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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10일 금요일[(백) 주님 공현 후 금요일]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2014년 1월 10일 금요일[(백) 주님 공현 후 금요일]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는 세상을 이긴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있다고 증언한다. 믿는 이는 이 증언을 마음에 간직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 간청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소문을 내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분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퍼져 나간다(복음).     

 

제1독서 <성령과 물과 피>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5-13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나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에서 매우 인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으로 여겨져 그 병을 앓고 있는 이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의 삶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연민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병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본 ‘벤허’라는 영화에서였습니다.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린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이 동굴에 숨어 살고 또 온몸이 종기투성이여서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며 본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한하운이라는 나환자 시인의 시를 배우며 그의 기구한 인생에 먹먹해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에는 경남 산청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에서 봉사 활동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보살폈던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의 미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듣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유럽에 가서는 학생 때 전기를 읽었던 ‘나환자의 성자’ 다미안 신부님의 출신지인 루뱅이라는 벨기에의 작은 도시를 들러 그분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저에게 나병 환자란 그저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애처롭게 여기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깊이 그들의 고통과 처절함에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당사자와 주님께서만 아시는 고통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피상적인 이해와 말로 그 아픔의 무게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대하였는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판교 성 프란치스코 성당 예수님상

 


 

 

저에게 나병 환자란 그저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애처롭게 여기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깊이 그들의 고통과 처절함에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당사자와 주님께서만 아시는 고통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피상적인 이해와 말로 그 아픔의 무게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대하였는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출처]매일미사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출처]반신부의 복음 묵상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환우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한 가련한 인간과 구체적으로 접촉하시는 치유자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한 프란치스코가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한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 당시도 나병환자들은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도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마음 한편에서는 빨리 그를 지나쳐가고 싶은 마음도 일었습니다. 그를 보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떠오른 하느님의 말씀이 귓전을 울렸습니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드디어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금까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병환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역겨움은 달콤함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그 사건이후로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속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삶은 동화 속처럼 언제나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역겨움 투성이입니다. 피하고 싶은 두려움의 대상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할 때, 도망가지 않고 크게 팔을 벌려 끌어안을 때 공포의 대상들이 은총과 축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출처]양치기신부님의 말씀 산책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출처]조재형 작서 묵상글

 

남을 닦아주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착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작년 116일 일반알현 때 교황님께서 얼굴에 극심한 병으로 흉측한 모양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마에 키스한 후 껴안아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nDimxrhkCvs]

참으로 깨끗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진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이의 더러움을 피하는 것이 아닌 나의 깨끗함으로 닦아주려는 사람이 참 사랑을 가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처음에 나병환자들을 피했지만 나중엔 그들을 품에 안아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용기와 깨끗함을 청해야겠습니다. 깨끗하게 하는 이가 깨끗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나병환자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출처]요셉신부님의 매일복음 묵상

 

 

부처

2014년 1월 10일 금요일[(백)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오늘의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치유자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한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 당시도 나병환자들은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도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마음 한편에서는 빨리 그를 지나쳐가고 싶은 마음도 일었습니다.

그를 보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떠오른 하느님의 말씀이 귓전을 울렸습니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드디어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금까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병환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역겨움은 달콤함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그 사건이후로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속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삶은 동화 속처럼 언제나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역겨움 투성이입니다. 피하고 싶은 두려움의 대상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할 때,

도망가지 않고 크게 팔을 벌려 끌어안을 때 공포의 대상들이 은총과 축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작년 116일 일반알현 때 교황님께서 얼굴에 극심한 병으로 흉측한 모양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마에 키스한 후 껴안아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깨끗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진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이의 더러움을 피하는 것이 아닌 나의 깨끗함으로 닦아주려는 사람이 참 사랑을 가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처음에 나병환자들을 피했지만 나중엔 그들을 품에 안아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용기와 깨끗함을 청해야겠습니다. 깨끗하게 하는 이가 깨끗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나병환자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소서...아멘

 

- 2014년 1월10일 금요일...주님 공현 후 금요일에...수산나 -도와줘