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람·문인

[김석종의 만인보]현실 저 너머로 입산한 ‘마지막 나그네’ 박인식(61)/영주 부석사 일몰 후 풍경 4장

 

[김석종의 만인보]현실 저 너머로 입산한 ‘마지막 나그네’ 박인식

경향신문/테마칼럼/김석종 선임기자 입력 : 2012-02-08 21:00:48

 

 

평생 방랑과 기행(奇行)에 한목숨 건 것처럼 살아온 ‘술꾼’이 있다. ‘박구라’로 통하는 산악인 소설가 박인식(61)이다. 1980년대 후반쯤, 서울 광화문 피맛골(지금은 재개발로 골목이 몽땅 사라졌다)에 있는 술집 ‘시인통신’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첫사랑에 나는 울었네, 첫사랑에 나는 울었네~.” 술에 취한 그는 진짜로 울면서 ‘첫사랑’이라는 노래를 불러댔다.

당시 박인식은 산악계가 인정하는 탁월한 클라이머 중 한 명이었다. 인사동 터줏대감으로도 이름 높았다. 국내 모든 산과 암장, 빙벽을 올랐고, 히말라야·알래스카·안데스산맥·톈산산맥·쿤룬산맥·파미르고원까지 두루 섭렵했다. 한때 잘나가는 등산 전문 잡지의 기자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인도, 네팔, 유럽 등을 몇 달씩 떠돌아다니는 식으로 가출을 일삼았다. 1990년쯤 직접 등산잡지 ‘사람과 산’을 창간해 발행·편집인을 했다. 흑자가 나는 잡지를 2년 만에 그만두고 이번에는 중국대륙과 실크로드를 유랑했다. 정말 누구도 못 말리는 역마살이다.

“고소증은 술에 취한 상태와 똑같다”는 산 선배들 말을 믿고 ‘고소적응 폭음수련’을 했다는 박인식이니 주량도 특출났다. 인사동에 낭만이 펄펄 살아 있던 그 시절, 도무지 순탄한 생활에는 성이 차지 않는 괴짜, 예인, 방외지사들을 이끌고 참으로 질펀하고 왁자지껄하게 인사동을 휘젓고 다녔다. 박인식이 술이 덜 깨 와이셔츠를 입지 않은 내복 위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고, 술집에서 구두를 신지 않고 맨발로 집에 갔다는 식의 ‘뒷담화’가 날마다 눈송이처럼 쌓였다.

 

어쩌면 박인식의 ‘구라’는 국내 ‘3대 구라’라는 백구라(백기완), 황구라(황석영), 방배추(방동규)와 맞먹을 만했다. 기행 ‘고수’들인 걸레스님 중광, ‘귀천’의 천상병, 고은 시인은 그의 ‘한소식’을 인가(印可)했다. 어떤 때 박인식의 입심은 실화인지 픽션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일곱 달에 걸쳐 중국을 여행했을 때다. 중앙아시아 쿤룬산맥에 들어갔다가 고소증에 걸렸다. 그 환각상태에서 마치 누가 불러주는 것처럼 원고지 600장 분량의 소설을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귀국길에 그 노트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며, 그 소설의 줄거리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더라는 거다.

한 번은 후배들과 오대산 등산길에 산삼밭을 발견했단다. “심봤다!”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혼자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행을 피해 바위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가 다시 가보니 산삼은 없고 돌단풍밭이더라는 거였다. 이건 정말,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다. 그런다고 물러설 박인식이 아니다. “산삼이 거의 멸종된 것은 이 땅의 정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산삼을 심어 모든 산을 다시 산삼밭으로 만들자.” 그는 인사동 패거리들과 함께 ‘농심마니’라는 산삼 심는(農) 모임을 만들었다. 농심마니는 지금까지 장장 35년째 봄가을로 전국 명산과 오지 산골을 찾아다니며 산삼을 심고 있다. 심은 산삼은 절대 캐먹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러니 박인식이 그냥 술에 취해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민족정기회복’ ‘역사바로잡기’ 같은 야심찬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야말로 열정을 다 바쳐 이끌어온 사람이다. 대표적인 게 독도에 나무를 심는 ‘푸른 독도 가꾸기’ ‘발해 역사 찾기’ ‘토종문화살리기’ 운동이다. 그가 무슨 일을 꾸몄다 하면 문화예술인이나 산악인 등 200~300명은 금방 모인다. 하긴 인사동에서 1차, 2차를 거쳐 3차쯤의 술자리가 되면 거의 소대병력쯤이 술집을 점령하는 판이니까.

‘사람과 산’ 시절 창간특집으로 ‘한국 호랑이를 찾습니다’라는 연재물을 기획했었다. 당시 호랑이 목격담에 감화(?)돼 이 땅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아직도 산을 누비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멸종된 호랑이도 산삼과 함께 우리 땅의 영물이며 상징 아닌가. 백두대간 회복 운동을 벌여 산악인들과 함께 종주 붐을 일으켰고, 산악문학상을 제정하고, 산상음악제와 산악영화제를 개최했다.

얼마 전 박인식이 <첫사랑뿐>이라는 세 권짜리 소설을 썼다. 책을 잡자마자 푹 빠질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산악인인 주인공이 중국에서 썼다가 잃어버린 바로 그 소설을 찾아나서는 줄거리다. 사라진 소설은 할아버지의 수수께끼 같은 유언, 일제에서 현대에 이르는 3대에 걸친 가족사, 그리고 한민족사의 비밀과 연결된다. 작가가 산악인으로서 밟았던 백두대간, 백두산, 만주지역과 중국대륙, 중앙아시아 쿤룬산맥과 톈산산맥의 모든 산과 대지를 무대로 삼을 만큼 스케일이 웅대하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각각 만나는 현실 속 고독한 사랑, 그리고 두 사내가 끝없는 방랑에서 맞닥뜨리는 기이한 인연과 불가사의한 사건들은 옛 누란왕국의 전설에 맥이 닿아 있다. 그 천년 세월 전에 어긋나버린 운명적인 ‘첫사랑’이 연기(緣起)와 환생(還生)으로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박인식의 애창곡인 ‘첫사랑’ 노래는 슬프고도 아름답게, 일종의 배경음악처럼 전편에 깔린다. 그래서 기행문학의 옷을 입었음에도 판타지 소설처럼 읽혔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박구라’식 스토리텔링에 나는 또 한번 감탄하고 말았다.

박인식은 이제 저 뜨거웠던 인사동 술판과 목숨 건 산행에서 발을 뺐다. 그의 나이듦과 함께 낭만의 시대는 저문 것 같다. 그래도 결코 낭만과 산, 방랑을 버리지 못할 사람이 ‘이 시대 마지막 나그네’인 박인식이다. 아무래도 그는 이제 글을 통해 이미 각박한 현실의 산, 저 너머로 ‘입산’한 것 같다. 거기서 그는 농심마니가 산삼을 심듯이, 멸종되어가는 순수와 낭만의 씨를 뿌릴 것만 같다. 그것이 그의 ‘첫사랑’이므로.

오래전, 박인식이 이런 말을 했다. “옛날 도사들이 ‘축지법’을 너무 많이 써서 우리 땅이 이렇게 좁아진 거야. 내가 ‘확지법’ 하는 도사를 좀 아는데, 우리나라 사람 전체가 빨리 가려는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다니면 따로 확지법을 안 써도 땅이 도로 넓어진다니까.”

 

ㅋㅋㅋ어쩌면 박인식(61)의 ‘구라’는 국내 ‘3대 구라’라는 백구라(백기완), 황구라(황석영), 방배추(방동규)와 맞먹을 만했다. 기행 ‘고수’들인 걸레스님 중광, ‘귀천’의 천상병, 고은 시인은 그의 ‘한소식’을 인가(印可)했다. 어떤 때 박인식의 입심은 실화인지 픽션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그래도 결코 낭만과 산, 방랑을 버리지 못할 사람이 ‘이 시대 마지막 나그네’인 박인식이다. 아무래도 그는 이제 글을 통해 이미 각박한 현실의 산, 저 너머로 ‘입산’한 것 같다.

 

 “옛날 도사들이 ‘축지법’을 너무 많이 써서 우리 땅이 이렇게 좁아진 거야. 빨리 가려는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다니면 따로 확지법을 안 써도 땅이 도로 넓어진다니까.”...ㅎㅎ...^-^

 

- 2012년 11월25일 일요일...수산나 -

 

 

영주 부석사 일몰 후 풍경 1

 

영주 부석사 일몰 후 풍경 2

 

영주 부석사 일몰 후 풍경 3

 

영주 부석사 일몰 후 풍경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