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217] 무료불평(無聊不平)
조선일보/사외칼럼/정민 한양대교수 고전문학
입력 : 2013.07.03 03:03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우성전(禹性傳)에게 쓴 짧은 편지에서 "그의 글은 앞서 보았는데, 그 말에 무료불평의 뜻이 조금도 없어 깊이 경복할 만합니다"라고 했다. 충분히 무료불평을 품을 만한 상황임에도 그가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인상적이라는 내용이다. 사람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면 무료불평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료불평을 꾹 눌러 이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쏟아 부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한유(韓愈)는 '고한상인을 전송하는 글(送高閑上人序)'에서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다른 기예는 익히지 않았다. 기쁨과 노여움, 곤궁함과 즐거움, 원한이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고 썼다. 그의 초서가 위대한 것은 손재주로 쓴 글씨가 아니라 그 안에 무료불평의 기운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정귀(李廷龜)도 권벽(權擘)의 시집에 쓴 서문에서 "희로애락과 무료불평을 반드시 시에다 펼쳐서 밖으로 영욕(榮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에 대한 몰입과 맞바꾸지 않았다"고 썼다. 이럴 때 무료불평은 건강한 창작 활동의 원천이 된다.
젊음은 본능적으로 무료불평의 상태다. 무언가 하고 싶은데 세상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할 수 있는데 인정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라서 무료불평에 빠지기도 한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구성원의 무료불평을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의 동력으로 삼도록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 무료불평을 술 먹고 부리는 행패로 풀게 하면 안 된다. 자신에게 나는 분(忿)을 남에게 퍼부으면 못쓴다. 시스템의 마련만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중요하다.
꿈이 있고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세상은 나를 외면하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이때 생기는 마음이 무료불평이다.
사람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면 무료불평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료불평을 꾹 눌러 이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쏟아 부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다른 기예는 익히지 않았다. 기쁨과 노여움, 곤궁함과 즐거움, 원한이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고 썼다. 그의 초서가 위대한 것은 손재주로 쓴 글씨가 아니라 그 안에 무료불평의 기운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이럴 때 무료불평은 건강한 창작 활동의 원천이 된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구성원의 무료불평을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의 동력으로 삼도록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에게 나는 분(忿)을 남에게 퍼부으면 못쓴다. 시스템의 마련만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중요하다.
[ 당나라 문학가이자 철학자 한유(韓愈)]
모이자 http://yanbian.moyiza.com/236168 2010-11-25 14:41:16
중국 당나라 문학가이며 사상가인 한유 자는 퇴지인데 등주 남양 창려 출신이다. 한유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 사람으로 24살에 진사가 되였다. 그 후 추천에 의해 사문박사로 되였다. 36살에는 국자감의 국학박사가 되였고 후일 장안에 들어가 이부시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문학가로 소문난 한유는 기탄없이 직간하는 대신이었다. 그가 "희서평정기념비" 비문을 쓴 후 조정을 노엽히는 일이 생겼다.
당현종은 만년에 불법을 숭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법문사에 있는 호국진신탑에 불사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것은 석가모니 진신 사리인데 그것을 30년에 한번 씩 참배하면 만사가 순조롭고 사람마다 평안하다로 한다.
당헌종은 그 말을 곧이듣고 특별히 사람을 30명을 파견하여 법문사의 진신 사리를 장안으로 모셔오도록 했다. 불교를 믿지 않던 한유는 숱한 재물을 낭비하면서 불사리를 모셔오는데 강한 불만을 품었다. 헌종이 법무사에 있는 진신 사리를 가져다 궁중에 안치하라고 영을 내리자 한유는 이를 반대하는 불골표를 올렸다. 그는 상소문에서 불법은 중국에서 옛날부터 있은 것이 아니고 한명제 이후부터 점차 서역에서 전해온 것이며 역사상 불교를 숭상한 왕조는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한 것을 보아 불교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다. 그의 상소문이 문구가 격렬하여 헌종의 노여움을 샀다. 크게 노한 헌종을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아낀 재상 배도가 간언하여 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한유는 중국 문학사에 있어서 그의 공적으로 산문의 문체개혁을 들 수 있다. 한유는 재래의 대구 중심의 변려문에 반대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달의(Ó¹ëò)가 되는 문체를 만들어 고문이라 일컫고 친구 유종원 등과 함께 이를 발전시켜 중국 산문 문체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고문이란 중국 고대 문장이라는 뜻이다. 대략 고문이란 선진시대부터 시작하여 전한 , 후한에 이르기까지 문장을 말한다. 위, 진, 남북조 시대에 병려문이 극도로 성행하던 때에도 산문의 전통은 중단되지 않고 병려문을 즐겨 쓰는 학자들은 산문도 겸해 쓰기도 했다. 그러나 수, 당에 이르면서 문장은 내용, 사상을 담지 않고 오직 형식주의에 그쳤다. 한유와 유종원에 의해 일어난 고문운동을 통해 중국의 문학가들의 문장에서 병려문과 잡다한 수식이 일소되고 고대 경전의 문체와 진, 한 시대의 문장과 같은 소박하고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한유는 순수한 문학적 정취로 산문을 씀으로써 기존의 고대 학술저서나 조정에서 쓰는 문자와는 크게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유의 시호는 문공이다. 한유는 시 창작에 있어서 서정적 테마에 한정하지 않고 논설을 전개하거나 사실을 기술하는 등 지적인 흥미를 정련된 표현으로 나타내기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그의 시가 때로는 산문적이며 난해하다는 평도 받았으나 제재의 확장과 더불어 송나라 시에 끼친 영향이 아주 크다. 사상 면에서는 한유는 유가사상을 존중하고 불교와 도교를 배격하였으며 도통을 중히 여겨 문자 해석보다 사상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한유의 저서로는 이고와 공저한 "논어필해", "창려선생집40권","창려선생집외집", "유문" 등이 있다.
한유는 기원 824년 12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의 창 2010-11-24 15:00:08
장욱 [Chang Hsu, 張旭]중국 당 [唐] 서예가 브리태니커
(병) Zhang Xu (웨) Chang Hsü ?~ ?
중국 당대(唐代) 중엽의 서예가.
자는 백고(伯高). 오군(吳郡:지금의 장쑤 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사람이다. 관직은 금오장사(金吾長史)를 지냈다. 서법(書法)에 정통했으며, 초서(草書)로 가장 이름을 떨쳤다. 자유분방한 기세와 독특한 형상,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새로운 풍격을 갖추었다. 안진경(顔眞卿)이 일찍이 그에게 필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한 적이 있다. 광초(狂草)로 명성을 얻고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회소(懷素)가 그의 초서법을 계승·발전시켰다. 당시에 그의 서법은 이백(李白)의 시가(詩歌), 배민(裵旻)의 검무(劍舞)와 함께 '3절'(三絶)로 불렸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종종 크게 취한 뒤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돌아다닌 뒤 붓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장미치광이'[張顚]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욱은 시도 잘 지었는데,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나 하지장(賀知章)·장약허(張若虛)·포융(包融)과 함께 '오중4사'(吳中四士)로 불렸다. 해서(楷書)로는 비각(碑刻) 〈낭관석기 郎官石記〉가 있으며, 현재 전하는 〈초서고시사첩 草書古詩四帖〉은 그의 친필이다.
유성룡 [柳成龍]조선 문신 브리태니커
1542(중종 37)~ 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개요
임진왜란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출신과 관직생활
할아버지는 군수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570년 부수찬·수찬을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오르고, 1571년 병조좌랑,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 1577년 검상·사인·응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81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임진왜란기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明)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啓)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亂民)의 초무(招撫)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4년 〈청훈련군병계 請訓練軍兵啓〉·〈청광취인재계 請廣取人才啓〉·〈전수기의십조 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 그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사회·경제 시책과 국방대책
그의 사회·경제 시책은 대부분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과 전후수습에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되었다. 그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민심수습책으로 그는 임란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라 수관(授官)·면천(免賤)·면역(免役)·부과(赴科) 등 파격적인 포상제를 실시하고, 군사비 이외의 기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공물(貢物)·진상(進上) 등을 경감해주는 등 백성에게 실제 혜택이 있게 하여 파탄·와해된 민심을 수습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문벌에 관계없이 각 방면의 인재를 등용하며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병력을 확보하는 등 인적 자원을 동원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공물·둔전에서 나오는 양곡(糧穀), 노비의 신공(身貢) 등을 미곡으로 대납(代納)하게 하고, 파격적인 포상을 대가로 모속(募粟)을 행하며, 소금을 구워 곡물로 바꾸거나 중강개시(中江開市)를 통해 중국의 곡물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전시군량확보를 위한 응급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16세기 이래의 공물제(貢物制)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중 그가 제기한 국방대책은 민심수습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사회·경제 시책 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는 중앙군으로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이 구상은 난민·유민(流民)을 구제하기 위한 둔전론(屯田論)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즉 훈련도감의 경우 정병으로 양성하기 위한 군인 외에 서울에서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5영(五營)을 두고, 각 영에 2,000명을 배치하여 해마다 반수는 성중(城中)에 남아 연습하고 나머지는 성외에서 빈 땅을 골라 둔전을 만들고 윤번으로 교대시켜 군량공급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종전의 양민만이 아니라 양반과 천인(賤人)까지도 편입시키는 속오군도 둔전의 설치와 표리관계에 있었다. 그가 제시한 둔전책은 전란으로 동요하고 있는 농민을 안정시켜 무농경작(務農耕作)하게 하는 방안으로 유리민이나 일본군 점령하의 농민을 둔전 가능지역에 모아 정부에서 소·종자·농기구 등을 지급하고 둔전을 경작시켜 궁극적으로는 주민보호·군량확보·기민구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사상
그는 스승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또한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그는 이황처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이기로 분석하지 않았지만, 도심을 한결같이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일찍부터 양명학을 연구했으나 정통 성리학자로서 이를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양명학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지(知)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을 행(行)으로 병립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서애집〉·〈징비록 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운암잡기〉 등이 있으며, 편서로 〈대학연의초〉·〈포은집〉·〈퇴계선생연보〉·〈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 精忠錄〉·〈효경대의 孝經大義〉 등이 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군위 남계서원(南溪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의성 빙산서원(氷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동을 대표하는 퇴계의 제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는데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학자가 될 꿈을 갖고 성장하던 중 20세에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유성룡의 담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굳은 의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글을 읽었고, 승려는 그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한다.
1562년 가을, 21세의 유성룡은 형 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유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찬탄하였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유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20대 시절 유성룡은 스승인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힘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스승인 이황 선생을 통해 유성룡이 가장 관심을 갖고 배운 책은 [근사록(近思錄)]이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으로, 송나라 때에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집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근사록]은 향후 그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출세 가도를 달리다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던 형과 달리 유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 진사시에 , 1566년 25세에 대망의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28세에는 성균관전적에서 행정의 중심인 공조좌랑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의 탄탄대로와 같은 벼슬생활에는 타고난 자질과 함께 가문의 배경, 그리고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인종(仁宗, 조선 12대왕. 중종의 장남)을 문소전(왕의 신주가 모셔진 곳)에 배향하는데 있어 공론을 형성했던 공로도 작용했다. 30세 때는 병조좌랑에, 그리고 이조좌랑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1573년 부친상을 당하여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마친 1576년 유성룡은 사간원헌납이란 직책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유성룡은 타고난 경세가(經世家)로 알려져 있는데, 1607년(선조 40)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편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할 때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또한 외교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학문적 역량을 본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귀국한 뒤에 이 사실이 알려져 더욱 존경과 총애를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에서 승문원권지부정자라는 첫벼슬을 시작으로 1580년에 부제학에 올랐으며,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성룡이 벼슬살이 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논란이 생기는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47세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는 이때를 전후로 고위관료가 되는데, 이 무렵 동인계의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반란)가 일어났다. 정여립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정은 서인 천하가 되었다. 선조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에 속하는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서인의 좌장격인 정철이 귀양을 가면서 동인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러한 정국에서 유성룡은 50세에 이르러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성룡은 더 이상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내분에 휩싸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때 유성룡은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유성룡은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했지만, 이는 뒷날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는 빌미가 되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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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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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캐스트에서는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교육과학기술부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국사 교과서의 표기법에 따라 '유성룡'으로 표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청백리열전 : 유성룡
유성룡(柳成龍) - (1)
유성룡<柳成龍(중종 37년(1542)∼선조 40년(1607)>의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춘공(文忠公), 본관은 풍산(豐山; 지금의 경북 안동군 풍천면)이며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아들이다.
유성룡은 청백리로보다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으로 더욱 유명하며 학문과 행동이 뛰어난 인물이다. 일찍이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에 뜻을 두고 나라의 재정과 군사력을 튼튼히 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바른 정치로 국가와 민족에 봉사했다.
명종 19년(1564), 23세 때 사마시의 양과(생원과 진사)에 급제하고 2년 뒤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나간 다음, 이조좌랑, 사간, 직제학, 이조참의, 상주목사, 대사간, 대사헌, 예·병·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관서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 등을 역임했다.
뛰어난 총명과 판단력(判斷力)
유성룡은 어려서부터 풍자가 매우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났다. 4세 때 이미 독서할 줄 알았고, 6세에 대학(大學)을 배웠다. 약관에 경상도 도산(陶山)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있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퇴계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주위의 학자들에게 “이 아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예견한대로 그의 슬기와 판단력은 뒤에 학문과 행동에도 나타났다. 그가 공조좌랑으로 재임 시 성절사(聖節使; 조선조 때 해마다 중국 황제의 생일축하로 중국에 보내는 사절)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성절사가 북경에 도착하자 그 곳 태학생(太學生) 수백 명이 나와서 사절 일행을 구경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그들에게 명나라의 유학자 가운데 누구를 으뜸으로 삼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서로 상의 끝에 왕양명(王陽明)과 진백사(陳白沙)를 으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유성룡은 “왕양명(王陽明)과 진백사는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고 오직 설문청(薛文淸)만이 학문이 순수하고 바르다.”라고 갈파함으로써 태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유성룡은 선조 3년(1570)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궁궐에 입시할 때 마다 그의 응대함이 명백하고 사리를 분석함이 정밀하였으므로 당시 으뜸가는 강관(講官)으로 평가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왕명에 의해 호당(湖堂; 문관 중에서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을 닦게 하던 독서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조 5년 이준경(李浚慶)이 타계하면서 유소(遺疏)를 올려 조정안에 붕당의 징조가 있음을 경고했다. 그러자 그게 크게 말썽이 되어 조정에서는 모든 관원들이 이를 성토하고 나섰으며, 심지어는 이준경의 관직까지 삭탈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대신의 유소가 부당한 점이 있으면 그 시비를 가리면 그만이지 죄까지 주려는 것은 대신을 예우하는 체모가 아니다.”라고 역설하여 모두 그의 의견에 따르게 되었다.
청백리열전 : 유성룡
유성룡(柳成龍) - (2)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나라 지켜
선조 23년(1590)에 유성룡은 우의정에 승진하고, 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왕조 때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자고 주청하던 일)의 공으로 광국훈(光國勳) 3등에 서록되어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리고 다시 다음해에는 특명에 의해 우의정으로서 이조판서를 겸임하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에 일본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이 조선을 침범할 징조가 보이므로 유성룡은 장차 장수가 될 인재로서 권율(權慄),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했다. 이에 따라서 권율은 형조정랑에서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승진하고, 이순신은 정읍현감(井邑縣監)에서 전라러좌수사로 특진하여 왜구에 대비케 했던 것이다.
선조 25년(1592) 4월에 왜병이 대거 침입하자 유성룡은 다시 병조판서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그는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의 여러 장수를 남쪽으로 파견하였으나 신립의 충주패전으로 서울이 위태로워져 조신들은 국왕과 함께 서울을 떠나 의주(義州)까지 파천의 길을 떠났다.
서행(西幸)길에 나선 선조는 동파(東坡)에 도착하자 앞으로 임금이 머물 곳을 조신들에게 물었다.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의주에 머물고 있다가 만약에 힘이 다하여 8도가 다 그들에게 짓밟히게 되면 즉시 명나라에 가서 내부(內附;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전하께서 단 한 걸음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될 것입니다. …… 지금 동북(東北)의 여러 지방이 건재하고 호남지방의 충의의 선비들이 곧 봉기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명나라에 내부한다고 말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물러나와 이항복을 책망하기를 “어째서 나라를 버리고 간다는 말을 경솔히 하는가? 이 사실이 밖에 나가면 인심이 크게 와해(瓦解)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누가 능히 이를 수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항복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에 탄복했다.
유성룡은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직되고 평양에서 다시 부원군으로 서용[敍用; 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되었다. 그 뒤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할 때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이를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함경도 쪽으로 파천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갈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가 조선에 대한 구원의 길을 열게 했다.
또 관서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진무(賑撫; 도와주어 위로함)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서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했다. 또 왜병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죽여 적의 연락을 끊기도 했다.
청백리열전 : 유성룡
유성룡(柳成龍) - (3)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의 만남
그는 이처럼 임진왜란 중에 정무를 한 몸에 지고 외교, 군무, 민정 등에 종횡무진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전국을 승리로 종결지음으로써 사직(社稷; 나라 또는 조정을 이르는 말)을 이 땅 위에 반석 같이 수호하였던 것이다.
유성룡은 조정에 있는 동안 왕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 언제나 의리를 진술했다. 그리고 선조 또한 유성룡을 대단히 중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면 스스로 감복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군과 양신이 서로 만난 것이 보기 드문 일이아고 했다.
선조 16년(1583), 유성룡은 부제학이 되었다가 당쟁이 더욱 격화되자 벼슬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선조는 그를 특별히 함경도관찰사, 대사성, 경상도관찰사 등으로 연달아 불렀으나 사람들의 모함이 있어 그는 이를 굳게 사양하였다.
반대파들이 이를 기화(奇貨; 뜻밖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물건. 또는 그런 기회. ‘핑계’로 순화)로 그를 탄핵하자 선조는 승정원에 하교하여 “…… 유성룡은 어진 선비이자 재능이 있어 조신 중에 뛰어난 인물이다. 다만 노모가 생존하기 때문에 소환에 응할 구 없을 따름이다.”라고 비호함과 동시에 그에게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할 것을 간곡히 종용했다.
다음 해에 선조는 유성룡을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홍문관 제학에 제수했다. 유성룡은 이를 과분한 직책이라고 해서 또 다시 사양했다. 선조는 친히 사찰을 내려 “과인과 경은 비록 의리로 봐서는 군신(君臣)이나, 정리로는 친구와 같은 처지이다. 또 경의 학문과 능력은 능히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으며, 과인만큼 경을 아는 사람은 없다.”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17년, 이번에는 의주목사 서익(徐益)이 상소하여 그를 큰 간신(奸臣)이라고 배척하였다. 선조는 이에 대해 “유성룡은 군자이며 현대의 대현(大賢)이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면 스스로 감복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어떤 간담이 큰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리쳤다.
이항복(李恒福)이 청백리로 추천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선조 32년에 유성룡은 북인(北人)들의 공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풍산 하회((豐山 河回)로 돌아갔다. 이 때에 그는 전쟁 중에 겪은 일들을 회고하는 징비록[懲毖錄; 유성룡이 선조 25년(1592)부터 31년(1598)까지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에 대하여 적은 책.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 겸 임진(臨陣) 지휘자였던 작자가 전쟁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었다.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 따위의 수난상을 수기(手記)로 기록한 중요한 사료임]을 집필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 조선, 명나라, 일본 3국간의 외교 경위와 전란의 추이 등을 서술한 것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조 34년(1601), 유성룡은 청백리로 뽑혔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항복이 첫 번째로 그를 추천,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이 분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서 말할 수 없다. 다만 미오(郿塢; 중국의 동탁이 많은 재물을 쌓아두었다는 곳의 땅 이름)의 무고를 씻어주기 위함이다.”라고 말하였다. 유성룡이 재물을 모았다고 북인(北人)들이 허위로 그를 탄핵하였으나 사실이 아니므로 그의 억울함을 씻어주기 위해 청백리로 추천한다는 뜻이다.
선조 37년, 그는 다시 부원군에 서용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그 해 7월에 호종훈(扈從勳) 2등에 수록되고 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리고 선조 40년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고 이 해 5월에 타계했다.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부음을 들은 선조는 크게 슬퍼하여 조정에서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영남의 선비들은 그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했다.
✻참고문헌 ;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國朝名臣錄
♥ 歷史와 人物 ♥-16
柳成龍(유성룡)(1):(1542~1607)-(倭亂克服 主役, 天下의 名相)
戰略家(전략가)이며 大學者(대학자)요 能吏(능리)에 뛰어난 經世家(경세가)였던 壬辰倭亂(임진왜란)收拾(수습)의 主役(주역)柳成龍(유성룡)은,中宗37年 10月 오늘날의 慶尙北道(경상북도)義城郡(의성)點谷面(점곡면)沙村里(사촌리)外祖父(외조부)金光粹宅(김광수댁)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자랐던 本家(본가)의 慶北(경북)安東市(안동시)豊川面(풍천)河回里(하회리)는 널리 알려진 대로, 柳成龍(유성룡)이 남긴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가장 韓國的(한국적)인 民俗文化財地域(민속문화재지역)으로 保存(보존)되고 있다. 그를 기리는 河回(하회)마을의 記念館(기념관)앞에는, 오직 河回(하회)마을만을 보고 싶다며 찾아왔던 英國(영국)엘리자베스女王(여왕)이 記念(기념)으로 심은 구상나무가 싱싱하게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柳成龍(유성룡)의 本貫(본관)은 豊山(풍산),그의 5代祖(5대조)柳洪(유홍)은 金宗直(김종직)의 姑母父(고모부)로 官職(관직)이 左軍司正(좌군사정), 할아버지 柳公綽(유공탁)은 干城郡守(우성군수), 아버지 柳仲瑛(유중영)은 黃海道觀察使(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뛰어난 學者(학자)였다. 柳成龍(유성룡)은 타고난 材質(재질)이 特異(특이)하여, 네 살 때 글을 읽기 始作(시작)하였고, 6歲(6세)때 從祖父(종조부)에게서 大學(대학)을, 8歲(8세)때 아버지에게서 孟子(맹자)를, 9歲(9세)들어서 부터 論語(논어)를 배웠다.
열 일곱살때 世宗(세종)의 아들 廣平大君(광평대군)의 玄孫(현손)李坰(이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1歲(21세)때 陶山(도산)에 隱居(은거)하고 있던 碩學(석학)李滉(이황)을 찾아가 近思錄(근사록)을 익혔는데, 이때 62歲(62세)의 圓熟(원숙)한 大學者(대학자)李滉(이황)은, 젊은 柳成龍(유성룡)을 對(대)하고“하늘이낸 人物(인물)이니 將次(장차)나라를 爲(위)해 큰일을 할 것이다”하고 豫言(예언)하였다. 25歲(25세)에 大科(대과)에 及弟(급제)한 柳成龍(유성룡)이 처음 받은 官職(관직)은, 承文院(승문원)의 從9品(종9품)權知副正字(권지부정자)였다.職名(직명)앞에 ‘權知(권지)’가 붙었으니 一種(일종)의 臨時(임시)條件附(조건부)의 最末段(최말단)職位(직위)에 發令(발령)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갖춘 人品(인품)이 高邁(고매)하고 學文(학문)이 卓越(탁월)했던 柳成龍(유성룡)은, 官職(관직)에 들어선지 3年만에 正6品(정6품)工曺佐郞(공조좌랑)을 거쳐,公職(공직)의 紀綱(기강)을 다스리는 司憲府(사헌부)의 監察(감찰)이 되어서는 聖節使(성절사)李後白(이후백)의 書狀官(서장관)으로 明(명)나라 燕京(연경)에 들어가 學文(학문)과 品行(품행)으로 中原(중원)에 名聲(명성)을 날렸다. 그는 明(명)나라 太學生(태학생)들과 學文(학문)을 論(논)하는 자리에서 그 들 數百名(수백명)이 한 목소리로 王陽明(왕양명)과 陳白沙(진백사)의 學文(학문)을 치켜세우는데 對(대)하여 柳成龍(유성룡)은,薛文淸(설문청)이 正統(정통)儒學(유학)의 宗主(종주)임을 說破(설파)하여 感嘆(감탄)과 尊敬(존경)을 받았다.
薛文淸(설문청)은 곧 中國(중국)明(명)나라 時代(시대)河東(하동)사람으로 程朱學(정주학)의 理論(이론)을 鼎立(정립)하여 이른바 ‘河東學派(하동학파)’를 일군 大學者(대학자)였다. 本名(본명)은 薛敬軒(설경헌), ‘文靑(문청)’은 死後(사후)에 받은 諡號(시호)였다.뿐만 아니라 柳成龍(유성룡)은 宮中集會(궁중집회)序列(서열)에 儒生(유생)을 道士(도사)와 僧道(승도)의 뒷줄에 세우는 잘못을 指摘(지적)하여,卽席(즉석)에서 이를 고치게 함으로써 그들 朝廷(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가 1569年(宣祖2)11月境(11월경)이었으니, 柳成龍(유성룡)의 나이 28歲(28세)때였다. 29歲(세)들어 賜暇讀書(사가독서)에 뽑혀 學文(학문)에 專念(전념)하기도 한 柳成龍(유성룡)이었으나, 官職(관직)이 높아질수록 벼슬하기보다 鄕里(향리)에서 學文(학문)에 心醉(심취)하기를 바라 辭職(사직)하기를 여러 번 請(청)했다. 그러나 임금 宣祖(선조)는 그를 몹시 아낀 나머지 王(왕)의 秘書室長格(비서실장격)인 都丞旨(도승지)에 任命(임명)하여 側近(측근)에 두기도 하였고,司憲府(사헌부)의 首長(수장)大司憲(대사헌)에 特任(특임)하기도 했는데, 이무렵 黨爭(당쟁)이 露骨化(노골화)되어 힘깨나 쓰는 大臣(대신)들은 모두 東人(동인)·西人(서인)으로 便(편)이 갈라지게 되니,柳成龍(유성룡)은 本意(본의)아니게 東人(동인)으로 指目(지목)되고 말았다.
그러찮아도 달갑지 않은 벼슬자리였는데,黨派(당파)싸움까지 벌어지기 始作(시작)하니,柳成龍(유성룡)은 벼슬에 幻滅(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番(번)에는 늙으신 어머님을 모셔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落鄕(낙향)해 버렸다. 이에 宣祖(선조)는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살필 수 있는 慶尙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자리를 내려, 그를 기어코 官職(관직)에 머물도록 하기 까지 했다. 이렇게 하여 임금의 寵愛(총애)를 벗어나질 못한 柳成龍(유성룡)은, 뒤이어 兵曺(병조)·禮曺(예조)·吏曺(이조)의 判書(판서)를 거쳐 1590年 宣祖(선조)23年 5月(5월)右議政(우의정)에 拔擢(발탁)되니,49歲(49세)比較的(비교적)젊은 나이에 政丞班列(정승반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柳成龍(유성룡)은 極口(극구)辭讓(사양)하며 政丞(정승)되기를 마다하니,宣祖(선조)는 그를 光國功臣3等(광국공신3등)에 豊原府院君(풍원부원군)으로 封(봉)하기 까지 하며 辭讓(사양)함을 받아 드리지 않았다.右議政(우의정)에 吏曺判書(이조판서)를 兼(겸)했고, 곧 左議政(좌의정)에 올라서도 吏曺判書(이조판서)자리를 그대로 지녔다가 뒤에는 兵曺判書(병조판서)를 兼(겸)하여,兵權(병권)을 잡고,軍事(군사)에 關(관)한 人事權(인사권)을 掌握(장악)하게 되었는데, 바야흐로 倭敵(왜적)의 움직임이 愁傷(수상)쩍자 어릴 때 한동네 親舊(친구)였던 李舜臣(이순신)을 全羅左水使(전라좌수사)에 拔擢(발탁),倭敵(왜적)의 南海(남해)바다 出沒(출몰)에 對備(대비)하는 等(등),國防對策(국방대책)에 腐心(부심)하였다.
마침내 倭亂(왜란)이 터지자 朝廷(조정)은 夢塵(몽진)길에 領議政(영의정)李山海(이산해)를 罷職(파직)시키고 柳成龍(유성룡)을 그 자리에 앉히니 柳成龍(유성룡)은,自身(자신)도 責任(책임)이 있다며 한사코 辭讓(사양)하는 가운데 하루를 넘겼다. 이튿날 아니나 다를까 柳成龍(유성룡) 과 黨派(당파)를 달리하며 猜忌(시기)하는 者(자)들이 柳成龍(유성룡)도 問責(문책)하여 歸養(귀양)까지 보내야 한다고 떼를 썼다. 이리하여 하루 만에 설자리가 없어진 柳成龍(유성룡)은, 잘못 되면 歸養(귀양)살이 까지 해야 할 版(판)이었다. 이때 都丞旨(도승지)李恒福(이항복)이 憤慨(분개)하여 들고 일어나,柳政丞(유정승)을 헐 뜻는 者(자)들을 向(향)해“그 따위 100名(명)이 달려들어도 柳大監(유대감)한분을 못 當(당)한다!”며 高喊(고함)을 질러 柳成龍(유성룡)을 擁護(옹홍)하니, 그는 하루 領議政(영의정)으로 記錄(기록)되고 職位(직위)를 잃은 채 朝廷(조정)에 머무는 處地(처지)가 되고 말았다.
[출처] ♥ 柳成龍(유성룡)(1)歷史와 人物 -16 ♥|작성자 청암
歷史와 人物 ♥-17
柳成龍(유성룡)(2):(1542~1607)-(倭亂克服 主役,天下의 名相)(2)
李恒福(이항복)의 거센 擁護(옹호)로 歸養(귀양)을 免(면)한 柳成龍(유성룡)은, 官職(관직)이 없는 白衣(백의)의 몸으로 朝廷(조정)에 머물기만 하는 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새로 領議政(영의정)에 任命(임명)된 人物(인물)은 留都大將(유도대장)李陽元(이양원), 그는 텅빈 서울에 남아 都城(도성)을 지키는 任務(임무)를 맡았었으나, 力不足(역부족)으로 밀려 났다가,모처럼 한番(번)敵(적)을 擊退(격퇴)한 功(공)이 있어 領議政(영의정)發令(발령)을 받았는데, 國政最高責任者(국정최고책임자)가, 最一線(최일선)에서 敵軍(적군)과 맞딱드려 銃(총)을 겨누는 꼴이었다.
結局(결국)李陽元(이양원)은 王(왕)이 遼東(요동)땅으로 건너 가고 말았다는 헛 所聞(소문)을 傳(전)해 듣고 自決(자결)하고 말았다. 朝廷中心(조정중심)에 있어야 할 領議政(영의정)이 軍幕(군막)에서, 그것도 誤報(오보)를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그 때의 나라 꼴이 그 地境(지경)이었다. 壬辰年(임진년)12月,柳成龍(유성룡)은 平安道體察使(평안도체찰사)가 되었는데, 이는 아직 남아있는 地域(지역)의 戒嚴司令官格(게엄사령관격)이었다.
柳成龍(유성룡)은 곳곳을 누비며 軍士(군사)를 募集(모집)하고 軍糧米(군량미)를 確保(확보)하는 한便(편), 거드름만 피우는 明(명)나라 將帥(장수)李如松(이여송)으로 하여금 作戰(작전)을 펼치도록 說得(설득)하는 等(등)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까지하며 싸움터를 누비던 柳成龍(유성룡)은, 이듬해 1月 李如松(이여송)과 함께 平壤城奪還作戰(평양성탈환작전)을 指揮(지휘)하여 큰 功(공)을 세웠다. 그는 李如松(이여송)이 후려치는 말채찍에 얼굴을 맞는 受侮(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싸움을 回避(회피)하려는 明(명)나라 軍士(군사)들을 戰鬪(전투)에 臨(임)하도록 事情(사정)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눈물겨웠다.
1593年 宣祖(선조)26年 10月 4日,漢陽都城(한양도성)으로 돌아온 宣祖(선조)는 10月 27日 마침내 柳成龍(유성룡)을 두 番(번)째 領議政(영의정)에 任命(임명)하였다. 國土(국토)가 차츰 回復(회복)되자 柳成龍(유성룡)은 忠淸(충청)·慶尙(경상)·全羅(전라)·京畿(경기)4道體察使(4도체찰사)로 領議政(영의정)을 兼(겸)하여 나라의 運命(운명)을 짊어진 莫重(막중)한 位置(위치)에 서게 되었다.
戰亂(전란)이 끝 날 무렵,倭軍(왜군)의 工作(공작)으로 빚어진 誤解(오해)가 朝廷(조정)과 明(명)나라 사이의 큰 外交問題(외교문제)로 부풀어 졌다. 朝廷公論(조정공론)이 領議政(영의정)柳成龍(유성룡)을 明(명)나라에 나가 解明(해명)하도록 하자, 柳成龍(유성룡)은 이미 左議政(좌의정)李元翼(이원익)이 戰亂(전란)을 收拾(수습)하는 일로 北京(북경)에 가 있는 마당에, 敵(적)의 虛無孟浪(허무맹랑)한 離間(이간)질에 말려 左·領議政(좌.영의정)두 政丞(정승)이 함께 明(명)나라에 가는 것은, 나라 體統(체통)에 問題(문제)가 있다며 拒否(거부)하였다.
그러자 柳成龍(유성룡)을 猜忌(시기)하는 大北派(대북파)들이 모처럼 빌미를 잡은 듯 들고 일어나 그를 彈劾(탄핵)하니, 柳成龍(유성룡)도 잘 됐다며 未練(미련)없이 辭職(사직)해 버렸다. 이 受落(수락)되자 猜忌(시기)하던 者(자)들은 國政(국정)을 어지렵혔다는 얼토당토않은 罪目(죄목)을 덧씌워 柳成龍(유성룡)을 罷免處分(파면처분)해 버렸다. 宣祖(선조)31年 11月 19日의 일이니,이날은 工巧(공교)롭게도 그의 어릴 때 親舊(친구)李舜臣(이순신)將軍(장군)이 露梁(로량)에서 마지막 倭敵(왜적)을 깨뜨리고 壯熱(장렬)히 戰死(전사)한 날이었다. 12月, 柳成龍(유성룡)은 都城(도성)을 떠나 故鄕(고향)으로 내려 가면서 한首(수)의 詩(시)를 지어 남겼다.
『田園歸路三千里(전원귀로삼천리)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삼천리/
幽幄深恩四十年(유악심은사십년)왕실의 깊은 은혜는 40년/
立馬渡米回首望(입마도미회수망)말을 세워 머리 돌려 바라보니/
終南山色故依然(종남산색고의연)남산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네.』
柳成龍(유성룡)은 故鄕(고향)으로 가는 길에 豊基(풍기)에 머무르고 계시는 老母(노모)를 먼저 찾아 뵈는데, 바로 그날 沒人情(몰인정)한 反對派(반대파)들은 한 술 더 떠, 그의 官爵(관작)을 모조리 빼앗고 庶人(서인)으로 身分(신분)을 짓이겨 버리니, 떠나는 사람 뒷 꼭지에 돌 팔매질을 해대는 꼴이었다. 柳成龍(유성룡)은 老母(노모)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라일에 奔走(분주)하여 자주 찾아 뵙지 못함을 告(고)하며 容恕(용서)를 비는데,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柳成龍(유성룡)은 一生(일생)이 매우 不憂(불우)하였다. 32歲(32세)때 첫 아들을 얻었었는데 그만 腰切(요절)하였고,둘째 아들마져 28歲(28세)로 世上(세상)을 등졌다. 거기다가 그의 나이 47歲(47세)때 夫人李氏(부인이씨)마져 世上(세상)을 뜨니 不幸(불행)한 일을 連續(연속)으로 겪은 셈이었다.그토록 하기 싫어했던 벼슬이었는데, 임금의 懇曲(간곡)한 挽留(만류)를 뿌리치지 못해 몸이 부셔지도록 忠誠(충성)을 다하고도, 猜忌(시기)하는 무리들의 弄奸(농간)때문에 말이 안 되는 對接(대접)을 받은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2年 뒤,朝廷(조정)은 柳成龍(유성룡)에게 職帖(직첩)을 되돌려 주고,마침 世上(세상)을 뜬 王妃(왕비)朴氏(박씨)의 葬禮(장례)에 參禮(참례)하라는 通知(통지)를 내리니, 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서울로 올라가 東大門(동대문)밖 길가에서 弔問客(조문객)들 틈에끼어 지나가는 王妃(왕비)의 喪轝(상여)에 절만 하고 선 걸음으로 내려와 버렸다.「廉謹淸白吏』(염근청백리)에 뽑힌 柳成龍(유성룡)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極度(극도)로 窮乏(궁핍)하여, 살던 草屋(초옥)이 빗물에 무너져 버린 일도 있었다.朝廷(조정)에서는 그에게 奉朝賀(봉조하)라는 職位(직위)를 내려 그의 生計(생계)를 돌보았다.
宣祖(선조)40年 5月 6日 마침내 柳成龍(유성룡)은 66歲(66세)를一期(일기)로 波瀾萬丈(파란만장)했던 一生(일생)을 磨勘(마감)하였다. 文忠公(문충공)으로 諡號(시호)가 내려진 그의 墓所(묘소)는 慶尙北道(경상북도)安東市(안동시)豊山邑(풍산읍)壽洞(수동)에, 貞敬夫人(정경부인)全州李氏(전주이씨)와 合墳(합분)으로되어 있다. 墓誌銘(묘비명)은 孫子(손자)인 鎭安縣監(진안현감)柳元之(유원지)가 짓고 李相正(이상정)이 글씨를 썼으며, 大學者(대학자)鄭經世(정경세)가 그의 詩章(시장)을 整理(정리)하여 남겼다.
長水察方(장수찰방)柳汝(유여),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柳袗(유진)이 柳成龍(유성룡)의 아들이었고, 高宗(고종)때의 右議政(우의정)柳厚祚(유후조)는 柳成龍(유성룡)의 8代孫(8대손)이다. 큰 人物(인물)柳成龍(유성룡)의 學文硏究(학문연구)實積(실적)等(등), 많은 일들을 紙面關係(지면관계)로 모두 쓰지 못함이 매우 안타깝다
[출처] ♥ 柳成龍(유성룡)(2) 歷史와 人物 -17 ♥ |작성자 청암
보물 제460-2호
명 칭 : 유성룡 종가 유물 - 유성룡 모부인 분깃문기 (柳成龍 宗家 遺物 - 柳成龍 母夫人 分衿文記)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민간문서/ 분재기류
수량/면적 : 1축
지정(등록)일 : 1967.07.15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종가길 69, 영모각관리소 (하회리)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유영하
관리자(관리단체) : 영모각관리소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 가운데 유성룡 종가 유물 - 유성룡 모부인 분깃문기(柳成龍 宗家 遺物 - 柳成龍 母夫人 分衿文記)는 유성룡 선생 어머니의 곤문기로, 크기는 가로 362㎝, 세로 67.2㎝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는데, 여러 곳이 벌레로 인해 훼손되었다. 이 문서는 선생 어머니의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것인데, 분재기란 재산과 노비를 자식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를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출처 : 문화재청
유성룡의 任辰戰亂史-<징비록>
-서애 유성룡 著, 이재호 驛, 역사의 아침 刊, 400쪽
징비록(懲毖錄)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씩 읽어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발탁하고, 임금에게 천거하였던 서애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임진란을 회고하며 그 아픔을 잊지말고 앞으로의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사관의 서술로 집필한 책이기 때문이다.
'징비(懲毖)'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우리민족의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위한 기록인 것이다.
1592년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에 우리민족이 통탄할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상륙하여 한반도를 도륙한 처참한 비극을 가져왔던 임진왜란이다.
1. 사실 임진란이 발발하기 전에 외교적 징후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정세는 풍신수길이 무력으로 집권을 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었고, 정권교체 이전부터 조선에 조공을 해왔는데 풍신수길이 오만해져서 이를 뒤엎고 조선도 자신에게 조공하러오라고 강압하며 일본 스스로는 조선 반도를 거쳐 명나라에 조공하러 가겠다고 주장하였다.
외교적으로 3국 관계가 불안한 상황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으로 이에 대한 군사방책을 세우지 않았다. 임진란은 외교전략상의 실패였으며, 조정의 안일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2. 저자인 서애 유성룡은 인재를 알아보고 중히 쓰는 통찰력이 있었다.
성호 이익은 "유성룡이 왜란을 막은 것이다", "서애가 큰 의(義)를 이뤘다"라고 칭송했다. 이는 서애가 이순신을 발탁, 천거하여 국난을 극복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돌이켜 보면 이순신의 활약이 평양성까지 밀고 올라왔던 왜군의 보급로와 원정군을 봉쇄해 지상군이 힘을 못쓰고 지란하게 전투하다가 결국 화해조약을 통해 난국을 끝낼 수 있었다.
3. 처참한 참상-백성은 죽고, 조정은 파천, 신하는 도피
서애는 왜란 발발 이전에 외교적 마찰과 일본의 정세를 미리 알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선조에게 당시의 진관제를 제승방략제로 바꾸자고 진언을 하였지만 조정실료로부터 거부당했다.
진관제는 각 고을마다 사변이 있을 때 민간 병사들이 우선 대처하고 중앙에서 장수를 내려보내 방어하는 훈련제도였는데 이 제도가 평시에 훈련도 하지않아 흐지부지되어 있었고, 민간병사들은 장수가 올 때까지 들에나가 기다리는 상황이니 지역에 있는 유능한 장수를 발탁하자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왜군이 부산을 짖밟고, 백성을 도륙하며 경상도, 전라도의 두갈래길을 통해 북진하는 동안 살아남은 백성이 없었고, 군,현의 장수와 관리들은 자신들의 살아날 방도만 구하며 왜군에 협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군의 막강한 군세가 파죽지세로 한양부근까지 밀어닥치자 조정은 종묘를 포기하고 사직만을 들고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파천하게 되었다.
4. 탄금대의 명장, 신립 장군의 또다른 면
신립장군은 왜군을 맞아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선조와 조정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지만 마지막 탄금대의 배수진 전략으로 전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면을 서애 유성룡이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체찰사였던 유성룡이 선조의 명을 받아 군사를 모아 임지로 떠나려는데 도순변사인 신립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군사를 반 강제로 빼앗아 초기 방어선인 충청도 조령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신립은 성정이 폭악하여 가는 곳마다 군기를 세우려고 병사들을 처형했으며, 조령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도 이미 조령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문만 믿고 다시 충주로 올라와 탄금대에서 배수진 전략을 펴 어이없게도 8000여 군졸을 전몰시켰다.
이에 대해 유성룡은 신립을 "날쌔어서 당시에는 이름을 얻었으나 군사 쓰는 계책은 장점이 아니었다", "신립을 중용한 것을 후회한다"라고 혹평하였다.
5. 우리가 징비(懲毖)해야 할 것들...
임진란 이후에도 우리 민족은 정유재란, 일제강점기, 청일전쟁, 6.25전쟁 등의 크나큰 국난을 겪어왔다. 역사에는 만약(If)은 없다지만, 서애 유성룡의 징비(懲毖)의 의미를 새기고 미리 준비했더라면 이런 아픈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로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다. 더우기 남과 북이 이념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세계유일의 한민족 분단국가이다. 우리나라가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호혜의 외교력을 발휘해야만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난세의 혁신 리더 유성룡
▶ 조선 최고의 재상 서애 유성룡의 삶을 통해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의 모습을 재조명하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당쟁이라는 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유성룡의 삶을 통해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의 모습과 400년을 이어온 그의 인생철학을 재조명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여러 가지 사료와 유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유성룡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밝혀내고,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또한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유성룡의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를 대신해 정치, 행정, 병법, 경제 등 전란 내내 국정 전반을 책임진 리더로서의 역량을 제시한다. 이 밖에도 ‘양명학은 왜 비판받았는가?’ ‘의혹에 쌓인 정여립 사건’ ‘수수께끼의 일본 사신 귤강광’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 등 왜곡되어 있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놓았다.
▶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따라 유성룡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戶布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유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으며,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포기해가면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민생정책을 실시한다.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군주는 정조다. 『홍재전서』「일득록(日得錄)」 ‘인물’조를 보면 정조는 유성룡을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 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 이 시대에 왜 우리는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란 평가를 받은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정적으로 여기던 선조는 3일 동안 정사를 중지시킨다. 『서애선생 연보』에는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대부들이 성남(城南)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하며, 시민들이 조정에서 정한 일자보다 하루를 더 철시하면서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에서 “선생의 충성과 갈력(竭力)과 주선이 없었다면 위험에 처해 쓰러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선조조의 중흥을 이룩하고서 부자, 형제 등 국민들이 서로 삶을 유지하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편안한 데 거처하며 직업에 종사하는 바가 진실로 선생의 힘이 아니고서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유성룡이 황해도에서 소금을 구워 전라도에서 쌀로 바꾸어 도성에 공급하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이 얼마이며, 그가 대동법(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들이 얼마나 됐겠는가.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타파하려 했던 유성룡.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그가 임진왜란과 당쟁을 승전으로 이끈 원동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능력을 꼽을 수 있다.
① 위기돌파 능력 -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회피하거나 모른 체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② 비전제시 능력 -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③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④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⑤ 능수능란한 외교력 -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⑥ 유연한 사고방식 - 유성룡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⑦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 지은이_ 이덕일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다. 특히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조선 왕을 말하다』(전 2권), 『조선왕 독살사건』,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조선선비 살해사건』 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등은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제 침탈이 가시화된 무렵부터 일제 패망과 정부 수립에 이르는 시기를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한 『근대를 말하다』는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외면해왔던 근대를 통찰하여 현재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한국 사회의 갈등 치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다.
• 본문 중에서
••• 의주로 가는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인데, 의주행은 곧 요동행을 뜻했다. 나라는 망해도 선조 자신은 살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선조의 뜻이 요동행에 있음이 분명해지면서 그대로 결정되려는 찰라, 말을 자르고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좌의정 유성룡이었다. (중략) 국왕과 대신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면 그것으로 조선은 멸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자른 것이다. _ 1장 18~19쪽, <도주 길에 오른 선조> 중에서
•••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은 이해하지만 유성룡은 지금이 당파를 나누어 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쪽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열도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북쪽에서는 여진족 통합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림이 동서로 갈리고,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상황에서 운명의 해 임진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_ 2장 47쪽, <당쟁의 시대> 중에서
••• 황윤길과 김성일이 계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드디어 풍신수길의 답서가 왔다. 답서가 온 것은 다행이지만 내용이 문제 투성이였다. 풍신수길의 「국서」는 통상적인 국서의 형식과는 사뭇 달랐다. 국서에 “나의 어머니께서 일찍이 나를 잉태하셨을 때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 점쟁이)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_ 3장 65쪽, <전란의 그림자> 중에서
••• 이순신은 훈련원 근무 8개월 만에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좌천된다. 그러다가 선조 13년(1580) 7월 전라 좌수군 산하 발포(鉢浦, 전남 고흥군 도화면) 만호(萬戶, 종4품)로 승진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충무공 행록』은 “서애(西厓) 유 정승만이 같은 동리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로서 공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알아주었다”라고 전하고 있듯이 유성룡은 권력 실세들과 척이 져 지방으로 쫓겨난 이순신을 생각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_ 4장 78쪽, <유성룡과 이순신> 중에서
••• 유성룡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해서 임란의 참화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는 김장생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장생이 만든 말은 이것뿐이 아니다. 김장생은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이발의 팔십 노모와 어린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_ 4장 100쪽, <전란대비> 중에서
••• 유성룡은 서울 수복에 전쟁의 조기 종결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보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군량 확보에 많은 신경을 썼다. 명군은 군량이 준비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성룡은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공문을 보내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 중에서 전투할 수 없는 인원을 징발해 곡식운반을 맡기고, 평안도 세 고을의 관곡(官穀)을 배로 청룡포(靑龍浦)를 거쳐서 황해도로 옮겼다.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는 군사들이 행군할 연도(沿道)에 곡식을 비축해 제공하게 했다. _ 8장 190쪽, <반격> 중에서
••• 선조는 유성룡이 광해군 편에 서면 자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 선조가 최선의 임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성룡은 지금 선조를 사퇴시킬 경우 국가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광해군이 즉위하면 ‘선왕파’와 ‘현왕파’로 나뉘어 극심한 정쟁이 벌어질 것이다. (중략) 유성룡은 선조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_ 10장 246쪽, <유성룡의 영의정 복귀> 중에서
• 주요 목차 소개
저자의 글
제1부 전란의 시대, 칼끝에 서다
1. 도주 길에 오른 선조 | 2. 당쟁의 시대(조선에서 양명학 서적을 처음 접하다/양명학은 왜 비판받았는가?/단숨에 승진한 배경/붕당의 조짐/의혹에 쌓인 정여립 사건) | 3. 전란의 그림자(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수수께끼의 일본 사신 귤강광/교꾼의 목을 벤 종의지/답서를 둘러싼 실랑이) | 4. 유성룡과 이순신(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이순신의 뒤늦은 출사/계속되는 이순신의 불운) | 5. 전란대비(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진관법으로 돌아가자) | 6. 임진왜란 발발(도체찰사가 되다/무너지는 조선군/운명의 탄금대 전투/패닉 상태의 선조/유성룡 파직되다) | 7. 풍전등화(연전연패/풍원 부원군에 제수되다/평양성 함락되다/무너지는 기강)
제2부 통한의 시대, 나라를 다시 세우다
8. 반격(계사를 올리다/평양성 패전과 탈환/배후 차단/삼도 도체찰사/행주대첩과 서울 탈환) | 9. 소강상태(강화회담과 유성룡의 반발/서울 수복의 명암/조선과 경략부의 갈등/훈련도감을 설치하다) | 10. 유성룡의 영의정 복귀(양명서를 다시 접하니/경략의 간계와 싸우다/경략 송응창을 실각시키다) | 11. 국방정책(진관체제로 복귀하다/양반도, 천인도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노비 충군에 대한 반발/벼슬길에 나가는 노비들/이몽학의 난/김덕령 연루되다) | 12. 민생정책(대동법을 실시하다/들끓는 반대론/상업을 장려하다) | 13. 정유재란 전야(기축옥사 연루자의 신원을 주장하다/강화교섭) | 14. 정유재란 발발(이순신 제거되다/원균 출진하다/파죽지세의 일본군/반격/조명연합군의 총공세) | 15. 유성룡의 실각(유성룡 공격받다/유성룡이 공격받은 이유/노량해전) | 16. 두문불출
서애 유성룡 연보
[출처] 난세의 혁신 리더 유성룡|작성자 위즈덤하우스
서애 유성룡 인생의 수수께끼 .
- 이덕일 지음 -
서애 유성룡의 인생에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는데 , 그중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가 실각한 이유다 .
북인 이이첨이 유성룡을 최초로 탄핵한 선조 31 년 ( 1598 ) 9 월 말은 풍신수길이 사망해 8 월 28 일과 9 월 5 일에 이미 철군령이 내려진 후였다 .
장장 7 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려는 찰나였다 .
7 년 전쟁 동안 유성룡은 자타가 공인한 전란 극복의 선두였다 .
임란 이듬해부터 도체찰사에 영의정까지 겸임하고 전쟁을 이끌었다 .
그런 그가 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마자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
< 중략 .. >
.. .. .. ..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종전되기 전에 유성룡을 제거해야 했다 .
종전 후 선조의 권윈는 끝없이 추락할 것인 반면 유성룡의 성가는 하늘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겼다 .
그런데도 유성룡이 공격당하는 것을 방어해주는 벼슬아치들이 드물었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유성룡 인생의 핵심이다 .
그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
광해군 즉위년 ( 1608 )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 년 후인 숙종 34 년 ( 1708 ) 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
고종 9 년 ( 1871 )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도 마찬가지다 .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다 .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정책들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
심지어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주인들이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
나라가 망해도 사대부들의 계급적 특권은 침해될 수 없다는 태도였다 .
바로 여기에 유성룡의 실각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있다 .
유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유성룡을 실각시킨 것이다 .
그가 실각한 후 각종 개혁입법들이 무효화되었음은 물론이다 .
유성룡이 실각한 선조 31 년 ( 1598 ) 11 월 19 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천거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
이 마지막 해전은 안전한 철수를 요청하는 일본군에게 이순신이 "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다 " 고 거절해 벌어진 전투다 .
의병장 조경남의 < 난중잡록 > 은 이 전투에서 "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다 " 고 전한다 .
< 서애선생 연보 > 는 유성룡의 탄핵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 " 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
이순신은 유성룡의 실각이 곧 자신에게 닥칠 미래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융복을 입은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서 북채를 들고 싸웠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였기에 자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군주는 정조다 .
그는 < 홍채전서 > < 일득록 > ' 인물 ' 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
[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 상신 ( 유성룡 ) 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 ( 유성룡 ) 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 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 ( 유성룡 ) 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
옛날 당 태종이 이필에 대해서 , "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 " 라고 말했는데 나 또한 서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의 뜻이 있었다 . ]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타파했고 ,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 유성룡 .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
- 설득과 통합의 리더 < 유성룡 > 중에서 .. -
[출처] 유성룡의 실각과 이순신 장군의 죽음 . - 제 2 부 -|작성자 초계문신
유성룡(柳成龍):중종37년(1542)∼선조40년(1607)
할아버지는 간성군수 유공작(柳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字)는 이현(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厓)다.
명종19년(1564)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였다.
선조1년(1568) 대교, 1569년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부수찬․지제교․수찬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73년 정언(正言)․이조좌랑 등을 지내고 1576년 전한․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선조11년(1578) 사간이 되었다.
1579년 직제학․동부승지․군기시정․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는데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을 원해 상주목사로 가서 예의와 겸양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였다.
선조16년(1583)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만들었고 그 해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제학(提學)을 겸했으며 1585년 역모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상소가 있어 사직을 원하자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고향으로 가서 지냈다.
선조21년(1588)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내고 1590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서도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세자를 정하는 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처벌 수위를 두고 같은 동인끼리 의견이 갈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온건파는 유성룡 등이고 강경파는 이산해 등이었다.
1591년 왜란(倭亂)이 있을 것에 대비해 장수재목을 천거하라고 하자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현감 이순신을 각각 광주(光州)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또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계략(計略)을 주고 요충지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또 소금을 구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조26년(1593)10월 선조를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임진왜란 중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국정을 독단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선조31년(1598) 자기 심복들을 요소에 앉히고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임금을 오도한다는 상소가 이어지자 선조는 유성룡을 믿는다고 했지만 결국 파직하였다. 1600년 벼슬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였으며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던 기간이 10여 년이었는데 임금의 대우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연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임금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영의정으로 있을 때 각종 보고서와 편지가 이곳 저곳에서 모여들었는데도 좌우로 응대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당시 신흠이 비변사의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신흠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부르는 대로 쓰게 하였는데 문장이 오래도록 다듬은 것과 같았다.
유성룡의 건의로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제조(提調)가 되어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등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충청도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지방의 산성을 수선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방어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었다. 선조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 신종록愼終錄 ․ 영모록永慕錄 ․ 관화록觀化錄 ․ 운암잡기雲巖雜記 ․ 난후잡록亂後雜錄 ․ 상례고증喪禮考證 ․ 무오당보戊午黨譜 ․ 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탄핵하는 사람이 “유성룡이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고 온갖 보화를 저장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그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어 여러 아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거의 살아갈 도리가 없었다. 우복 정경세가 유성룡의 아들에게 준 시(詩)에
하상의 유업 시서(詩書)뿐이니 河上傳家只墨庄(하상전가지묵장) 자손들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兒孫蔬糲不充腸(아손소려불충장) 어쩌다 십년을 정승자리 있으면서 如何將相三千日(여하장상삼천일) 성도의 뽕나무 팔백주도 없었던가 倂欠成都八百桑(병흠성도팔백상) 라 하였고 또 “ 참소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그 얼굴이 뜨거울 것이다.” 고 하였다.<성호사설> * 뽕나무 팔백주는 제갈공명이 임종시 성도에 뽕나무 팔백주와 토질이 나쁜 땅 15경이 있으니 자손들이 먹고 입는데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
** 4개 자료 모두에 수록되어 있음.
** 유성룡이 파직되어 고향에 있을때 조정에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원(畵員)을 보냈으나 죄인이 무슨 초상화를 그리느냐며 돌려보냈다고 함. 현재 유성룡의 초상화라고 하는 것은 근래에 만든 것임.
현재의 유성룡 초상화
유성룡하면 임진왜란 전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약간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정설로 알려져 있다. 유성룡은 당대의 사람들에 비하여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여 벼슬에 오른 사람이다. 유성룡 이후 후손들이 9대까지 벼슬에 오르는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유성룡이 저술한 <서애집>
서애는 유성룡의 호다
유성룡은 서애집를 통하여 자녀들에게 어떻게 공부 할 것인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의 이러한 공부법은 당대 선비들의 공부법 이기도하며, 학문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공부(독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젊은 시절 바둑을 두며 두뇌를 계발한 유성룡은 자녀에게 책읽기를 특히 강조했다. 그의 집안은 유성룡이 명종 때 벼슬길을 나선 것을 포함해 고종 때까지 종손 9대가 내리 벼슬을 했다. 이는 집안에 끊이질 않는 책 읽는 소리 덕분이었다. 유성룡은 마흔 살에 얻은 아들 유진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아들이 열 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귀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알려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 본격적으로 지도를 했다. 그 결과 아들 유진은 스물여덟 살에 진사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유성룡은 아들에게 전쟁 등 사회 혼란기에도 글공부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서애교자훈’에 그의 자녀 교육관이 나타나있다. 그는 아들에게 그를 주며 당부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럽고 위태로워도 남자라면 공부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부하지 못하는 수만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다. 유성룡은 난리통이라고해서 공부를 그만두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님을 자식들에게 주지시키고, 공부는 환경에 주어지면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부하는 첫번째 비결인 것이다. 이제부터 환경 때문에 공부 못했다고 하는 핑계는 대지 맙시다.
기초가 되는 책부터 완전히 익혀라.
공부는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읽을 책은 사서(四書)로 지정했다. 유성룡의 표현을 빌어보자.
“사서는 지식의 창고다. 사서를 근본으로 삼지 않으면 다른 책을 비록 읽더라도 도움이 되는 게 없을 것이다. 반드시 사서의 내용을 깊게 생각하고 많이 읽도록 하여라. 다음으로 시와 서를 익히고 문장에 통달해야 한다. 문장을 완전히 내 것으로 하면 글을 짓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과거 공부는 노력에 달려 있다. 힘쓰고 힘쓰거라.”
선비들이 알아야 할 필독서이자 기초서인 사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말한다. 대학은 임금의 바른 정치를 설명하고, 중용은 하늘의 이치, 충성과 용서, 덕, 인간성 등을 다루고 있다. 유성룡은 글공부 때 기초를 튼튼히 하고, 전쟁의 와중이라도 책을 놓지 말 것을 당부한다. <중략> 자녀들에게 보낸 기제아에서 자신의 공부법을 소개한다.
“나는 어려서 공부를 등한시하다가 열아홉 살에 관악산에 들어가 몇 개월 동안 <맹자>를 스무 번 읽고, 다음 해에 안동으로 내려가 <춘추>를 서른 번 읽은 뒤 과거에 합격했다. 그러나 책을 일백 번쯤 읽었으면 지금처럼 학문이 얕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서울의 젊은이들은 빠른 성공만을 원한다. 마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빠르게 성공하는 기술만 찾는다. 옛 성현의 글이 담긴 책들은 다락방에 처박아두고, 매일처럼 남의 비위나 맞추는 글을 찾는다. 그리고 그 말을 도둑질해 시험 감독관의 눈에 띄도록 글을 지어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공부는 생각하면서 하거라.
서애선생문집의 ‘학이사위주’에서 유성룡은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크고 위대한 것'이라고 칭한다.
“독서란 생각이 중심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는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러면 많은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다섯 수레의 책을 입으로는 줄줄 외지만 글의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원문부터 읽어라.
유성룡은 어떤 책에 대하여 공부하기 전에 해설서를 읽지 말라고 한다. <서애문집>의 독서편에서 ‘책의 내용을 앞서 해설서를 보면 자기 나름의 새로운 사고를 넓히는 것은 실패하게 된다.’
본글은 이상주의 <조선 명문가 독서 교육법>이란 책에서 발췌 인용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임진왜란과 유성룡
백부흠
역사학자 이병도가 임란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면서 유성룡이 “이순신을 기용한 한 것은 잘한 일이었고,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부정한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이 발표를 진실로 받아들인 문필가가 학교의 교과서에 이 글을 실음으로써 교사와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그렇게 인식하여 유성룡은 나라가 초토화된 임란의 책임을 덮어 쓴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많은 학자와 재상들이 있었다. 학자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빼놓을 수 없고, 재상으로는 황희(黃喜)와 유성룡(柳成龍)이 손꼽히는 재상들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영의정이 된지 하루 만에 파직되어 임란을 백의종사로 치룬 사람이다.
유성룡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영의정에서 파직되어 백의종사를 하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란 발발 당시의 영의정은 이산해(李山海)이고 유성룡(柳成龍)은 좌의정이었다. 왜구가 서울을 압박해오자 선조는 종묘와 사직을 버리고 파천 길에 올랐다.
당시 파천 결정이 잘못이었다는 서인(西人)들의 주장에 따라 영의정 이산해를 해직하고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한 것이 선조 25년 5월 1일 이었다. 그러나 서인들은 영의정의 삭탈관직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선조는 영의정에게 죄를 준다면 영의정의 파천 주장을 반대하지 않았던 좌의정 유성룡에게도 죄가 있다고 하여 유성룡은 영의정에 제수된 하루 만인 5월 2일에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파직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선조는 다시 불렀다, 그러나 유성룡이 사양하였으나, 곧 부름에 응하였다. 이유는 다른 조신들의 이목도 염두에 있었겠으나, 왕명을 끝까지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마당이니 조국 수호에 헌신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니 곧 등청하여 백의로 종사했던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로 종사한 사람은 이순신과 유성룡 두 사람이다.
임진왜란의 결과를 보면 평양성까지 내주고 의주까지 파천을 하였으니 서인(西人)들이 정치를 하였어도 파천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실제 상황이 이런데도 서인(西人)들이 영의정 李山海의 삭탈관직을 주장한 것은 정권을 뺏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영의정을 죄 준다면 반대하지 않은 좌의정 유성룡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선조였다. 이렇게 구관(舊臣)들을 파직하고 서인(西人) 일색으로 조신(朝臣)을 경질하였다. 새로 제수된 인물들은 영의정에 최홍원, 좌의정에 윤두수, 우의정에 유홍 등이다.
이 결과로 보면 선조가 조상을 지켜야 한다고 칼을 뽑아들었다면 파천을 주장할 대신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자기의 죄를 대신들에게 덮어씌운 의미가 짙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조신(朝臣)들을 서인으로 바꿀 계획으로 구신들을 파직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붕당(朋黨)의 파쟁((派爭)에 비춰보면 이이는 서인(西人)이고 이산해는 동인(東人)이고 유성룡은 남인(南人)이 이었다. 동인과 남인은 동색이니 반대를 위한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이이와 유성룡은 붕당의 파쟁을 초월한 현명한 충신들이었다.
이이는 사림(士林)들의 올바르고 정당한 의견을 수렴하려고 애썼던 학자였고, 유성룡은 동남서(東南西)인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에 공헌한 재상이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곤궁에 빠져있던 이순신을 유성룡이 천거하여 해전사상 유래가 없는 전과를 올린 명장이다.
유성룡에게 씌워진 죄상의 또 하나는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이다. 이이가 제의한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기 때문에 국토가 초토화된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는 연구로 유성룡이 임란의 책임을 덮어쓰고 역사의 죄인이 된 사건이다.
유성룡의 本貫은 豊山이고 1542년(중종 22)에서 1607년(선조 40) 까지 국란의 격동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자는 而見이고, 호는 西厓이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 중염(仲郢)의 아들이고, 李滉의 문하로써 1564년 (명종 19)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及第한 수재였고 관직으로는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智副正字)로 시작하였다.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 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명문가의 후손이다.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가 역사의 진실을 연구하지 않고 표면 기록만 보고 발표함으로써 유성룡이 억울하게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뿐만이 아니고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은 것이 우리 역사 연구의 현실이다. 역사 연구는 표출된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기록하게 된 원인이 더욱 중요하다.
이병도는 유성룡이 반대했어야 하는 원인은 규명치 않고 표면의 기록만을 기술하여 역사를 오도하였다.
이이[栗谷]는 학문에도 독자적 경지를 개척하였지만 국제 정세에도 해박한 통찰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이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변화의 조짐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중원(中原)에서는 금(金<후에 淸나라>)의 세력이 팽창일로에 있고, 일본은 풍신수길이 여러 막부(幕府)를 평정하여 통일국가로 발전할 조짐이 보이니 우리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치 않으면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10만 명의 군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시무육조(時務六條)의 상소문을 1583년 2월에 올렸다.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승지(承旨)만 알고 있으라.’ 하고 덮어두었다. 소를 올린 이이는 선조의 비답이 없으니 경연(經筵)에서 이 문제를 중신들과 논의한 듯하다. 그랬더니 유성룡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유는 평화 시대에 군대를 양성하면 화단(禍端)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고 많은 중신들도 유성룡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니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경연이 끝난 후에 이이는 유성룡을 따로 만나
“속유(俗儒)들이야 시의(時宜)를 알지 못해서 그렇다지만 공도 그러는가”
라고 핀잔을 주었다. 당시 이이는 병조판서였고, 유성룡은 대사헌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이가 현행법을 모르고 하는 충언으로 알고 답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병판(兵曹判書)이 현행법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발설을 하면 병판의 자격 문제로 정계(政界)가 시끄러울 것이고, 현행법을 알면서 이를 무시한 상소라고 하면 중국과의 국제문제가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전개 될 것이기에 못 들은 채하고 참았을 것이다.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해야 했던 근본 문제는 연구하지 않고 문서에 나타난 기록만으로 “유성룡이 이순신을 기용한 한 것은 잘한 일이었고,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부정한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 설로 말미암아 유성룡은 임란의 책임을 덮어쓰게 되었고 이병도는 유명한 역사학자가 되었다.
이병도의 연구는 수박 겉 헐기로 표면의 기록만 보았을 뿐 유성룡이 반대하여야 헸던 근본 문제는 연구하지 않았으니 유성룡이 반대해야 했던 진실을 필자는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한다.
이병도의 주장은 중신회의에서 이이의 십만 양병 설을 유성룡이 반대한 것이 유성룡이 임란의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이고,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후대에 와서 조작되었다는 의혹의 근거는 중신이 올린 상소문이『朝鮮王朝實錄』에 명문으로 기재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위의 두 주장은 모두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 과오는 당시의 법률을 살피지 않은데 있다. 당시의 법률로는 십만 명의 군인을 양성할 수도 없었고. 십만 명의 양병을 주장한 상소문을『朝鮮王朝實錄』에 실을 수도 없었다.
이 사건의 진실은 조선조의 정치 강령(政治 綱領)인 『經國大典』에 명문이 있다. 이병도가 그 법을 살피지 않고 표출된 기록만 보고 발표함으로써 유성룡이 억울하게 죄인이 되었고, 이이의 십만양병설도『朝鮮王朝實錄』에 기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대에 조작된 글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니 우리 역사는 진실을 벗어나 억울한 역사의 죄인이 생겼고, 십년 후를 예견한 조상의 선견지명도 조작설로 둔갑한 실정이다.
이 문제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열쇠는 조선조의 정치 강령(政治 綱領)인 『經國大典』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經國大典』은 아시는 바와 같이 모두 육전(六典<吏典· 戶典· 禮典· 兵典· 刑典· 工典>)으로 되어있다. 그 중 형전(刑典)을 제외한 오전(五典)은 모두 우리의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만들어 졌으나 刑典만은 대명률(大明律)을 준용한다고 되어 있다.
『經國大典』의 형전에는 용대명률(用大明律) 이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즉 刑典은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조선의 형전으로 적용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모순된 법을 만들었을까? 중국과 조선은 국토의 크기가 다르고 풍토가 다르고 풍속과 관습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 법을 조선에 적용하면 모순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모순의 한 예를 들면 大明律에 ‘모반죄인은 삼천리 밖으로 유배(流配)한다.’ 라는 조문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은 좁아서 삼천리 밖으로 갈 곳이 없으니 죄인을 끌고 국내를 몇 바퀴 돌아서 삼천리가 되는 곳에 도착하고 보니 ‘강화도’더라는 웃지 못 할 법인 것이다,
왜 이렇게 모순된 법을 만들었을까? 그 연원을 알고자 『經國大典』과『大明律直解』등 관련 자료를 뒤져 보았으나 왜 그랬는가에 관한 해명은 없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9권 741쪽에 명나라로부터 대명률을 빌려왔다는 기록이 있을 뿐, 빌려온 이유나 해명은 없다.
조선이 건국되고 『經國大典』이 완성되기 까지는 80여 년의 긴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 법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법이 이렇게 된 것은 필경 종주국(宗主國)인 중국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大明律』의「형전」은 중국의 이익과 황실 보위를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즉 국가 이익에 반하는 행위자는 연루자까지 모두 사형에 처하고, 왕실에 대한 모반대역죄(謀反大逆罪)는 9족을 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의 법은 현대의 법처럼 세분화 된 조문이 아니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법이다.
이 법을 조선에 적용시키면 중국이 조선의 내정을 일일이 간섭을 하지 않아도 조선이 스스로 중국을 위하여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은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제안이었지만 당시의 형법(용 대명률)하에서는 실행할 수 없는 제안이었으니 유성룡이 화단(禍端<화를 일으킬 실마리>)이란 용어를 써서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이의 상소는 현행법을 몰랐거나 아니면 현행법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제출한 상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유성룡이 반대하지 않고 동의했다면 우리는 임란을 당하기 전에 중국의 공격을 먼저 받았을 것이다.
중국이 아무리 선의(善意)로 해석을 하여도, 이 소를 제출한 이이(李珥)는 중국에 소환되어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고 왕실도 무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성룡이 대사헌으로 법을 잘 알고 있었고, 정권 쟁탈에 혈안이 된 국내의 정치 실체를 너무도 잘 알고 반대하였기에 이이도 살고 왕실도 무고했던 것이다.
중국에 사전 양해를 구하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중국은 주변국의 군사력 확대나 군비 증강에는 예민하게 대처하였을 뿐이 아니고 중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는 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법이었다.
중국 모르게 국방을 강화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극히 위험한 일이다. 당시는 국제간(명나라와 조선)의 사신 왕래 외에도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가 있었듯이 당시도 친중파(親中派)가 있었을 것이니 조선이 명나라를 치려는 저의가 있다고 밀고라도 한다면 조선은 뜻밖의 재난을 받았을 것이다.
유성룡의 반대는 대사헌으로써의 책무를 다한 것이었고, 이로 인하여 이(李珥)도 무사했던 것인데 엉뚱하게 유성룡이 역사의 죄인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이의 상소문이『朝鮮王朝實錄』에 명문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선조도 실행 불가함을 알고 ‘승지만 알고 있으라.’ 하고 덮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조가 덮어둔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선조가 법을 알아서 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국내의 사정이 양병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는지? 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다.) 이 상소문이『朝鮮王朝實錄』에 실려 확실한 증거를 남겼다면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후대의 조작이라는 설은 성립되지 않지만 그 전에 중국의 무력 공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이는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비답을 받지 못한 가운데 병권을 강화하다가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선조는 이 사건의 논란 중에 병조판서 이이를 호조판서로 경질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선조가 법을 알아서 덮어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렇게 조선이 자국의 미래 문제에 앞서 중국의 형법에 구속되어야 하는 이유는『經國大典』에 명시된 용대명률(用大明律)의 조항 때문이었다. 이 조항은 조선을 건국할 당시 중국[明]에 사대를 선언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일이다.
태조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국제질서 하에서 소국(小國)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길 수밖에 없어서 사대(事大)를 선언하였을 것이다. 이 선언으로 중국의 무력적 도발은 피할 수 있었을지라도 조선조 전 기간에 걸쳐 국가 발전에는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역사를 가정해서는 안 되지만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이렇게 훌륭한 상소를 받은 선조가‘승지만 알고 있으라. 하고 덮어두지 말고 지혜를 발휘해서 이이의 상소 요지를 중국 황실에 이야기하고 금나라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으나 감히 대국[明]을 침공하는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가 생긴다면 소국도 지원을 해야 할 텐데 훈련된 군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소국의 형편으로는 병장기와 식량도 없지만 군을 훈련시킬 교관도 없는 형편입니다. 대국에서 자국의 군을 기르는 셈으로 지원해 주시면 유사시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군을 소국에서 훈련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의견을 개진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다.
영의정에 제수되었던 유성룡은 본인의 소신을 피력해 보지도 못하고 이산해의 사건에 휘말려 파직된 지 한 달이 못되어 선조의 부름을 받고 등청한 유성룡은 관직 없이 체찰사의 임무를 맡아 김찬(金瓚)을 부사로 양호(兩湖)의 일을 맡아 백의종사하게 된다.
1년 7개월간 관직 없이 백의 종사로 임무를 수행하고 선조 26년(1593년) 10월 27일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다. 그는 임란을 겪으면서 국방은 타국에 의존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고 선조 27년(1594년) 4월 1일에 時務에 대해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국방을 공고히 하려면 12만 2천명의 군인을 양성해야 하는데 그 인원의 모집 방법과 식량 조달에 관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과정에 명나라 經略 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誣告)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려 유성룡이 명나라에 가야 한다고 북인(北人)들은 정치 쟁점화 하여 탄핵함으로써 유성룡은 관직에서 물러난 재상이다. 諡號는 文忠이다.
잘못 된 역사 연구로 훌륭한 재상이던 유성룡이 역사의 죄인이 되었고. 십년 앞을 예견한 이이의 선견지명이 조작설로 둔갑한 우리의 역사 연구는 하루빨리 진실 연구의 길로 돌아 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역사학자들의 많은 질정(叱正)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조 27년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은 명나라 경략 고양겸에게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금년 정월부터 적의 형세는 전년과는 좀 달라졌습니다. 비록 적은 전처럼 서생포, 기장, 동래, 부산, 김해, 웅천, 거제 등에 머물러 버티고 있으나 약탈은 좀 줄었습니다. 오직 적의 괴수 가등청정의 부하로 임랑포에 있던 자가 경주를 뺏으려다가 우리 병사들에게 단번에 쫓겨 갔을 뿐입니다.( 고 경략에게 회보하는 차부)
당시 전쟁은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으로 휴전 비슷한 소강상태였다.
유성룡은 국력을 추스릴 기회라고 판단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국방력 강화와 민생안정이었다.
1. 국방정책
유성룡이 추진한 국방정책의 철학은 양반과 천인도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반 백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와 노비는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유성룡은 이 부분을 개혁하고자 했다.
선조 28년 11월 26일 유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 에서 양반과 천인을 막론하고 모두 속오군에 편입시키라고 지시한다.
병졸을 교련시키는 한 가지 일은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니 출신(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 양반, 서얼, 향리, 공천(공노비), 사천(사노비) 논할 것 없이 장정으로 실제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사목(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군대)로 편성하여 그 부근의 각 리에 거처하도록 하고, 각각 묶어 몇 대가 되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병기를 조치 준비하여 새로 훈련을 하도록 하라.(군문등록.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
유성룡은 양반 종군과 천인 종군의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성룡은 천인들이 병역을 수행할 경우 면천(천인신분 에서 면제)을 해주고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는 방안을 제시한다.
지금 사람을 뽑아 쓰는데, 공사천인, 아전, 서자, 할 것 없이 모두 정밀하게 뽑고 국가에서는 그들의 처자를 유달리 위안하며, 무기와 말과 식량을 주어 용맹스러운 장수에게 배치하소서. 그 중에서 기능과 용맹이 출중한 사람은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금군에 소속시켜 그들을 흥기시키고 꺼려 피하는 마음을 없게 하여 상시로 훈련해야 합니다. 만약 변란이 일어났다 하면 즉시 출동하여 싸움터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근폭집. 정병을 선발해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라는 장계)
유성룡의 방안은 군공청에 의해 법제화가 된다
군공청이 아뢰었다.
"공천과 사천에 대해서는 적의 참수가 1급이면 면천시키고, 2급이면 우림위를 시키고, 3급이면 허통시키고, 4급이면 수문장에 제수하는 것이 이미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과 다름이 없어야 마땅합니다.(선조실록 27년 5월 8일)
그러나 유성룡의 노비충군론은 양반 사대부의 격렬한 반발을 산다.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 조에는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사목대로 논상한다면 사노 같은 천인도 반드시 동반(문관)의 정직에 붙인 뒤에 그만 두어야 하니 관직의 외람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라고 반대하는 구절이 있다.
천인이 왜적의 머리 10~20급을 베었다는 사실보다 천인이 벼슬을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 중인 상황에도 이런 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유성룡은 이런 사대부의 이기적 태도에 분노했다.
선조 28년 전 형조참의 유조인이 상소를 올려 노비충군론을 비판하자, 유성룡은 사대부의 이기심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지금 실정은 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중략) 어려운 걱정이 눈앞에 가득하여 뜻이 있는 인사는 눈물을 흘려야 할 터인데도, 무식한 무리들은 이따금 그의 노복이 병역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입을 벌려 이의를 선동하는 것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중략)
당나라 역사를 살펴보니 "장순과 허원이 수양성을 지킬 때 장순은 자기 애첩을 죽여서 삶고, 허원도 아끼는 노복을 죽여서 그 고기를 군사들에게 먹였다" 고 하는데 두 장수는 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어진 군자들인데도, 유독 사랑하는 첩과 노복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나라 일이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날 자기의 몇사람 안되는 노복을 아껴 국가의 큰 계책을 그르치려고 하는 사람과 비교해본 다면, 누가 어질고, 누가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만약 천인들은 사적(벼슬)에 등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한나라 때 위청은 노복에서 발탁되어 출세했고, 김일제는 항복한 부로(흉노)에서 발탁되었지만 후세에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인재가 많았다고 일컫던 때이니 이는 또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근폭집.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회계)
사직이 폐허가 되고 백성이 다 죽어가는 상황, 아직도 왜적이 물러나지 않은 전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만 투철한 사대부에 대해 유성룡은 치를 떨며 무식한 무리들이라고 비판했다.
임진왜란 시기에 서애 유성룡이 주장했던 부국강병책(2)
2. 민생정책
병역제도 못지 않은 조선의 문제점은 조세제도의 불균등이었다.
당시 백성들을 괴롭히던 가장 큰 폐단은 공납이었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의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다는 점이다.
공납은 먼저 군현과 마을 단위로 부과되고 마을에서는 이를 다시 가호단위로 분배했다. 문제는 군현과 마을의 크기가 다른데도 공안의 액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구가 적은 군현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 밖에 없었다.
가호단위 부과 기준도 문제였다.
가난한 전호(소작인) 나 대토지를 가진 전주(지주)나 비슷한 액수를 부담했다. 가난한 백성이 더 많은 부담을 지는 것이다.
여기에 방납의 폐단이 백성을 괴롭혔다. 공물을 대신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방납인데, 관리와 아전들은 농민들이 직접 납품하는 공물은 퇴짜 놓고 방납업자들이 파는 공물을 사서 납품해야 받아주었다. 이 과정에서 방납업자와 관리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공납을 쌀 한가지로 통일하고, 부과 단위를 토지 면적의 다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 즉 사대부는 소유한 토지만큼 세금을 내고 송곳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면제 되는 것이다. 오늘로 치면 부자증세, 서민감세 인 것이다.
지금 백성은 이미 극도로 궁하고 사세는 위급하니, 도탄에 빠지고 거꾸로 매달린 고통은 족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의 건의가 만약 실시 된다면 나라에는 남은 축적이 있고 백성은 여력이 있어서 수년 뒤에는 기세가 촉진되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밖에 자질구레한 절목은 그 실마리가 매우 많으니 지금 감히 일일이 열거하지 못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국가 수치를 아직 갚지 못함을 원통하게 여기소서. 그래서 민심의 만회에 골똘히 노력하는 것으로 영명을 하늘에 비는 근본으로 삼아 하루 이틀이라도 재물을 생산하고 군사를 훈련시킬 계책을 생각하여 나쁜 옷과 거친 음식으로 생활하며 노심초사하소서(시무를 아뢰는 차자)
선조 27년 유성룡은 공납제 개혁안을 내놓는다.
이것이 이른바 작미법이다.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최대의 개혁입법이었다
그러나 작미법은 대토지를 소유한 사대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들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핑계를 대며 반대했다. 유성룡은 공물작미의에서 이런 반대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공물 배정에는 수량이 가볍고 무거운 것과 수송에 힘들고 쉬운 것이 있는데, 힘 있는 백성들은 번번이 가볍고 싼 것만 배정받고, 가난한 빈민이나 힘없는 하호들은 무겁고 괴로운 것만 치우쳐 배정받은 것입니다. 이제 이런 구별 없이 똑같이 배정해서 숨기거나 회피하는 편법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이들 힘 있는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공물작미의)
백성들이 불편히 여긴다는 것은 구실일 뿐이었다.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백성은 조선땅에 모든이들이 아니라 사대부들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세금을 더내야 하니 불편하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서울 각 관사의 하리들은 지방의 공물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을 세습 사업처럼 여기면서, 10배 혹은 100배의 이익을 노려왔습니다.(중략) 이것이 방납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협잡하여 이익을 취해왔기 때문에 백성들의 곤궁함은 날로 심했는데, 지금 공물이 모두 국용으로 들어가게 되자 방납업자들이 이익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각 관사의 전복(하리나 노복)에게서 나온 말입니다.(공물작미의)
지방관리들의 반대이유는 방납업자들과 짜고 횡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백성은 조선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세금을 횡령할 수 있는 지방관리와 방납업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횡령할 수 없어 불편하다는 이기심 이것이 작미법을 반대하는 이유였다
나라가 어찌되든, 백성들이 죽든, 말든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킬려고 하는 당시 조선 지배층의 모습에 유성룡은 분노했다.
작미법은 유성룡이 실각한 후 결국 폐지되었다.
유성룡은 곡물작미의 뒤에 해설을 붙이며 그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날에 이익만을 탐내 방납하던 무리들이 온갖 꾀를 써서 이를 방해하였으며, 사대부 중에서도 식견 없는 자들이 이를 좇아 부화뇌동하는 바람에 다시 그 법이 폐지되었다.
[출처] 임진왜란 시기에 서애 유성룡이 주장했던 부국강병책|작성자 돈마니
우성전 [禹性傳]조선 문신·의병장 브리태니커
1542(중종 37) 서울~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아버지는 현령 언겸(彦謙)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김성일(金誠日)·이봉춘(李逢春)·정사성(鄭士誠) 등과 교유했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봉교·수찬을 거쳐 1576년 수원현감을 지냈다. 1581년 한때 파직되었다가 장령·사옹원정·응교·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했다. 동서분당(東西分黨) 때에는 김효원(金孝元)·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동인을 대표했으며, 그뒤 이발(李潑)과 사이가 벌어져 그는 남산(南山)에 살아서 남인으로,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1591년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추의군(秋義軍)이라 칭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 등과 합세했다. 병선을 이끌고 적의 진로를 차단했으며, 행주에서는 권율(權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전공으로 대사성에 기용된 뒤 남하하는 왜적을 경상남도 의령까지 추격했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역상(易象)과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역설 易說〉·〈이기설 理氣說〉·〈계갑일록 癸甲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계갑일록
우리 화성에는 국가 위기상황에 의기의 공감을 모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 경기도 지역 대표 의병장이었던 우성전 선생이다. 지금의 매송면 어천리에서 태어나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한 재원이다. 의병장으로 활약했다하여 무신인 것은 아니다. 선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학식이 뛰어난 문인이다.
벼슬은 예문관 검열•홍문관 교리•대간臺諫 등을 거쳐 의정부 사인 議政府舍人과 성균관의 으뜸 대사성大司成 등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분이 어떻게 이름 없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의병이 된 것일까. 임진왜란 1년 전에 벼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은 선조 임금의 세자 책봉문제로 논란에 싸였다. 이때 유배당한 송강 정철 선생을 변호하다 탄핵을 받은 것이다. 이 일로 파직된 우성전 선생은 고향인 화성으로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비로서 대쪽 같은 심성을 가진 선생은 나라의 위기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여 쉰이 넘은 나이임에도 화성을 중심으로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인품이 고매하고 명망 높은 선비였던 선생의 구국충절 의기가 사방에 전해졌다. 이에 공감한 경기도 백성 2천여 명이 의병으로 모였다. 선생은 의병의 군호를 ‘추의군秋義軍’이라 짓고 식량과 소금을 확보하여 난민을 구제하며 전황을 살폈다. 그리고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 군대와 강화도에서 합세하여 전공을 올렸다.
계갑일록
이때 선생은 강화도 전역을 장악하여 당시 남북으로 막힌 길을 통하게 하였다. 이어 선생은 추의군을 이끌고 김천일 군대와 다시 힘을 모았다. 강화에서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양화도에 온 것이다. 양화도는 조선시대 때 잠두봉 아래에 있는 나루로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가 있는 자리다.
선생이 강화도를 떠나 양화도로 온 것은 2가지 작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는 왜적의 침입 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기 위해서다.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학식이 뛰어난 선비였지만 우성전 선생은 이렇듯 군사적 목표를 명확히 세우는 무인의 기질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의병장으로서 선생의 활약상은 유명한 ‘행주대첩’으로 이어진다.
양화도에서 적과 싸우던 선생은 곧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궁산에 진을 친다. 궁산은 서울 가양동에 있는 궁산공원 자리다. 이때 수원 독성산성에서 싸우던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 이르렀다. 행주산성이 적의 공격을 받자 선생은 곧바로 의병을 이끌고 권율장군을 지원했다. ‘행주대첩’의 빛나는 전공에 일익을 다한 것이다.
이로서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으나 선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여세를 몰아 의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잠입했다. 하여 용산에 있는 적의 식량창고를 공격한다. 이때 적에게 탈취한 양곡은 관군과 의병 모두의 군량미로 사용하기에 충분했다. 이 무렵 적이 도성을 버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허나 우성전 선생은 의병을 이끌고 경상도 의령까지 적을 추격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과로로 병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다 경기도 부평富平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이때 선생의 나이 52세. 꼬박 1년여를 쉬지 않고 왜적과 싸우다 가신 것이다.
나라를 위한 충절을 몸소 실천하신 우성전 선생은 경기도 화성 매송면 숙곡리에 잠들어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선생의 묘역 사진을 찍어오라고 후배를 보냈다. 한데 다녀온 후배가 볼멘소리를 했다. 선생의 후손 우왕성씨를 만나 친절히 안내 받은 것까지는 좋았단다. 그런데 화성 최고의 충절인물 묘역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하는 수없이 날을 잡고 후배를 앞세워 우성전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
어천저수지를 지나 조금 가니 왼쪽에 우성전, 우하영 선생의 묘역 이정표가 보였다. 그 길을 따라 가다 오른쪽 굴다리를 스쳐 조그만 다리를 지나고…. 다시 왼쪽 오른쪽을 반복했다. 길은 겨우 차 한 대정도 다닐 수 있는 폭이었다. 묘역 인근에 차를 세워 두고 올라가는 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다. 나지막한 철책하나 없이 신도비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 조금 안쓰러웠다.
우성전 묘역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니 오른쪽에 묘역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올랐다.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인지 수북이 쌓인 낙엽이 쿠션처럼 푹신했다. 그렇게 다다른 우성전 선생의 묘역. 단양 우씨 선산이자 일가의 묘역들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묘역들 중 맨 위에 선생의 묘가 자리했다. 옆의 부인 양천 허씨와 쌍분을 이룬 모습이다. 선생의 부인 허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이자 허난설헌의 언니다.
묘역을 둘러보니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된 것에 비해 주위가 너무 썰렁하다. 덩그러니 서 있는 선생에 대한 안내판이 아니라면 화성시의 문화유적인지 아닌지 구별도 모호했다. 선생의 묘에 있는 석물들도 귀중한 유물들인데 여기에 대한 설명도 없다.
우하영 묘역
씁쓸한 마음을 달래려 애쓰며 후배와 근처의 우하영 묘역을 찾았다. 우성전 선생의 직계 7대손인 우하영 선생은 18세기 말의 실학자다. 이곳 역시 2003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된 곳이다. 한데 이곳은 석물 하나 없이 소박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은 우하영 선생의 실학사상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선생은 당시로는 드물게 상업적 영농정책을 주장한 사람이다. 또 사회경제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시무책時務策>을 조정에 올렸다. 내용은 모두 국가와 백성의 실용에 관계되는 것이다. 이때 정조 임금으로부터 ‘타고난 재주를 펴보지 못한 인재’라는칭송을 받았다.
우성전, 우하영 선생의 묘역을 돌아보고 나왔을 때 갑자기 고민이 쌓였다. 명색이 화성시의 문화유적인데 활성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성전의 충절사상, 우하영의 실학사상을 접목한다면 훌륭한 문화관광 유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프로그램 창안이 필요하다. 조금 더 시간을 두어야겠지만 이런 노력이 있어야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런 노력은 곧 화성의 문화적 자랑거리이자 관광활성화에 기여한다. 나는 수첩을 펼쳐들고 이곳의 활성화에 대한 짤막한 단상들을 기록했다. 오늘 당장은 아니지만 내 고향 화성을 위해 일을 하고 싶어서다. 더불어 화성의 훌륭한 인물을 널리 알리는 일이기에 주저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다졌다.
초기 활동
본관은 단양,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과 연암(淵庵), 아버지는 현령 언겸(彦謙)이다. 시호는 문강으로 유학자 이황(李滉)의 문하생이다. 초당 허엽의 사위이며 허균의 매형이자 허난설헌의 형부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봉교를 거치고 부수찬으로 1572년 정공도감(正供都監) 혁파를 건의하여 관철시켰으며, 경연에서 <서경(書經)>을 강의하기도 하고,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73년에는 기대승(奇大升)의 제사를 하사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1576년 수원현감을 지냈다.
1581년 재주를 믿고 논변을 좋아해 그 동아리가 성세를 떨치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 때 그는 김효원(金孝元)·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동인을 대표했으며, 그 뒤 이발(李潑)과 사이가 벌어져 그가 남산(南山)에 살아서 남인으로, 이발이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나뉘었다. 이 시기 동안 장령, 사옹원정을 역임하고 1583년에 응교에 오르고, 의정부 사인을 역임하였다.
[편집] 동서 분당
1589년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때 동인인사 2000명이 학살되자 동인은 위관인 좌의정 정철과 그의 스승 성혼에게 원한과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그도 함께 삭직당했다. 우성전과 유성룡은 정승을 지낸 인물이라 처형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산해, 정인홍 등은 옥사의 위관으로 이발의 팔순 노모와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들을 장살시킨 가혹함을 지적하였다.
[편집] 임진왜란과 죽음
다시 복권되어 수원 현감으로 근무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추의군(秋義君)이라 칭하고 강화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로 들어가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경기도 행주에서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후방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당시 그의 향년 51세였다.
[편집] 사후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에 부인 양천 허씨 묘소 옆에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뒤 북인의 집권으로 그의 공적은 잊혀졌고, 1623년의 인조 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 뒤에는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였으므로 재조명받지 못하였다. 그 뒤 정조 때에 가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축첩과 분당 원인
이발, 정인홍 등이 그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혹이 한 원인이 되었다. 그는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3]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3]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3]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3][4] 이발은 사헌부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3]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3]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3]
禹 性 傳
우성전 [禹性傳, 1542~15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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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문장월사이정귀( 月沙李廷龜 ) (가평군)
30세 선조 26년에 명나라 經略 宋應昌 이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조정에 대하여 道學經義를 토론하여 東方理學정립하자 할 때 강사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이 그의 박학에 놀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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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7:56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진사를 거쳐 27살(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관이 되었다. 임란이 나자 행재소에서 설서(說書)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 경략 송응창(宋應昌)과 <대학>을 토론하고 육상산(陸象山)과 정주(程朱)의 학설 차이를 밝혔다. 병조․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했다. 정유재란 후에 병조정랑, 교리가 되어 명나라 장수들을 응대하는 데 실수 없이 주선하여 왕의 칭찬을 받고, 동부승지, 병조참지가 되었다. 35살에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무고가 있자,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명나라에 가서 무고임을 밝혔다. 37살에 예조판서가 되고, 대제학, 지성균관사, 좌참찬이 되었다. 41살에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지어 간행했다.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광해 즉위 후에 병조․이조․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나 50살(1613,광해5)에 계축옥사가 일어나 김제남과 교유한 일로 사직했다. 다시 형조․호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여러 번 중국에 다녀왔다. 55살 폐모론에 참여치 않았으며, 도총관, 공조판서, 감군접반사를 지냈다.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를 거쳐 69살에 좌의정이 되었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기개와 식견이 높았으나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님을 믿을 것가 못 믿을 손 님이시라.
믿어 온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어라.
믿기야 어려우랴마는 아니 믿고 어이리.
그는 선조(宣祖)의 인정을 받고 하루 만에 관직이 일곱 계급을 뛰어오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왕의 사랑을 받다가 중국에 갈 때 역관을 제멋대로 늘였다는 사소한 문제로 왕의 의심을 받고 외직으로 나갔다. 아마 그때에 이 작품을 짓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시조는 못 믿을 님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모순을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님은 선조 임금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계축옥사 때에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벌주지 않았으나, 선조는 당쟁에 휘말려 확실한 주관을 차리지 못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서인인 그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광해군은 그를 의심해서 내친 일은 없다. 초장에는 ‘님을 믿을 것가’라고 의문을 제시하여 심중의 불신을 토로하고 그래서 믿지 못할 님이라고 단정을 했다. 자신의 재능을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왕이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을 총애하면서 그 사랑이 식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장에는 불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난날 왕의 사랑을 믿고 따르던 그 시절에도 마음속으로는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고 했다. 굳건한 신념으로 서인을 보호해 주지 않는 왕에 대한 서운함이요 원망이다. 종장에서 임금의 사랑을 잃고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지마는 그래도 임금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신하의 도리를 말했다. 이리저리 마음이 변하는 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충성해야만 했던 40여년의 벼슬살이에서 그가 터득한 관료의 체관(諦觀)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출처] 이정귀, 신흠의 시조|작성자 jaseodang
[이상주 종묘스토리 ⑮ 한 많은 광해군]광해군 어머니는 왜 종묘에서 쫓겨났나 | |||||||||||||||||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퇴출되자 다시 공빈으로 추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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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택당집(澤堂集)』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
-강화의 은둔 시인 권필權韠
송강 정철이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임종을 맞은 곳이 강화의 송정촌이라는 사실을 안 지는 오래이지만, 송강의 제자인 대문장가 권필이 강화땅에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연히 강화 소식지를 뒤적이다가 권필의 유허비가 송해면 하도리 어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중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식구들을 데리고 나섰다. 차로 가면 집에서 20분 거리다.
송강이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은거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고는, 혹 무슨 유적이라도 남아 있는 게 없을까 하고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섬의 북쪽 한강 하구 어름의 숭뢰리가 바로 옛날의 송정촌이라 하여 그 마을 어르신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저 방앗간 어름의 한 농가였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끝내 송강의 자취는 티끌 하나도 찾지 못해 서운한 발길을 돌렸던 적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는 곧바로 권필의 유적을 찾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권필은 누구인가? 선조대의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호는 석주(石洲). 당대 문단에서 동악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권필은 야인이면서도 그를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세상에 뜻을 접고는 강화도 고려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권필에게 화를 불러온 시는 그가 지은 ‘궁류시(宮柳詩)’로서,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권필은 워낙 벼슬에는 뜻이 없어 술과 시로 살아가는 풍류인이었다. 허균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나, 권신 이이첨이 친교를 청하는 것은 끝끝내 거절한 강직한 성품이었다.
시류를 비판한 궁류시가 광해군에게 들어가자 왕은 불같이 노해 시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일찌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는 그 시인이었다.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왕을 만류하고 나섰다.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버티었다.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군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의 불행한 종말을 예고한 협량이었다고나 할까.
결국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밤,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문장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스스로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분명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항복의 낙담은 더욱 컸다.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고 자탄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권필 유적지에는 비 내리고 잡초 무성한 가운데 빗돌만 하나 덜렁 서 있었다. 고려산 기슭의 하도저수지 옆이었다. 시인이 원래 세상에 별 뜻이 없어 강화에 은둔해 있을 때, 그의 문명을 듣고 찾아온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초당 터이다.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조선 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로 아까운 선비, 인걸들이 수없이 죽어갔지만, 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는 권필뿐이었다. 그는 시의 순교자였다.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그의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광해는 유배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쫓겨난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땅에 있다. 고양땅에 있는 정철의 첫 유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허비 주변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녹슨 농기구들과 철조망이 빚어내고 있는 을씨년스런 풍경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우산을 쓴 채 돌아다니며 밤을 줍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로 글을 접도록 하자.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
곤륜산 상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군산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권필의 글씨
[출처]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강화의 은둔 시인 권필|작성자 저녁바람
비극적 죽음도 닮은 동갑내기
[한국고전문학사 라이벌] 허균 vs 권필 - 체제의 아웃사이더
'홍길동전' 통해 정면으로 체제공격한 허균에 비해
권필은 남녀의 애정다룬 '주생전'통해 우회적 지향
1612년 4월7일 함경도 경원 유배길에 오르려던 권필(權韠)이 세상을 떴다. 국가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외척 유희분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는 혐의로 광해군의 친국(親鞫ㆍ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아래 혹독한 형벌을 받은 직후였다.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청해 마셨는데 장독이 올라 이튿날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6년 여의 세월이 흐른 1618년 8월26일, 서울의 서쪽 저자거리에서 허균(許筠)이 처형됐다. 본인이 승복하지 않아 마지막 판결문도 없었지만 역모죄로 다스려진 까닭에 그의 머리는 막대에 매달려 거리에 내걸렸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고, 절친한 벗이었으며,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비극적 최후가 말해 주듯 횡포한 봉건 지배체제로부터 가혹하게 제거됐다는 점도 비슷했다. 행적과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누구보다 체제의 아웃사이더 또는 저항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천 개의 얼굴과 반역의 삶, 허균
허균
‘예교(禮敎)에 어찌 묶이고 놓임을 당하겠는가(禮敎寧拘放)/ 부침(浮沈)을 다만 정(情)에 맡길 뿐이라네(浮沈只任情)/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吾自達吾生)’ _‘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리를 듣고(聞罷官作)’
관청에서 부처를 받들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면된 허균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이다. 그의 뜻은 예교에 속박되지 않고 정의 이끎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교란 무엇인가? 삼강오륜으로 규범이 된 조선 제일의 윤리도덕이며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던 불변의 당위이다.
하지만 허균은 통념적 도덕률에 굴종하기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이때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됐지만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도교에 빠져드는가 하면, 양명학 좌파를 넘나들었고, 서학을 수입했다.
양천 허씨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나 문명을 날리던 허균이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20대 전반기에 겪은 가족사의 비극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아껴주던 형님 허봉의 정치적 좌절과 죽음, 누이 허난설헌의 요절, 임진왜란의 피란길에서 당한 아내와 아들의 죽음 등 큰 충격을 연속으로 겪었다.
하지만 이미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한 데서 알 수 있듯 허균은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더 근원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적서차별의 신분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피비린내 나는 당쟁 등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 인식은 그의 수많은 시 작품과 ‘호민론’ ‘유재론’과 같은 산문, ‘홍길동전’ 같은 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표준이나 중심을 거부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자유와 개성의 향기가 뚜렷하다. 허균은 서얼이나 천민 등이 지닌 재능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했으며 그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이들과의 사귐도 도타워서 넉넉지 않은 월급을 쪼개서 생계를 몸소 돕기도 했다.
허균의 혁명적 사고는 이런 휴머니즘의 실천과정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행동은 종종 예측하기 어렵고 괴상하기까지 한데 특히 만년의 정치적 선택이 그러하다. 광해뗌?거물 이이첨과 제휴하여 대북파(大北派ㆍ선조때 북인 중에서 홍여순 등이 남이공 등의 소북에 대립해 이룬 당파)에 참여하고 폐모론(廢母論ㆍ선조의 왕비이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하자는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의 주장)을 주창한 데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며, 역모 사건에 대해서도 시빗거리가 남아 있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허균은 역적이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다양했다. 체제의 이편에서는 ‘천지간의 한 괴물’로,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그가 중세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뚜렷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천의 얼굴의 소유자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비판적 지성과 풍자의 정신, 권필
권필
‘궁궐 버들 푸르고 꽃잎 어지러이 날리는데(宮柳靑靑花亂飛)/ 성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네(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선 입 모아 승평의 즐거움 하례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포의(벼슬없는 선비)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이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_‘임숙영의 삭과 소식을 듣고(聞任茂叔削科)’
1611년에 재야 선비 임숙영이 전시(殿試ㆍ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왕실 외척의 교만함과 왕비의 정사 관여를 문제 삼는 글을 지었다. 이를 본 광해군이 대로하여 방(榜)에서 그의 이름을 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권필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즉시 그 일을 풍자하여 지은 시가 바로 이 ‘궁류시(宮柳詩)’이다.
그리고 이 시 한 편 때문에 권필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다. ‘궁궐 버들’은 유희분 등의 외척 유씨, ‘봄볕’은 광해군, ‘포의’는 책문을 쓴 임숙영에 대응된다. 이렇게 보면 궁정의 봄 풍경에 빗댄 권력과 그 주변 아첨꾼들의 행태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난다.
권필의 사상은 허균처럼 체제 전복적이거나 일탈적인 정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중년에 그는 강화도에 머물면서 성리학의 연원과 도통을 살핀 저술을 남기기도 하고, 성리학적 수양에 더욱 침잠하기도 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탈주를 꿈꾸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체제 수호적이다. 그러나 항상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는 청소년기의 독특한 가정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의 부친 권벽은 여러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을 지냈는데 절친한 벗이 직무와 관련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하는 중에도 평생 남과의 교유를 끊고 폐쇄적 삶을 살았다. 세상에 말없이 항의하며 침울하게 살아간 아버지,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 아래 권필은 강인한 비판적 지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존경했던 스승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의 모략으로 귀양길에 오르자 권필은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입신출세의 길을 아주 접어버린다. 이후 방랑의 시절을 보내며 전란으로 유린된 강토와 백성들의 찢긴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지배계급에 풍자의 비수를 겨누는 시적 태도를 유지했다.
탐욕스러운 세도가의 신도비(神道碑ㆍ종이품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를 세우기 위해 파헤쳐지는 돌과 그것을 나르는 민중의 노역을 묘사한 ‘충주석(忠州石)’, 당쟁을 뼈다귀를 놓고 싸우는 개들에 빗댄 ‘투구행(鬪狗行)’ 등은 사회 모순을 포착, 현실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빼어난 작품들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낭만적 해결의 두 방식
허균과 권필은 당대의 빼어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사에서도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의 대표 소설은 ‘홍길동전’이며, 권필의 대표작은 ‘주생전(周生傳)’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그 해결을 향한 낭만적 상상력을 담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주제와 형상화 방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홍길동전’은 16세기 연산조에 실재했던 농민저항 지도자 홍길동을 소재로 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의 실현이라는 중심주제를 담고,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신분차별을 극복하는 민중적 영웅상을 낭만적으로 구현했다. 율도국의 건설, 즉 유토피아적 이상사회 건설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당대 모순을 해결하는 주된 동력으로 민중의 저항적 에네르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주생전’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전기소설의 형식에 담은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만난 명 나라 군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생, 배도, 선화라는 세 남녀가 벌이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애정 갈등과 죽음, 그리고 조선 출병으로 인한 기약 없는 이별 등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적 삶의 과정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펼쳐낸 것이다.
허균이 신분갈등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정공법으로 더 나은 삶을 설계했다면, 권필은 애정갈등이라는 남녀간의 문제를 통해 다분히 우회적으로 현실 삶의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주제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는 속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이형대ㆍ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그림 박성태ㆍ화가 ]
참고 권필 유허비 http://blog.daum.net/koreasan/11324023
[정민의 '세설신어'를 읽고]
조선일보 정민의 [세설신어]의 제목이 '무료불평(無聊不平)'이다.
'무료불평'이란 꿈이 있고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세상은 나를 외면하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이때 생기는 마음이 무료불평이라고 한다...^-^
유성룡이 우성전에게 쓴 편지에 "그의 글은 앞서 보았는데, 그 말에 무료불평의 뜻이 조금도 없어 깊이 경복할 만합니다"
한유(韓愈)는 '고한상인을 전송하는 글(送高閑上人序)'에서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중략)...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
이정귀(李廷龜)도 권벽(權擘)의 시집에 쓴 서문에서 "희로애락과 무료불평을 반드시 시에다 펼쳐서 ...(중략)...시에 몰입과 바꾸지 않았다."
대략 이런 글을 읽고...'유성룡/우성전/한유/장욱/이정귀/권벽'을 검색하느라...어제 밤을 꼴딱 새어...새벽 5시까지 했다...ㅎㅎ...^-^
특히 유성룡을 검색하는 데...시간을 많이 보냈고...너무 많은 자료를 보아서인지...머리 속에서 뒤죽박죽 정리가 잘~ 안된다... ㅎㅎ...^-^
유성룡은 이순신 보다 3살 연상으로...어린시절 같은 고향에서 자랐고...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하였으며..이순신이 노량해전 전사할 때 유성룡도 실각하였다고 한다...ㅠㅠ...^-^
유성룡은 탁월한 경세가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조세제도에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 사대부들의 반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대동법의 전신인 '작미법'을 시행하고...병역면에서 양반과 천민이 '속오군' 에 의무적으로 편입하도록 개혁을 일구어낸 백성을 위한 진정한 청백리 재상이었다...또한 임진왜란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국보)의 저자이기도 하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우성전, 김성일과 동문수학하고...함께 동인으로 활동하다...후에 정철의 처벌문제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질 때...우성전이 남산 밑에 살아 남인, 이발이 북악산 밑에 살아 북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당시 남인은 온건파 유성룡, 우성전 등이고, 북인은 강경파 이발, 이산해, 정인홍 등이 속한다고 한다...^-^
우성전은 임진왜란 때 '추의군'을 만들어 의병활동을 하다 부평에서 전사했는데...그의 부인이 허난설헌의 언니 였다는 내용 등을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더욱 밤을 새게 된 것이다...^-^
한유와 장욱은 당나라 사람인데 한유는 문학가이자 철학자인 사람이고...초서를 잘 쓴 장욱은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종종 크게 취한 뒤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돌아다닌 뒤 붓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장미치광이'[張顚]라고 불렀다고 하는 내용을 읽었다...ㅎㅎ...^-^
이정귀가 권벽의 시집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이정귀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명나라 장수 정응태의 무고가 있자,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변명상소문)을 지어 명나라에 가서 무고임을 밝힌 명성높은 문장가 재상이고...권벽은 시인 권필의 아버지인데...권필은 광해군의 외척인 유희분의 세력을 풍자하는 '궁류시'를 지어...광해군의 친국으로 말미암아 죽은...인조반정의 시발점이 되게 한 시인이다.
그의 부친 권벽은 여러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을 지냈는데 안명세(安名世)·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했다.
세상에 말없이 항의하며 침울하게 살아간 아버지,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 아래 권필은 강인한 비판적 지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외척 유희분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는 혐의로 광해군의 친국(親鞫ㆍ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아래 혹독한 형벌을 받은 직후였다.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청해 마셨는데 장독이 올라 이튿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주생전'을 지은 권필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절친한 벗이며 동갑내기였고,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면서 시대의 아웃사이더 였다...권필이 죽은지 6년 후에 허균이 서울의 저자거리에서 역모죄로 그의 머리가 막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 2013년 7월4일 목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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