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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김석종의 만인보]올레길 ‘공동 창시자’ 서동철/분당 중앙공원 단풍길사진 5장

 

[김석종의 만인보]올레길 ‘공동 창시자’ 서동철

경향신문/오피니언/테마칼럼/김석종 선임기자/입력 : 2012-04-04 21:12:17

 

 

‘파도 높은’ 제주의 새끼섬 가파도(加波島) 바닷가에서 서동철(53)을 만났다. 아침 댓바람에 시작된 막걸리 대작이 진진했다. “건배한 잔은 꺾으면 안되우다.” 그는 사정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창밖으로 쳐오는 파도는 거칠고, 바람은 기세등등했다. 비까지 축축축축 쏟아지는 날이니, 캬아! 술맛 났다.

서동철이 누구냐 하면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의 동생이고, 제주 올레길을 만들 때 첫 탐사대장이었다(지금은 동철의 동생인 서동성이 탐사국장을 맡고 있고, 그는 탐사전문위원이다). 말하자면 서명숙을 도와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올레길을 개척한 숨은 공로자다. 서명숙도 동생이 없었으면 제주 올레는 불가능했을 거라며 ‘제주 올레 공동 창시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서동철의 인생사는 가파도 파도만큼이나 파란만장, 다이내믹했다. 체구는 작지만 차돌처럼 단단해보이는 그는 소위 ‘별’을 열개 넘게 단, 왕년의 ‘조폭’ 두목 출신이다.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서귀포에서 소문난 우등생이었고, 그는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다. 열일곱 살 때 본격적으로 싸움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만든 ‘땅벌파’는 서귀포에 이어 제주시까지 평정했다. 고려대생 서명숙이 유신반대운동으로 구속됐을 때도, 그는 폭력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했다. 그렇게 해서 도합 13년8개월을 ‘빵’에서 보냈다.

2007년 서명숙이 나이 쉰에 기자생활을 때려치우고 “고향 제주에 길을 내겠다”며 귀향했을 때, 서동철은 서귀포에서 룸살롱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누나의 ‘원대한’ 올레길 구상을 듣고 “이사장님(그는 서명숙을 꼬박꼬박 ‘이사장님’이라고 불렀다)이 잔다르크처럼 제주도에 혁명의 깃발을 꽂을 거라는 생각이 팍 들었다”고 했다. 평생 거칠게만 살아온 천하의 서동철이지만, ‘심지 굳고 똑똑한’ 누나에게만큼은 늘 꼼짝 못하고, 무조건 믿고 따랐다.

게다가 소싯적부터 빨빨대고 싸돌아다녔으니 서명숙이 찾으려는 제주의 옛길, 아름다운 작은 길들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답사에 한두 번 동행하다가 아예 올레일에 뛰어들었다. 이미 나이 들어서 ‘싸움’에서는 한발 빼고 있었지만, 팔자에 없는 올레 탐사대장 직함을 갖게 되면서 ‘밤의 세계’와는 영영 굿바이 했다. 그래도 올레 1, 2코스 개척 때 맨 처음 달려와 길내기 도우미를 자청한 것은 의리에 죽고 사는 왕년의 ‘동생’들이었다.

서동철은 살아온 역정에 비해 호사가적 관심이 크고, 잡다하게 아는 것도 많다. 순전히 ‘꼬붕’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이른바 ‘국립대학’(교도소)에서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다는 거다. 제주의 역사, 사투리, 희귀한 동식물 이름까지 뚜르르 꿴다. 그러니 제주 목사가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 순력을 할 때 시흥(始興)에서 시작해 종달(終達)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을 올레의 시작점인 1코스로 추천했다. 두 마을은 해녀의 바다 구역과 농지를 두고 오랜 세월 반목해온 사이였으니, 평화를 지향하는 ‘올레 스피릿’과도 딱 맞는 길이었다.

서동철은 올레 코스를 정하고, 설계도를 그리고, 길을 내는 작업을 도맡았다. 길이 마을이나 사유지를 지나갈 수 있도록 이장과 청년회 등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하긴 주민 동의를 받으면 올레 작업은 반 이상 성사된 거였다.

“올레를 만들면서 내 개인 돈 몇 억이 들어가신디. 아끼던 리무진 승용차도 다 망가졌쥬. 동네 사람들 모아놓고 밥사고, 술사고…. 그래도 올레가 제주 역사를 바꿨으니 하나도 아까울 게 없어요. 제주의 숨어 있는 진짜 아름다움을 알리고, 전국에 걷기 붐을 일으켰으니 대단한 일 아니우까.”

 


이 호호탕탕한 사내의 가정사는 순탄치 못했다. 이미 여러차례 이별을 겪었고, 아이들은 이혼한 엄마를 따라 미국, 광주, 부산에 흩어져 산다. 정이 깊었던 다섯번째 아내와는 2년 전 사별했다. 그는 쓸쓸함에 푹 절어서 가파도 올레길(10-1코스) 개척차 이 섬에 왔다. 그러다가 1년 전쯤 여섯번째 새 여자를 만났다. 가파도 해녀 대표를 맡고 있는 동갑내기 강수자다.

가파도에서 태어나 3대째 해녀가 된 강수자는 서른일곱 살에 이혼하고, 혼자 몸으로 두 딸을 키웠다. 서리서리 한도 많아서 해녀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숨비>의 주인공으로 출연 중이다. 숨비는 해녀들이 잠수했다 올라오며 ‘호오이! 호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다.

그런 강수자가 6시간에 걸친 대수술(병명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으니 약속을 지킨다)을 하고 석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생겼다. 그때 서동철이 궂은일을 도와주다가 정이 들었던 거다. 강수자는 술 한 잔 못하면서도 내내 서동철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렇게 좋으냐니까 “사내답고, 정 많고, 낭만적인, 정말 멋진 남자”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직 결혼식을 올린 건 아니다.

대낮에, 여덟 통의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불콰해진 서동철이 노래방 기기 반주에 맞춰 가곡 ‘떠나가는 배’를 열창했다. 강수자가 좋아하는 노래란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오 떠나는 배~.” 서동철의 기묘한 춤이 철썩철썩 파도소리와 어우러졌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난 것 같았다. 강수자는 진짜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는 오빠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냥 눈물이 나요.”

서동철은 가파도 해녀의 품에 이 풍진 세상의 닻을 내렸을까. 그는 이제 ‘목숨 건’ 싸움의 팽팽한 긴장도, ‘한탕’의 욕심도 모두 내려놓았단다. 인생 후반기는 유유자적, 자연 속의 삶을 살 작정이다. 틈틈이 배운 서예와 올레 기록사진 때문에 찍게 된 사진의 매력에 푹 빠져서 산다.

“뜻이 좋아서 한 일이니, 내 공이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올레는 전적으로 서명숙 이사장 작품이라마심. 많은 사람들이 꼬닥꼬닥(천천히) 걸으면서 제 안의 아픈 상처를 낫게 한 것처럼, 나도 올레길에서 행복해졌으니 된 거우다.”

가파도는 해발 20.5m, 우리나라에서 고도가 가장 낮은 섬이라고 한다. 서동철은 거친 싸움의 파도를 건너서 이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거다. 결국 풍랑주의보로 여객선은 끊겼다. 가파도 어선을 빌렸다. 강수자가 빨리 배를 타라고 재촉했다. 서동철이 말했다. “와리지 말앙(서둘지 마).”

ㅎㅎㅎ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의 동생이고, 제주 올레길을 만들 때 첫 탐사대장...서동철(53)...서명숙도 동생이 없었으면 제주 올레는 불가능했을 거라며 ‘제주 올레 공동 창시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소위 ‘별’을 열개 넘게 단, 왕년의 ‘조폭’ 두목 출신이다...도합 13년8개월을 ‘빵’에서 보냈다...서동철은 올레 코스를 정하고, 설계도를 그리고, 길을 내는 작업을 도맡았다. 길이 마을이나 사유지를 지나갈 수 있도록 이장과 청년회 등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하긴 주민 동의를 받으면 올레 작업은 반 이상 성사된 거였다. ...^-^

 

이 호호탕탕한 사내의 가정사는 순탄치 못했다. 이미 여러차례 이별을 겪었고, 아이들은 이혼한 엄마를 따라 미국, 광주, 부산에 흩어져 산다. 정이 깊었던 다섯번째 아내와는 2년 전 사별했다. 그는 쓸쓸함에 푹 절어서 가파도 올레길(10-1코스) 개척차 이 섬에 왔다. 그러다가 1년 전쯤 여섯번째 새 여자를 만났다. 가파도 해녀 대표를 맡고 있는 동갑내기 강수자다....^-^

 

"올레는 전적으로 서명숙 이사장 작품이라마심. 많은 사람들이 꼬닥꼬닥(천천히) 걸으면서 제 안의 아픈 상처를 낫게 한 것처럼, 나도 올레길에서 행복해졌으니 된 거우다.”...^-^

 

 정말 파란만장한 53년을 보내신 분이군요...ㅎㅎ...^-^

 

 

- 2012년11월27일 화요일 오전 10시20분...수산나 -


 

 

 

분당 중앙공원 심양정원 정자 

분당 중앙공원 심양정원 정자에 오르고내리는 돌계단

 

분당 중앙공원 심양정원으로 오고가는 길

 

분당 중앙공원 연못으로 오고가는 길

 

분당 중앙공원 황새울광장으로 오고가는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