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쐬주 한잔’의 유혹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쐬주 한잔’의 유혹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05-23 22:43:44

 

“소주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세종 15년(1433),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의 폐해를 조목조목 논한다. 그러나 임금은 난색을 표한다.

“엄금한다고 되는 것이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세종실록>)

과연 성군이시다. ‘소주 한잔의 유혹’을 누가 막는다는 말인가. 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성인 1인당 마신 소주가 1년 평균 84병에 이를 정도라니 말이다. 소주는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1258년 몽골 정벌군이 아랍의 소주 제조법을 배웠다고 한다.(사진) 몽골군은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에 양조장을 만들었다.

 

소주는 조선을 만취시켰다. 첫 번째 희생자는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이방우)이었다. 그는 1393년 소주를 탐닉하다가 술병이 나 죽고 말았다.(<태조실록>) 1536년(중종 31) 오여정이라는 인물은 아버지의 첩(돌지)과 정을 통하다가 꼬리가 잡혔다. 내연의 남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첩(돌지)이 소주와 백화주를 사용해서(用燒酒及白華酒) 남편을 죽였다고 자백했습니다.”(<중종실록>)

독성이 든 철쭉으로 담가 만든 백화주와 소주를 함께 아버지(남편)에게 마시게 했다? 혹 ‘소주+백화주’ 폭탄주가 아니었을까. 중종 때(1534년) 남효문은 아내와 수양아들이 정을 통한 사실을 전해듣고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효문은 노모와 마주앉아 소주를 폭음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남효문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중종실록>)

역대 임금들은 틈만 나면 금주령을 내렸다. 하지만 누구도 ‘소주 한잔’의 유혹을 견디지는 못했다. 1489년(성종 20) 전연사(典涓司) 노비가 내의원의 홍소주를 훔쳐 마신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주 한잔 훔쳐먹은 죄가 사형? 성종도 ‘처벌이 너무 중하다’ 싶었는지 감형처분을 내렸다.

임금이라고 ‘카~’ 소리 절로 나는 ‘쐬주 한잔’을 마다했을까. 1736년 검토관 조명겸이 영조 임금에게 감히 ‘지적질’을 해댔다.

“듣자하니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 했다면서요. 과연 그렇습니까. 조심하시고 경계하소서.”

“아니다. 난 목마를 때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아마도 남들이 그걸 소주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

영조가 쩔쩔매며 변명을 해댄다. 그러나 절대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은 끝까지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