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광성보>사진 35장을 블로그에 올린 날]
지난 10월18일 금요일에 성남시중원도서관이 주최한 '살아있는 역사, 재미있는 답사' 라는 제목으로 실시했던 강화도 답사 중 <광성보> 사진 35장을 오늘 블로그에 올렸다...ㅎㅎ...^-^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면서 알게된 점은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에게 승리하여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세워졌다 ...ㅎㅎ...^-^
그러나, 프랑스군이 패퇴하면서 외규장각 도서와 의궤를 약탈한 사실은 안타까우나... 그래도 조선왕조실록을 빼앗기지 않을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ㅎㅎ...^-^
광성보 광성돈대에 전시된 '대포 /소포/불랑기'를 보면서 불랑기는 프랑스군에게서 처음 획득하여 붙여진 이름임을 알았다...ㅎㅎ...^-^
신미양요 때 미군과의 전투에서는 패배하였는데...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이 전사하여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를 세우고... <신미순의총>에는 51명의 무명용사들을 7기의 무덤에 합장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견 숙연해졌다...^-^
다시 한번 중요 사진만 추려서 올린다...ㅎㅎ...^-^
- 2013년 10월23일 수요일 수산나 -
삼랑성 동문...양헌수 승전비각 1
삼랑성 동문...양헌수 승전비각 2
삼랑성 동문...양헌수 승전비각 3
전면 비문-"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
삼랑성 동문...양헌수 승전비각 4...안내문...^-^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바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에는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을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등사에 소개된 양헌수 장군 안내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자 적군 몰래 강화도 삼랑성(정족산성)에 입성하여 진을 친 뒤, 프랑스 분견대 160명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매복작전으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수십명에게 부상을 입혀 적을 격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였고, 이번에 약탈 외규장각 도서와 의궤가 장기 임대형식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양헌수 장군과 군사들, 스님들의 저지로 지켜져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전등사 대웅전 기둥에는 당시 군사들이 자신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면서 써 놓은 이름과 글귀가 곳곳에 적혀있습니다...^-^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안해루 전면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 안내문
조선 1658년(효종 9)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 5)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였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 이 있다...^-^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광성돈대 안내문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 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화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는 홍이포라고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도 사용...^-^
소포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을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광성돈대...^-^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광성돈대...오른쪽 부터 '대포 / 소포 / 불랑기'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쌍충비각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21...쌍충비 안내문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1873년 건립...^-^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인데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
고종 대 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 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22...쌍충비 중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1873년 건립...^-^
강화도 '전등사' 에 소개된 '어재연' 장군 안내문
조선 무장으로 병인양요 당시 광성진을 방아하였고, 회령부사가 되어서는 도적들을 토벌하고, 국경수비를 튼튼히 했습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4월15일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600여명의 각 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급파되었습니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수륙양면에서 함포와 야포사격을 퍼붓고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
한말의 대학자 이건창은 그를 평하여
"청백강정(淸白剛正)' 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난 공적을 남겼다. 체격이 장대하고 절인의 힘이 있어서 세상사람들은 그를 장사로 여겼다" 고 했다...^-^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23...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24...신미순의총...^-^
강화도 광성보(사적 제227호) 25...신미순의총 안내문...^-^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광서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윤 장군과 아우 재순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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