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JTBC 주말연속극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극본 정하연, 연출 노종찬)'최종회를 오늘 보았다...^-^
인조가 사랑하던 후궁 '소용 조씨'가 사약을 받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인조의 정비 '장렬왕후'가 소용 조씨를 사사하도록 효종을 압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소용 조씨와 관련이 깊었던 김자점에 대하여 검색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린 김자점(1588~1651)의 출생에 대한 전설은...지네의 저주로 태어난 괴물이었기에 희대의 간신이자 역적이 되어 마침내 집안을 멸문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부친인 김함이 벼슬을 산 적이 없으므로 지어낸 얘기임은 분명하지만, 500년 뒤까지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당시 김자점이 얼마나 큰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김자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조와의 인연에서 시작해야 한다.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를 왕위에 올려 놓은 반정 과정에서 김자점은 절대적인 역할을 해냈다. 사실 이 반정은 성공한 게 신기할 정도로 허술했다. 몇 차례나 음모가 새나갔지만 김자점이 광해군의 총희인 개시 김상궁에게 뇌물로 줄을 대고 있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김상궁은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김자점, 김류 따위는 그저 백면서생들인데 무슨 큰 일을 하겠습니까”라며 무마했다. 실제 반정 전날인 1623년 3월11일에도 고변이 들어왔지만 광해군은 김상궁과 술을 마시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결국 김자점은 1등공신에 올랐다.
하지만 관료로서 김자점은 대단히 무능했다. 청의 군사적 위협 속에 도원수에 오른 김자점은 정예병을 큰 길에서 벗어난 산성에 주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로로 진격해 한양을 범했다. 심지어 김자점 본인도 황해도 토산에 정병을 주둔해 놓고 교전을 피한 죄로 죽을 위기에 몰렸다.
그래도 인조는 김자점을 외면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권위를 잃은 인조에겐 김자점 처럼 ‘까라면 까는’ 저돌적인 충복이 필요했을 거란 해석이 일반적이다. 김자점은 재빠르게 친청파로 변신해 조정 중신들을 제압했고. 그가 후원하는 소용 조씨도 인조의 안방을 차지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1645), 세자빈 강씨의 사사(1646), 임경업의 주살(1646) 등 의혹 짙은 사건이 이어자자 김자점에 대한 여론은 악화됐다. 특히 임경업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민심은 ‘군사력을 키워 청에게 복수하자’던 명장 임경업에게 극히 동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를 손자며느리로 삼으며 권력은 더 강화됐지만 백성들의 지탄도 높아갔다.
결국 인조의 죽음과 함께 파국이 왔다. 소용 조씨가 낳은 숭선군에게 밀려나는게 아닐까 은인자중하던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자점에게 칼을 뽑았다. 삭탈관직에 이어 유배령이 떨어졌다. 때맞춰 효종은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고, 김자점은 청과 내통하는 매국노의 표본이 됐다.
마침내 효종 2년. 숭선군을 앞세워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과 함께 김자점의 일족이 몰살당하는 옥사가 펼쳐졌다. 소용 조씨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불안한 임금 자리를 지키려는 인조의 속내는 누구보다 잘 읽었지만 여론의 흐름은 무시한 결과였다. 효종은 그를 잘라 냄으로써 민심을 얻는 동시에, 인조반정의 공신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김자점은 정말 반란을 시도했을까. 최소한 효종이 그를 편치 않게 느낀 것은 분명하다. 인조는 죽기 두 달 전, 세자(효종) 앞에 김자점과 이시백을 불러 “네가 왕이 되어도 이 두 사람은 중용하라”고 당부했다. 명심하겠노라 대답했지만 효종의 속내는 달랐다. 즉위 후 김자점의 역모를 보고받은 효종은 “당시 시백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자점은 오만했다. 그때 자점이 나를 섬길 뜻이 없음을 알았다”고 냉소했다. 자만이 재앙을 부른 셈이다.
드라마에서 소용 조씨가 낳은 아들 숭선군은 인조의 자식이 아니라는 설정으로 진행되는데 사실이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하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숭선군 일가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 한다. 나중에 귀인이 된 후궁 조씨는 2남1녀를 두었다.
맨 처음 낳은 딸은 효명옹주(孝明翁主)로 나중에 김자점의 손자인 세룡(世龍)과 혼인해 부귀를 누렸으나 1651년 시부와 시조부가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남편까지 처형되고 옹주는 유배되었다. 1658년 효종의 특명으로 풀려나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복권되지는 못했다.
인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는 효명옹주 다음으로 낳은 자식은 숭선군 징(徵)과 낙선군(樂善君) 숙(潚)이다.
도승지를 지낸 신익전(申翊全)의 딸과 혼인한 숭선군은 어머니가 김자점 옥사에 연루돼 사약을 마시고 죽은 이듬해 역모에 가담했다는 무고를 당해 강화 교동(喬桐)에 유배됐었다.
하지만 송시열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상소, 유배 4년만인 1656년(효종 7) 18세 때에 풀려났다.
1690년 1월 향년 52세로 별세하자 숙종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3년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을 주라'는 특명을 내리기 까지 했다 한다.
숭선군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이강(李棡) 등 두 아들과 딸 넷을 두었으나 이강은 일찍 죽었다. 동평군 이항은 숙종의 총애를 받아 종친으로는 처음으로 1687년 혜민서 제조가 되었고,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로, 1689년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종친이 혜민서 제조를 맡은 건 잘못이라며 남구만(南九萬) 등이 여러 차례 규탄하고 나섰으나 숙종은 오히려 남구만 등을 처벌하였다.
그 뒤 선조가 가장 총애했다는 인빈(仁嬪) 김씨의 제사를 받드는 일을 맡게 되면서, 토지 100결과 노비 150명을 하사받기도 했다.
동평군은 청나라를 자주 다녀왔다. 1687년엔 동지사(冬至使)로, 1689년엔 왕비 민씨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가서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돌아왔다. 또 1691년엔 사은사로, 1699년에는 사은사 겸 동지사로 다녀오기도.
그러나 희빈 장씨가 사사된 1701년 신사(辛巳)의 옥 때 절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숭선군보다 두 살 아래인 낙선군도 김자점 옥사 때 귀양을 갔다가 형과 함께 같은 날 풀려나 서울에 돌아왔으며, 1659년 정월에 작록을 회복 받았다. 어릴 때부터 당파싸움에 휩쓸렸으나 현명하고 행실이 좋아 숙종은 그를 총애하며 우대했다고 한다.
결국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인조의 자식이 아니라는 드라마 상의 '숭선군'은 왜곡된 것이다...ㅠㅠ...^-^
- 2013년 9월14일 토요일...십자가 현양축일에...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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