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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피니언

[조선'신문화']허울뿐인 일제하 '선거' 때도 '료리점 대접' 등 '불법' 등장해/구)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3장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76] 허울뿐인 일제하 '선거' 때도 '료리점 대접' 등 '불법' 등장해

조선일보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 2012.09.24 22:42

1926년 11월 20일 경성부협의회 의원 선거 투표장인 남대문소학교 앞. 후보자들의 선전 간판들이 즐비한 가운데 유권자들과 운동원들이 뒤섞여‘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1926년 11월 22일자).
1926년 11월 20일 이른 아침부터 남대문 앞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길가에는 입후보자를 선전하는 '수백의 굉장한 립간판'이 세워졌고, 투표장인 남대문소학교 앞에는 '려염집 부녀, 숙녀들까지 출동하야 출마하는 남편의 명함을 전하는 등' 선거운동 열기가 뜨거웠다(1926년 11월 22일자). 식민지 시절 세 번째로 치러진 경성부협의회(京城府協議會)의원 선거 투표 당일의 풍경이다.

일제는 일종의 유화책(宥和策)으로 '민의의 창달'을 표방하며 1920년부터 전국 부(府)·읍(邑)·면(面)마다 '협의회'를 두고 의원 선거에 조선인도 입후보하거나 투표하게 했다(1923년 11월 18일자). 하지만, 그 실상은 참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협의회'라는 기관 자체가 정책 결정권이 없는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투표권도 '부세(府稅)를 5원(약 10만원) 이상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자'에게만 부여했다(1923년 1월 14일자). 즉 기득권층에만 투표권을 준, 제한선거였다. 1920년의 경우, 약 30만의 경성 인구 중 유권자는 조선인·일본인 합쳐 4771명이었고, 1923년엔 약 7500인에 불과했다(1923년 1월 14일자).

허울뿐인 선거였지만 운동은 치열했다. 1920년 첫 선거 때부터 일본인들이 '료리상(料理床)이나 기타 수완' 혹은 '금전의 세력'으로 유권자들을 매수하는 부정행위를 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등 '살풍경'이 빚어졌다(1923년 11월 18일자). 이후에도 3년마다 선거철이면 선거부정 기사가 사회면에 빠지지 않았다.

선거운동은 투표 당일에도 허용됐다. 한 달간 계속된 운동이 그날 절정에 이르렀다. "(투표장인) 남대문소학교 문 압헤는 일천오백여 명 가량의 유권자들이 사렬 오렬로 늘어서서"(1926년 11월 21일자) 차례를 기다렸으며 "수천여 대의 인력거와 수백여 대의 자동차들이 유권자를 선거장으로" 실어날랐다(1926년 11월 22일자). 일제로서는 선거를 실시했음을 과시하려고 요란하게 판을 벌이게 한 듯하다.

그러나 선거에서 조선인 후보자들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26년엔 경성부협의회 의원 당선자 30인 중 일본인이 18인을 차지하는 등 전국 8개 부 중 7곳에서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조선일보 사설은 "조선인의 참패"라며 "이 형세를 만회할 방도는 어대 잇는가? 우리는 모든 방면에 잇서서 적극적으로 투쟁해 나가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라고 했다(1926년 11월 22일자).

 

짱나1926년 11월20일 식민지 시절 세 번째로 치러진 경성부협의회(京城府協議會)의원 선거 투표 당일의 풍경이다...이른 아침부터 남대문 앞이 '인산인해'를 이뤘다....허울뿐인 선거였지만 운동은 치열했다. 1920년 첫 선거 때부터 일본인들이 '료리상(料理床)이나 기타 수완' 혹은 '금전의 세력'으로 유권자들을 매수하는 부정행위를 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등 '살풍경'이 빚어졌다(1923년 11월 18일자). 이후에도 3년마다 선거철이면 선거부정 기사가 사회면에 빠지지 않았다...^-^

 

- 2012년 10월4일 시청 앞 싸이의 공연이 있다고 하는 날...오후 6시40분...수산나 -

 구)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현 개항박물관) 1

 

구)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현 개항박물관) 2

 

구)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현 개항박물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