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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피니언

[조선‘신문화’]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남편 살해 美人' /수원 화성문화제 거리행진 3장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78]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남편 살해 美人'

 조선일보 문화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입력 : 2012.10.02 03:07

 

"자긔 남편(17)이 모양도 추악하고 학문도 업슬뿐만 안이라, 더구나 장병에 걸리여 용이히 희북될 희망이 엄슴으로… 쥐 잡는 약을 밥 가운데 느혀서 남편에게 멕인 결과 드듸여 죽게한…."

조선일보 1924년 8월 16일자는 '김뎡필(金貞弼·20)'이라는 남편을 독살한 '엽기 여인'의 경성복심법원 첫 심리 내용을 전했다. 이미 1심에서 사형이 선고돼 '사형바든 미인'이란 제목이 붙은 1단짜리 기사는 말미에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서 비록 죄수복을 입엇슬 망정, 그의 묘한 태도에는 자못 놀나지 안이할 사람이 업섯스며, 피고는 사실을 전부 부인하엿다"고 전했다.

다른 신문들도 일제히 '본부 독살 미인' '살부(殺夫) 절세미인' '어엿분 악마' 등 '미인'을 강조하며 사건 내용을 전하자 '독살 미인'은 곧 경성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조혼의 폐해 때문에 '본부를 독살한 여'(1921년 11월 16일자) '본부를 독살하고자 한 소부'(1924년 5월 16일자) '본부 독살 미수'(1925년 1월 24일자) 같은 사건이 흔했지만 '미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그녀를 동정하는 편지가 각 언론사와 재판장, 변호사 앞에 쌓였고 여론도 들끓었다.

‘남편 죽인 독살 미인’ 김뎡필과 공판 당시 재판소에 몰린 군중(1928년 1월 8일자).
판결 언도가 있던 날 법정 안은 대만원을 이뤘고 밖에도 수백명의 군중이 쇄도해 재판장은 부담을 느꼈는지 판결을 뒤로 미뤘다(8월 23일자). 이어 당시 몇 안 되는 조선인 변호사로 '의열단 사건' 변호를 맡아 성가를 높인 이인(李仁)이 재심 변호를 자청하면서(8월 26일자) 세인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재심 공판 날, 새벽 6시부터 재판소 부근 종로 일대는 몰려든 수천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재판소 담장에는 수십명의 기생이 매달려 구경하면서 '춘삼월에 고흔 꼿이 핀 산 언덕' 같았으며, 일대 혼잡은 오후까지도 계속됐다(10월 11일자). 이인은 "백보를 양보해 독살하엿다 하더라도 이는 강제 결혼에서 생긴 비극"이라며 '사형은 불가'라고 변론했다(10월 12일자). 재판장은 가부장제 사회의 기본 질서를 흔든 남편의 독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조혼의 폐해를 감안했는지 무기징역을 언도했다(10월 23일자).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문제의 미인수(美人囚)'는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됐고(1927년 2월 9일자), '옥중 가인'의 소식은 1935년 12년 만에 가석방될 때까지 이어졌다. 특히 1928년 조선일보 신년 기획 시리즈 '일시 소문 놉든 여성의 최근 소식'에 김정필은 여성운동의 선구자 김마리아나 영화배우 신일선, 악단의 여왕 윤심덕 등 신여성과 나란히 소개될 정도로 '일세를 흔동(��動·마구 흔듬)한' 여인으로 기록됐다(1928년 1월 7일자).

헐 1928년 조선일보 신년 기획 시리즈 '일시 소문 놉든 여성의 최근 소식'에  '남편 살해 美人' 김정필은... 여성운동의 선구자 김마리아나 영화배우 신일선, 악단의 여왕 윤심덕 등 신여성과 나란히 소개될 정도로 '일세를 흔동(��動·마구 흔듬)한' 여인으로 기록됐다(1928년 1월 7일자)..."헐~"

 

다른 신문들도 일제히 '본부 독살 미인' '살부(殺夫) 절세미인' '어엿분 악마' 등 '미인'을 강조하며 사건 내용을 전하자 '독살 미인'은 곧 경성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헐~"...karl 폭파범 "김현희"가 떠오르네...ㅋㅋㅋ...^-^

 

예나 이제나 여자는 예쁘고 볼 일인가 보다...ㅋㅋㅋ...^-^

 

- 2012년 10월4일 목요일 시청 앞 싸이의 공연이 있다고 하는 날...오후 5시10분...수산나 -

 수원 화성문화제 거리행진 1

 

 수원 화성문화제 거리행진 2

 

 수원 화성문화제 거리행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