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전쟁] 역사왜곡 시비, 숭선군은 누구인가? 역사 산책
2013/08/11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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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의 주말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이 역사를 왜곡했다며 전주이씨 숭선군파 종친회가 법적대응에 나섰다고 한다.
인조와 후궁 조씨 사이에서 출생한 인조의 서자 숭선군(崇善君·1639-1960)의 출생과정 등을 왜곡하고 비하했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후궁 조씨는 첫 번째 딸은 남혁이라는 잔반(殘班)과의 사이에 태어난 것을 숨기고 인조의 자식인 것처럼 했고, 친정으로 가 낳은 두 번째 아이도 딸이자 미리 준비한 다른 남자 아이로 바꿔치기 했는데 그가 숭선군인 것으로 그렸었다.
이에 대해 전주이씨 숭선군파 종친회는 '역사적으로 숭선군이 정상적으로 출생한 인조의 아들임이 분명한데도 재미를 위해 왜곡 방송을 해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조장하고 종중의 명예를 현저히 훼손했다'며 '시정을 촉구했지만 방송사 답변이 미온적이어서 법적조치를 하게 됐다' 밝혔었다.
종친회 관계자는 "왜곡된 내용이 짧게 방송됐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잊힐 수도 있겠지만 그 설정으로 이야기가 계속 전개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종중의 입장"이라며, 다음 주 서울중앙지법에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하고, 이후 손해배상 청구 등의 본안 소송을 제기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제작사 관계자는 "장르 특성상 허구적 내용이 포함될 수밖에 없고 이런 허구는 다른 작품에도 자주 있는 일"이라며, 10일 방송이 시작되기 전엔 해명 고지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날 방송된 41회에서도 후궁 조씨(김현주)가 숭선군과 관련, "성이 뭘까? 김씨일까, 박씨일까? 그보다 어부의 자식이 임금이 되면..." 운운, 숭선군파 종친회가 듣기엔 거슬리는 대사가 그대로 나왔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숭선군 일가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 한다. 나중에 귀인이 된 후궁 조씨는 2남1녀를 두었다.
맨 처음 낳은 딸은 효명옹주(孝明翁主)로 나중에 김자점의 손자인 세룡(世龍)과 혼인해 부귀를 누렸으나 1651년 시부와 시조부가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남편까지 처형되고 옹주는 유배되었다. 1658년 효종의 특명으로 풀려나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복권되는 못했다.
인조의 지극한 사항을 받았다는 효명옹주 다음으로 낳은 자식은 숭선군 징(徵)과 낙선군(樂善君) 숙(潚)이다.
도승지를 지낸 신익전(申翊全)의 딸과 혼인한 숭선군은 어머니가 김자점 옥사에 연루돼 사약을 마시고 죽은 이듬해 역모에 가담했다는 무고를 당해 강화 교동(喬桐)에 유배됐었다.
하지만 송시열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상소, 유배 4년만인 1656년(효종 7) 18세 때에 풀려났다.
1690년 1월 향년 52세로 별세하자 숙종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3년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을 주라'는 특명을 내리기 까지 했다 한다.
숭선군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이강(李棡) 등 두 아들과 딸 넷을 두었으나 이강은 일찍 죽었다. 동평군 이항은 숙종의 총애를 받아 종친으로는 처음으로 1687년 혜민서 제조가 되었고,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로, 1689년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종친이 혜민서 제조를 맡은 건 잘못이라며 남구만(南九萬) 등이 여러 차례 규탄하고 나섰으나 숙종은 오히려 남구만 등을 처벌하였다.
그 뒤 선조가 가장 총애했다는 인빈(仁嬪) 김씨의 제사를 받드는 일을 맡게 되면서, 토지 100결과 노비 150명을 하사받기도 했다.
동평군은 청나라를 자주 다녀왔다. 1687년엔 동지사(冬至使)로, 1689년엔 왕비 민씨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가서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돌아왔다. 또 1691년엔 사은사로, 1699년에는 사은사 겸 동지사로 다녀오기도.
그러나 희빈 장씨가 사사된 1701년 신사(辛巳)의 옥 때 절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숭선군보다 두 살 아래인 낙선군도 김자점 옥사 때 귀양을 갔다가 형과 함께 같은 날 풀려나 서울에 돌아왔으며, 1659년 정월에 작록을 회복 받았다. 어릴 때부터 당파싸움에 휩쓸렸으나 현명하고 행실이 좋아 숙종은 그를 총애하며 우대했다고 한다.
[출처] [꽃들의 전쟁] 역사왜곡 시비, 숭선군은 누구인가? |작성자 56kimy
1. 인조의 후궁 '귀인 장씨'에 대하여
역사에서는 인조의 가족관계에서 후궁으로 '귀인 장씨'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귀인 장씨'에 대하여 그외 자세한 내용은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인조(가족관계)
- 할아버지 : 조선 14대 임금 선조
- 아버지 : 추존 원종
어머니 : 인헌왕후 구씨
- 능창대군
- 능원대군
- 서모 : 김씨
- 서형 : 능풍군
원비 :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 한준겸의 딸
- 소현세자 왕(昭顯世子, 1612년-1645년)
- 봉림대군 호(鳳林大君 淏, 1619년-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
-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1622년-1658년)
-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 1624년-1629년)
- 조졸 : 2남 1녀
- 계비 :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 조창원의 딸, 조존성의 손녀
후궁 : 폐귀인 조씨(廢貴人 趙氏) - 참판 조익전의 딸
- 숭선군 징(崇善君 澂)
- 낙선군 숙(樂善君 潚)
- 효명옹주(孝明翁主) : 김세룡(金世龍)에게 하가(下嫁)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후궁 : 숙의 나씨(淑儀 羅氏)
[꽃들의 전쟁]조귀인의 최후
꽃들의전쟁 조귀인은 인조의 총애와 신임 하에 갖은 악행을 하다가 인조가 죽은 이후 그 세력이 급속도로 몰락하게 된다.
인조 생전에는 찬밥신세였던 인조계비 장렬왕후 조씨는 왕실 어른으로 인조 다음왕 효종에게 대접받고, 자신은 뒷방 신세가 되자 조귀인의 투기가 장난 아니었다.
사실 왕이 죽으면 후궁은 사가로 물러나 이후 조용하게 살다 죽는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한번 권력의 맛을 본 조귀인은 그러기에 너무나 권력에 맛들게 되었나보다.
대비가 된 장렬왕후 조씨와, 그리고 왕의 처소인 대전, 그리고 인평대군의 처소 등에
뼛가루 및 절단된 시체 등을 묻어놓고 저주의 술을 행하였으며...
그 사돈관계인 김자점이 아들, 손자와 함께 역모를 일으켜 그것이 연결되어
결국 효종에게 자결을 명 받게 된다.
조귀인은 끝내 자결하고, 조귀인 자녀들인 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는 유배를 가게 되었지만
그들이 나이가 어렸고, 효명옹주 외에는 역모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기 대문에
숭선군과 낙선군은 다시 관작히 복호되었고 유배지에서 풀려난다.
효명옹주는 유배지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관작이 복호되지는 않았다.
화무 십일홍이라 했던가! 죽고나면 가져갈게 아무것도 없는 공수래 공수거 인것을 어찌 그리도 권력에 눈이 멀었을꼬 조귀인의 자결을 통해 우리네 인생이 쫒는 권력의 뒤안길을 되짚게 한다.
인조후궁 소용 조씨의 최후 죽음 자식
인조후궁 중 소용 조씨가 최근 '꽃들의 전쟁'이란 사극으로 드라마화 되었습니다.
'꽃들의 전쟁'은 시작 당시에는 소현세자를 재조명 하겠다고 했는데... 보니까 완전 소용 조씨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구요.
인조후궁 소용 조씨 행적
인조후궁 소용 조씨는 첩의 딸이라는 것 밖에 출신이나 본관이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숙원으로 인조의 후궁을 시작하여, 나중에는 종1품 귀인의 첩지까지 받아 조귀인 이라고도 하지만,
나쁜짓을 소용일때 많이 해서 인조후궁 소용 조씨, 혹은 조소용이라고 하지요.
그녀가 한 대표적인 악행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인조에게 모함한 것입니다.
야사에는 소용 조씨가 사람을 사주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하였고,
민회빈 강씨의 전복 독살미수 사건을 뒤에서 꾸며, 민회빈 강씨가 사약을 받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조의 정궁인 장렬왕후가 있었지만, 인조의 총애를 뒤에 업은 소용 조씨가 둘 사이를 이간질하여
장렬왕후는 거의 인조에게 소박당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인조후궁 소용 조씨 최후 죽음
이렇게 하늘에 날라가는 새를 떨어뜨릴만큼의 권세는... 인조가 죽은 이후 힘을 잃었습니다.
인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 즉 효종이 즉위하였는데
소용 조씨의 딸의 시할아버지... 즉 소용 조씨의 사돈인 김자점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들키고, 그 과정 중
소용 조씨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와, 자신의 며느리이기도 한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효종은 인조후궁 소용 조씨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소용 조씨는 최후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가 총애했던 후궁이어서 당시 직분이었던 귀인의 사망 절차에 따라 장레를 치루었다고 합니다.
인조후궁 소용 조씨 자식
인조후궁 소용 조씨는 인조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는데요,
장녀 효명옹주, 둘째 숭선군, 셋째, 낙선군입니다.
효명옹주는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에게 시집갔습니다.
소용 조씨가 최후 죽음을 맞고, 소용 조씨의 자식들, 숭선군과 낙선군은 강화도로 귀향갔으나 나중에 관작이 복호되었습니다. 딸인 효명옹주는 역모와 직접적 관련이 있어 나중에도 신분을 되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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