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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8일 수요일[(백)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2014년 1월 8일 수요일[(백)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본기도

온 인류를 비추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백성이 한결같은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저희 조상의 정신을 밝히시던 그 빛으로 저희 마음도 비추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제1독서). 배에서 풍랑과 씨름하다가 호수 위를 걸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아직 기적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에 두려워하고 놀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고 풍랑을 멈추게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1-18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안에 머물러 기꺼워하기도 했고 또 생생하게 손에 잡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랑이 낯선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지고, 처음 배우는 외국어처럼 제대로 된 사랑의 말이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두려움에 질려 버린 모습과도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 많이 듣고 체험하면서도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는 사랑에 신뢰하고 응답하기보다는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나를 보호하려 드는 유혹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사랑은, 사실은, 수수께끼나 모순이 아니라 신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명한 가톨릭 작가 체스터튼은 그의 추리 소설에서,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명탐정 브라운 신부의 입을 빌려 신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지요.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으니까요.”
사랑의 신비는 나에게 숨겨 있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억지로 장악하고 비밀을 밝혀낼 도전의 대상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한 사랑의 불가능에 대한 질문의 긴 시간을 졸업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마음을 열고, 두려움을 쫓아내는 사랑의 신비 앞에 조용히 머물며 그 사랑과 함께 숨 쉬고 싶은 바람입니다.

 

판교 선 프란치스코 성당

 

 


 

2014-01-08 오후 2:12:39추천수12반대수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8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When they saw him walking on the sea,
they thought it was a ghost and cried out.
They had all seen him and were terrified.
But at once he spoke with them,
“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Mk.6,49-50)
 
 
 
제1독서 1요한 4,11-18
복음 마르 6,45-52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어제 사제서품식은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제가 성소국장이 되어 여름서품식까지 포함해서 벌써 6번의 사제서품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제처럼 긴장되고 많이 기도했던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 한 분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시거든요. 희귀병을 앓고 있어서 과연 서품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어제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서품식 직전 점심식사 때, 이 신부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신부님, 제가 이렇게 사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꿈같고 기적이에요. 그래서 제 첫 미사 때에 저와 같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초대했어요. 이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무릎을 꿇는 것도 또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열심히 노력했던 그 모습에 주님께서도 기쁘게 당신의 대리자로 받아주신 것이 아닐까요? 아마 큰 아픔을 안고 사시는 만큼, 신부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착한 목자가 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나의 아픔과 시련이 가장 큰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그 아픔과 시련의 크기를 재어 보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것이 큰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이 큰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과 시련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우리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호수 위에서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밝은 대낮이 아닌 새벽녘이었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즉, 주님을 받아들이자 모든 고통과 시련이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때 내가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아픔과 상처들을 극복해서 참 기쁨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엘리사베스 퀴블러 로스).

 
2014년 1월 7일에 사제서품 받은 따끈따끈한 새 신부님들.

 

 
제 서품 받은 사제의 서품성구 설명

오늘 새벽 묵상 글에 썼던 새 사제가 쓴 서품성구의 설명입니다. 이 사제가 원하는 대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십시오.

신학교에 입학해서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지만 몸이 점점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병원을 가도 원인도 알 수 없었고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2-3년 동안 병원을 옮겨가며 진찰을 한 끝에 저의 몸 상태가 남들과는 다른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난 후에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현대 의학으로는 없다는 사실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 피정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예수님께 물어보았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죽은 사람들까지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저 또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학을 보내고 새 학기를 맞이할 때마다 몸 상태가 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매일 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무일도의 끝기도 때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말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아침 기도 때 ‘하느님 절 구하소서.’를 외치며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끝기도의 마침기도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께서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시어 우리에게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어주시니’ 라는 말을 묵상하며 서품성구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로 정했습니다.

 

  

사랑의 신비는 나에게 숨겨 있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억지로 장악하고 비밀을 밝혀낼 도전의 대상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한 사랑의 불가능에 대한 질문의 긴 시간을 졸업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마음을 열고, 두려움을 쫓아내는 사랑의 신비 앞에 조용히 머물며 그 사랑과 함께 숨 쉬고 싶은 바람입니다. [출처]매일미사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말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건드리지 않는,

그대로 놔두고 기다리는 침묵의 덕이,

하여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 텅 빈 충만의 사랑입니다.[출처]김명준 작성 묵상글

 

몇 년 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퇴임하는 그에게 87%의 지지율을 보냈습니다. 세계 각국은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브라질을 세계8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 올렸고 좌우를 모두 끌어안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퇴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출처]반신부의 복음 묵상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킬 것입니다. [출처]양치기 신부님의 말씀 산책

 

신학생 때, 사랑의 3가지 차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입니다. 이는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사랑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진화의 시계는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자연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있고, 이 생명들은 사랑을 하고, 다음 세대를 이어 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인류가 지금까지 세대를 이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소중한 사랑입니다. 다만 사람은 너무나 약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는 아이는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생기고, 결혼 제도가 생기고,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플라토닉입니다. 관중과 포숙과 같은 우정을 말합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게 됩니다. 사람이 혼자 살기에는 자연의 조건이 혹독했고, 위험한 동물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연대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가족, 동네, 부족,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개미, 벌과 같은 곤충들은 이와 같은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활합니다. 약한 동물들은 이런 연대의식을 가지고 살지만 강한 동물들은 혼자 살아가곤 합니다. 제게도 친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연락을 하며 지내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이런 만남과 우정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갖습니다.

 

세 번째는 아가페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사랑의 단계입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사랑입니다. 인류는 현자들을 통해서, 종교를 통해서 이런 사랑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파수꾼, 등대지기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보상을 받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런 보상을 원하지 않고 파수꾼과 등대지기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어려운 이웃,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의한 현장에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는 사랑의 차원입니다. [출처]조재형 작성 묵상글

 

 

 

 

부처

 

2014년 1월 8일 수요일...오늘은 [(백)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이고...

 

오늘의 복음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킬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불가능에 대한 질문의 긴 시간을 졸업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두려움을 쫓아내는 사랑의 신비 앞에 조용히 머물며 그 사랑과 함께 숨 쉬고 싶은 바람입니다.

 

 

사랑의 3가지 차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입니다. 이는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사랑입니다. 자연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있고, 이 생명들은 사랑을 하고, 다음 세대를 이어 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인류가 지금까지 세대를 이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플라토닉입니다. 관중과 포숙과 같은 우정을 말합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연대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가족, 동네, 부족,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제게도 친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연락을 하며 지내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이런 만남과 우정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갖습니다.

 

세 번째는 아가페입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사랑입니다. 인류는 현자들을 통해서, 종교를 통해서 이런 사랑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파수꾼, 등대지기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보상을 받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런 보상을 원하지 않고 파수꾼과 등대지기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어려운 이웃,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의한 현장에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는 사랑의 차원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말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건드리지 않는,

그대로 놔두고 기다리는 침묵의 덕이,

하여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 텅 빈 충만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고 건드리지 않는, 그대로 놔두고 기다리는 침묵의 덕이, 하여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니 감사합니다... 

침묵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며 살다가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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