 자리했던 수어장대를 빼놓을 수는 없다.

청량산 정상의 수어장대에 도착했을 때는 한 걸음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수어장대 앞의 성벽에 서니 설핏 기울어진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 서울 강남지역의 시가지와 한강, 남산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서둘러 달려간 서문 근처의 성벽과 그 아래의 빈터에는 이미 수많은 사진동호인들이 자리를 잡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서울 상공을 뒤덮은 먹장구름이 여기저기에 소나기를 퍼붓는 광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결국 아쉬운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서울 전경은 황홀한 해넘이와 찬란한 저녁노을보다도 긴 여운을 가슴에 남겼다.

문의·남한산성관리사무소(031-743-6610)

◆ 여행정보

▲ 숙박=전체 구역이 국가에 의해 문화재(사적 제57호)로 지정돼 있는 남한산성 내에서는 숙박업소를 운영할 수 없다. 숙박업소를 이용하려면 성남 시내나 광주 쪽으로 나가야 한다.

▲ 맛집=남한산성 내에는 많은 음식점들이 성업 중이다. 오복손두부(031-746-3567), 함지박(031-744-7462), 몽두가(031-746-6574) 등 76개 업소에 이르는 산성 안의 음식점들은 토종닭백숙, 훈제오리, 손두부(주먹두부), 산채정식, 한정식 등을 주로 내놓는다. 맛과 메뉴, 가격은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 가는길=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송파나들목(342번 지방도) → 산성역 사거리(좌회전) → 남한산성 입구 삼거리(좌회전) → 산성터널 → 남한산성

2009.08.21 글·사진:위클리공감

 

남한산성 행궁...'남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