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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뿌리 깊은 호화 혼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뿌리 깊은 호화 혼수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05-16 21:54:21

 

“혼인 때 혼수품을 받으면 딸을 계집종으로 파는 것으로 해서 부끄럽게 여겼다.”(<북사(北史)> ‘열전’)

참으로 질박한 고구려의 혼인풍속이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혼인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 집안이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화혼수의 원조는 허황옥이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국제결혼한 야유타국의 공주님이다. 기원후 48년 7월, 16살 신부 허황옥이 가져온 혼수품은 어마어마했다. 우선 신부를 보좌할 잉신(잉臣·신부를 따라온 신하) 등 20명이 따라왔다. 금수능라(錦繡綾羅·비단옷감),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 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장신구) 등 중국제 최고급 혼수도…. 친정에서 어린 딸을 이역만리로 시집보내면서 바리바리 혼수품을 싸준 것이다.

 

683년, 신라 신문왕은 왕비를 들이면서 신부집에 뻑적지근한 혼수를 내린다.

“…폐백이 15수레였다. 쌀·술·기름·꿀·간장·된장·말린고기·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삼국사기>)

혼수품 수레 300대의 행렬로 서라벌 시내는 장관을 이뤘을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 27년(1445)에 희한한 일이 있었다. 정우라는 사람이 고했다.

“사위(박자형)가 혼수품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신부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행실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쫓아냈습니다.”(<세종실록>)

혼수품 문제로 신부를 버린 몰상식한 신랑을 탄핵한 것이다. 세종이 ‘솔로몬의 판결’을 내린다.

“신랑(박자형)은 이미 신부집에서 하룻밤 잤다. 신부의 행실을 문제삼았다면 그때 문제삼아야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예물을 다 받았으니 혼인은 성사된 것이다. 그는 혼수품이 못마땅하자 엉뚱한 핑계로 파혼하려는 것이다.”

못난 신랑은 곤장 60대와 징역 1년이라는 중형을 받았다. 1482년(성종 13)에는 한성부 우윤(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인 한간이 최고급인 중국산 혼수품을 받은 혐의로 구설에 올랐다. 이후에도 조정은 온갖 ‘호화혼수’ 방지책을 마련했으나 별무신통이었다. 1834년(순조 34) 이병영의 상소를 보자.

“혼례 한번에 드는 비용은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보다 많습니다. 잔치 비용도 백성의 1년치 양식거리가 넘습니다.”

끔찍하다. 178년 전인데…. 요즘 부모들의 심정을 어찌 그리 구구절절 대변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