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17] 美·日·러 '만주 쟁탈전'이 대한제국 멸망 5년 늦췄다/국권침탈 13개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17] 美·日·러 '만주 쟁탈전'이 대한제국 멸망 5년 늦췄다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7.19 23:06

러시아풍 衣冠의 고종·순종 - 광무황제(고종·왼쪽)와 황태자(순종)가 러시아 차르의 제복을 차려입고 촬영한 사진. 러시아는 만주를 둘러싼 미·일과의 분쟁으로,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멸망을 지연시키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1910년 한국 병합을 공식화하는 데 왜 5년이나 걸렸을까? 헤이그 밀사(密使)로 대표되는 고종의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 노력이나 의병들이 전개한 구국투쟁 때문이라는 것이 국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는 인과(因果)관계에 부합하는 역사서술은 아니다.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막을 힘이 없었다거나,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을 맺은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다는 우리의 통념도 사실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만주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일본과 미·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대한(對韓)정책의 기본방향은 대가 없이 한국 병합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6년 7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한 것도 만주의 경제적 대동맥인 동청(東淸)철도 남만(南滿)지선을 일본이 장악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 의장이었던 넬리도프(Nelidoff) 러시아 대표는 대한제국 대표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에서 양측이 관할하는 철도를 연결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적대관계가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빼앗긴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파견했던 헤이그 밀사가 부메랑이 되어 고종을 직격(直擊)했다. 1907년 7월 19일 일제의 강박에 못이긴 고종은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넘겼고, 며칠 뒤 정미 7조약(1907.7.24-제3차 한일협약)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이 강탈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일본은 1907년 7월30일 러일협약(1차)으로 러시아의 반대를 잠재웠지만, 넘어야 할 산은 하나 더 있었다. 만주에 대한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약속한 1905년의 밀약을 공수표로 만들어 버린 러시아와 일본의 만주 분할은 미국의 배일(排日)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1909년 미국이 '만주 제철도 중립화안'을 내걸고 만주 진출에 박차를 가하자, 러시아는 1910년 7월4일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병합을 허용하는 대가로 북만주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러·일 두 나라의 야합을 영국·프랑스가 용인하자 전쟁을 감행할 만큼 이해관계가 크지 않았던 미국은 만주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대한제국은 세계지도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한일병합-1910년 8월22일)

예나 지금이나 국익을 우선하는 국제정치판에 영원한 적(敵)도 없고 우방도 없는 법이다.

 

 

 짱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1910년 한국 병합을 공식화하는 데 왜 5년이나 걸렸을까? ... 美·日·러 '만주 쟁탈전'이 대한제국 멸망 5년 늦췄다...^-^

 

진짜 이유는 만주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일본과 미·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1909년 미국이 '만주 제철도 중립화안'을 내걸고 만주 진출에 박차를 가하자, 러시아는 1910년 7월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병합을 허용하는 대가로 북만주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그리고 한 달 뒤 대한제국은 세계지도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ㅠㅠ...^-^

- 2013년 3월15일 금요일...수산나 -


 

일본의 국권침탈...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고종황제가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비밀친서...1903년 11월23일...^-^

 

 

 한일의정서 [韓日議定書]한국·일본 역사 | 브리태니커..........1904년 2월23일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1904년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제1단계로서 한국에 강제하여 교환한 의정서.

일본은 러일 교섭의 회담이 진행중인 1903년 10월부터 한일의정서 체결을 시도했다. 즉 한국정부가 일본과 함께 러시아를 대적한다는 공수동맹을 맺거나 일본이 전쟁중 한국을 보호한다는 조약을 맺거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일본의 대 러시아 전쟁에 전략적인 편의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같은 해 10월부터 매수공작금을 투입하여 이지용(李址鎔)·민영철(閔泳喆)·이근택(李根澤)을 조종하면서 일을 추진시켜, 1904년 1월에는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밀약이 조인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월 23일 국외중립선언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러일전쟁의 발발로 실패했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하야시는 고종을 만나 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했다. 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던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翼)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보부상의 핵심인 길영수(吉永洙), 육군참장 이학균(李學均), 육군참령 현상건(玄尙建) 등을 연금한 뒤 2월 23일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의정서의 내용은, ① 한일 양국이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믿고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②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할 것, ③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할 것, ④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이때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한 편의를 제공할 것, 또한 대일본제국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가능할 수 있도록 할 것, ⑤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일전쟁의 개전과 더불어 진주한 일본군은 진용을 정비한 뒤, 같은 해 3월 11일 한국임시파견대를 한국주차군으로 개칭하고 3월 17일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신으로 서울에 파견하여 의정서에서 규정한 내용의 실천을 한국정부에 강요했다. 나아가 의정서에 근거해 군사적 목적을 위한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했고, 3월말에는 한국의 통신기관도 군용으로 강제로 접수했다. 또한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경부(京釜)·경의(京義) 철도부설권도 일본에 제공했다. 결국 러시아와의 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앞서 5월에 결정했던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을 실천에 옮기고자 같은 해 8월 22일 하야시 공사로 하여금 외부대신서리 윤치호와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하게 했다.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22일...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체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1차 한일 협약(第一次韓日協約, 일본어: 第一次日韓協約)은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대한제국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이다. 협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關한 協定書)이다.

 

 

광무 8년(갑진년)인 1904년 8월 22일에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한 정부(大韓政府)는 대일본 정부(大日本政府)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하여 대한 정부에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 실시할 것.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한명을 외무 고문으로 하여 외부에 용빙하고, 외교에 관한 요무는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실시할 것.
  3. 대한 정부는 외국과의 조약 체결이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토의할 것.

광무 8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

메이지 37년 8월 22일

특명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대한민국과 일본국의 무효 재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제1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1]

 

 

러일전쟁 [Russo-Japanese War]러시아·일본 역사 | 브리태니커

1904~05년 만주와 한국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배경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또한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권(利權)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함으로써 확보해 갔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對) 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세출의 평균 5할을 군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이로써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했다.

또한 러시아도 삼국간섭 후 1896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단거리로 잇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旅順]·다롄[大連]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근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은행 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여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했으며, 러시아도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02년 10월 제1차 철병을 단행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만주정책으로의 선회로 1903년 4월로 예정된 제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같은 해 7월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 아무르 지역과 관동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진행과정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진주했다.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奉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뤼순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으나,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수락하여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의의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간의 세력각축의 결과였으며, 이는 한국 및 만주를 둘러싼 양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경에는 프랑스의 자본이 각각 지원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Treaty of Portsmouth]러시아·일본 조약 | 브리태니커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맺은 강화조약.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만주와 한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일본 사이에 일어난 제국주의 전쟁이었는데, 1905년 1월 뤼순항[旅順港]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자 열강들의 조정·강화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결국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렸다. 강화회담은 일본측이 제시한 12개 조항을 토대로 진행되어, 9월 5일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러시아의 재무장관 비테와의 사이에 전문 15조, 추가조약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주요내용을 보면 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의 승인, ② 뤼순·다롄[大連]의 조차권 승인, 창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 할양, ③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의 남사할린 섬 할양, ④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것 등이다.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한국은 일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을사늑약문(제2차 한일협약문)...1905년 11월17일...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체결...^-^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1905년 11월17일) 체결 기념 사진....ㅠㅠ...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고종황제의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1905년 11월17일) 무효선언문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을사늑약(1905년 11월17일) 직후 '코리안 페이퍼'에 실린 풍자화

 

민영환 유서...1905년 11월30일 오전 6시경...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 

 

민영환-을사조약과 순국

당시 국내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군사 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을 성토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실패했다. 이어 2차 상소를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다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그해 11월 30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세·김봉학(金奉學)·홍만식(洪萬植)·이상철(李相喆) 등이 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저서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稿〉·〈해천추범 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일합방 과정

1910년대에 맺어진 경술국치라고도 하는데 말그대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것을 한일 합방이라고 합니다.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뺏긴 과정을 간략히 설명 드립니다.

- 먼저 개항이 있게 됩니다.
개항은 조선이 일본배를 공격했다는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1876년에 일본 군함이 출동한 가운데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시작합니다.
이 조약은 '조선과 일본이 평등하다'(1조)는 내용을 시작으로 개항에 필요한 일본인 거주 지역 설치, 일본인 거주지역의 치외법권에 대한 내용 등 총 10개 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조약의 목적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고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데 있었죠.

- 다음은 을사조약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군사력으로 한일의정서, 제1차한일협약(한일협정서) 등을 체결하여 조선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합니다.
또 일본은 조선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맺어나가는 중 1905년에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한일협약)을 맺게 되고 이 조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합니다.
물론 고종이 절대로 서명을 안 했으므로 국제법상 관례에 따르면 무효죠.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조선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킵니다.
1907년에는 정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내정권도 합법적으로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합니다.

- 끝으로 한일합방입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의 사법·경찰권까지 탈취한 일본은 1910년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여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맺어집니다.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본은 조선인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합니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에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를 양도한다는 조칙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조선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 양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망하였습니다.

에듀넷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