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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만리장성 왜곡과 저우언라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만리장성 왜곡과 저우언라이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2-06-13 21:14:17 

 

‘조장(助長)’이라는 단어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농부가 벼를 빨리 자라게 할 요량으로 손으로 모를 잡아뽑아 늘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이 한창일 때 ‘실제 상황’이 벌어졌다. 일부 농가에서 논두렁마다 밤새도록 전등을 밝히고, 다른 논에서 자란 벼들을 뽑아 한 논에 죄다 모아놓고 수확량 자랑을 벌였다. 당중앙의 수확할당량에 맞춰 식량 생산량이 급증했음을 과시한 ‘현대판 조장’이었다. 지금의 중국은 어떤가. ‘만리장성’을 ‘사만리장성’으로 ‘조장’하고 있다. 예전엔 그래도 대국의 풍모를 풍겼다. 1957년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사진)의 담화를 보자.

“한족이 다른 민족을 침범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 지방민족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대한족주의도 반대한다.”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과 역사왜곡을 우려한 것이다. 1962년부터 북한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다”고 중국에 요청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는 것이니, 중국 입장에서는 ‘무례’한 요구였다.

하지만 저우 총리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 발굴대’의 구성을 허락한 것이다. 1963년 6월28일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저우언라이는 더욱 깜짝 놀랄 발언을 남긴다.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까지 한다.

“…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상경용천부)였다. …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발해=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지금의 중국학계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중국은 진·한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이는 분명한 침략이다.”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 대상’, 즉 고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한 것은 두고두고 흥미롭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조상들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끔찍이 사랑한 중화주의자였다. “중국인과 공산당원 중 하나만 택하라면 중국인을 택하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랬지만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만큼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